예藝와 흥興, 신명 나는 한국 전통음악에 어우러지다

음악 청취는 인간이 느끼는 황홀경, 행복, 사랑, 동경, 질서, 아름다움 등이 음파를 타고 밀려오는 격정(激情)을 견뎌내야 하는 신비스러운 세계 체험이다.

예藝와 흥興, 신명 나는 한국 전통음악에 어우러지다



 인간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일생의 대부분을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반응하는 데 할애한다. 세상을 보는 눈은 눈꺼풀을 닫아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차단할 수 있지만, 소리를 듣는 귀는 뚜껑이 없기에 항상 열려 있다. 열린 귀는 타인과 함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동체 형성의 기반이 되는 신체 기관이다.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은 장단과 가락이 어우러져 인간의 영혼을 가장 직접적이고 정확하게 자극하는 소리예술이다. 무엇보다도 눈보다 공간 장악력이 큰 음악은 개별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시각공간’을 극복하고 공동체적 ‘청각공간’으로 통합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음악 청취는 인간이 느끼는 황홀경, 행복, 사랑, 동경, 질서, 아름다움 등이 음파를 타고 밀려오는 격정(激情)을 견뎌내야 하는 신비스러운 세계 체험이다.



민중의 희로애락을 표현한 전통음악

일제 강점기 이후 1990년대 초까지 60년이 넘게 왜색(倭色)의 엔카(演歌), 일명 2/4∼4/4박자의 ‘뽕짝’ 또는 국적 불명의 이름 ‘트로트(trot)’가 한국의 대중음악을 완전히 지배했다. 트로트의 원래 뜻은 ‘잘 훈련된 순종적인 승마용 말의 총총걸음’이다. 트로트의 대대적인 유행은 민요처럼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 수천 년 동안 세대를 넘어 전승되었던 우리 민중의 노래가 소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 노래 엔카는 ‘도레미솔라’와 ‘라시도미파’라는 두 종류의 5음계로 구성되어 한결같이 사랑, 이별 그리고 눈물의 메시지를 울부짖는 체념과 절망의 노래다. 권위주의 사회에서 유행할 수밖에 없었던 우울한 노래를 처음으로 극복한 아티스트는 ‘문화 대통령’으로 불리는 서태지였다.


그는 1990년대 초반 젊은 동료들과 함께 팝뮤직과 힙합이 결합된 댄스 뮤직으로 대중음악 혁명을 일으켰다. 이 음악 혁명은 당시의 권위주의적 군사문화를 청산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왜색 트로트의 화려한 부활은 또 따른 권위주의에 대한 동경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서태지가 일으킨 대중음악 혁명기에 한국의 대학가에서는 군사독재의 권위주의를 비판적으로 풍자하는 탈춤과 함께 풍물의 부활 운동이 일어났다.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단절되고, 1970년대 군사독재 시절 미신으로 낙인찍혀 지금까지도 ‘농악(농민의 음악)’이라고 불리는 풍물의 부활은 전통음악의 뜻깊은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 소리를 저장해 널리 유포하는 대중매체로서 음반이 나오기 전까지 민요, 풍물(농악), 산조, 판소리 등 우리의 전통음악은 민중의 희로애락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해 왔다.


01.김천금릉빗내농악 국가무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된 김천금릉빗내농악은 진굿이 농악의 형태로

발전된 것이다. ⓒ문화재청   

02.좌수영 어방놀이 부산 수영지방에서 전승되는 민속놀이로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노동요다. ⓒ문화재청



놀이이자 가장 진솔한 감정을 담은 소리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기(氣)의 철학자 최한기의 성음학(聲音學)을 음악기학론(音樂氣學論)으로 발전시킨 민족음악학자 노동은 교수는 우리의 전통음악을 기가 통하지 못하는 답답한 심신의 기운을 통하게 하는 기화(氣化)라고 해석한다. 우리 민족이 부르고 연주해온 노래는 인생살이의 온갖 맺힘을 푸는 데 필수 불가결한 놀이임과 동시에 가장 진솔한 감정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일터에서는 노동의 고통을 잠시 잊고 일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우리 조상들이 흥겹게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일터를 벗어나면 고단한 일상에서 일탈해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여유를 즐기던 노래도 있었다.



이 모든 노래들은 ‘민요’라고 불리는 우리의 전통음악이다. 민요는 농어촌 공동체의 문화적 산물로서 노동요(勞動謠)로 나타났고, 슬픔을 공동으로 나누는 장례 의례에서 불렸으며, 농한기의 세시풍속(歲時風俗)을 뜨겁게 달구었던 유흥요(遊興謠)로서 더욱 빛났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민요는 모심기 노래, 김매기 노래, 타작 노래, 물레질 노래, 상여소리, 뱃노래, 길쌈 노래, 맷돌 노래, 소모는 노래, 애 보는 소리 등 대부분 민중의 자연스러운 생존방식인 노동과 관련되어 있었다. 또한 세시 명절 농한기에 춤과 함께 집단적 신명을 이끌어냈던 즐거운 노래로는 진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 강강술래, 놋다리밟기 등이 있다.


민요의 메시지는 3/4박자의 장단과 선율 그리고 가사를 통해 전달된다. 타령조를 기본으로 굿거리,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등 한배(한 호흡 구간)의 범위 내에서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민요의 장단은 긴장과 여유가 규칙적으로 순환하는 민중의 삶 그 자체를 정확히 노래에 투영한다. 그래서 우리의 민요는 말이 노래이고, 노래가 생활이 되는 일체성을 입증하는 민족음악이다.

03.서도소리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에서 전승되던 민요와 잡가인 서도소리 ⓒ국립무형유산원

04.판소리 판소리는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을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음악적으로 표현한 예술이다. ⓒ국립무형유산원



공동체적 염원을 신명으로 풀어내는 진취적인 풍물

풍물은 농경사회의 문화유산으로서 태평소를 불어 시작해 쇠, 징, 장구, 북 등 타악기를 치면서 노래와 춤을 곁들여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놀이다. 또한 풍물은 우리 민족의 공동체적 염원을 신명으로 풀어내는 진취적 문화양식이다. 놀이 형식의 풍물은 풍물의 행렬 앞에서 타악기를 연주하는 치배들과 뒤에서 신명을 주도하는 잡색(허두잡이)으로 구성되고, 구경꾼들에게 자지러지고, 푸지며, 신명을 긁어내고, 발과 몸을 저절로 놀리는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신명을 못 이겨 여기저기서 불규칙하게 뱉어내는 고함, 추임새, 박수 소리, 거친 숨소리가 규칙적인 흐름의 가락이 된다.


풍물의 가락은 신명을 맺고 풀면서 한판의 풍물을 형성해 집단신명(대동신명)을 만들어간다. 이에 반해 굿 형식의 풍물은 우리 민족의 진지한 존재론적 문화양식이다. 신과 인간, 영원과 소멸, 이상과 현실 그리고 가지(可知)와 불가지(不可知)라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와 그 고통을 신(神)과의 교감을 통해 극복하려는 신인융합(神人融合)과 성속일여(聖俗一如)의 실천 행위다. 풍물 굿은 아름다운 현실이고, 다면적인 실제이며, 대동(大同)의 미학(순수한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에 소리를 투영한 한국의 오페라, 판소리

2003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고, 200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된 판소리는 남녀 무당들의 주술적 노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조선 말기부터 가객들이 서민들의 한 맺힌 이야기를 ‘소리’에 투영한 소리예술이다. 판소리는 문물집산(文物集散)이 이루어졌던 수로(水路)를 따라 발달한 ‘산업형 재화의 꽃’으로서 동·서편제로 나뉘어 주로 전라도를 중심으로 그 명맥을 이어왔다. 웅장한 느낌의 우조(羽調)를 띠고 발성을 무겁게 하는 동편제는 전라도 동북 지역(운봉, 구례, 순창)에서 전승되고, 슬픈 느낌의 계면조(界面調)를 띠고 가벼운 발성법을 사용하는 서편제는 전라도 서남 지역(보성, 광주, 나주)에서 연행된다.


오늘날까지 신재효가 구비가창물(口碑歌唱物)로 전해오던 판소리 사설(긴 서사적 이야기)을 공연가창물(公演歌唱物)로 정리한 판소리 다섯 마당인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가 전해온다. 판소리는 노래하고 이야기(아니리)하는 창자(唱者), 북으로 장단을 맞추며 흥을 돋우기 위해 추임새를 넣는 고수(鼓手) 그리고 추임새를 넣어 직접 소리판에 참여하는 청자(聽者)가 어우러진 자리(판)에서 노래(소리)를 즐기는 놀이이자 예술이다. 이러한 판소리는 크게 세 가지 요소인 사설, 음악 그리고 연창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설은 구전된 설화, 상황에 맞는 민요, 육자배기, 무가(巫歌) 등이 혼합되어 있고, 가락 없이 읊는 아니리는 사건의 변화, 시간의 경과, 주인공의 심리묘사, 작중 인물의 대화 등을 전달함과 동시에 창자에게 휴식의 기회를 제공한다.


음악적 요소로서 창조와 유파, 가풍, 스승이 제자에게 전해주는 기교는 도제(徒弟)적 전승으로 남아 있으며, 장단은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엇모리 등 여섯 가지가 있다. 연창 공간은 아니리와 창으로 이루어진 창자의 소리, 장단을 담당하는 고수의 북소리 그리고 청중의 추임새와 갈채 소리가 결합된 무대다. 이 무대에서는 서양의 오페라와 달리 문학작품의 배경을 이루는 무대그림이나 장치가 없기 때문에 창자는 소리의 장단, 고저, 강약, 천심 등의 억양법을 사용해 모든 장면과 상황을 음성으로 묘사한다.


가까운 장면은 크고 굵은 음성으로, 먼 장면은 약하고 가는 음성으로 묘사함으로써 ‘소리의 원근법’을 사용한다. 이처럼 한국의 작은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판소리는 우리의 소리꾼만이 보유할 수 있고, 인류의 창극문화(唱劇文化)에서 보기 드문 최고의 기예(技藝)를 자랑한다. 그래서 판소리는 소리꾼, 고수, 구경꾼들이 함께 만든 놀이마당(판)에서 서민들의 희로애락을 오롯이 투영하는 소리예술로서 오늘날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05.거문고산조 주로 남도소리의 시나위가락을 장단(長短)이라는 틀에 넣어서 연주하는 기악독주음악인

거문고산조 ⓒ국립무형유산원

06.가야금산조 가야금의 독특한 음색이 잘 표현되는 독주곡 형식으로 반드시 장구 반주가 따른다. ⓒ국립무형유산원



우리 민족 고유의 실내음악, 산조

19세기 말에 탄생한 산조(散調)는 ‘허튼가락’이란 뜻으로 남도 무악(巫樂) 계통의 민속음악인 시나위(남도 지방의 즉흥적 환상곡)에서 파생된 우리의 전통음악이다. 산조에서 산(散)은 흩어진 가락이고, 조(調)는 흩어진 가락을 모아 놓은 장단이다. 여기서 가락은 질서 없이 즉흥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질서가 유지되면서 새로운 가락의 흩어짐이 창조된다. 이렇게 가락의 질서를 정확히 지키는 산조는 독주 악기로 연주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교한 실내음악이다.


더 나아가 ‘말(사설) 없는 판소리가 산조’라고 표현되듯이, 산조는 기악화된 음악 형식으로 구조적·선율적으로 판소리와 닮았다. 그래서 산조는 장단과 가락을 판소리에서 찾아 새로운 민족기악 형식으로 창작해 발전시킨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산조는 판소리처럼 감정 표현이 극심한 곡이기 때문에 현악기(가야금, 거문고, 아쟁, 해금)로는 농현(弄絃)을 만들어내고, 관악기(대금)로는 잦히고 숙여 농음(弄音) 또는 요성(搖聲)을 창조한다.


농현과 농음은 연주 음이 울린 다음에 남는 여음으로 산조의 필연적인 놀이이며, 감추어진 음을 불러일으키는 높은 차원의 연주 기교다. 특히 산조에서 농현은 우리 민족의 한(恨)과 관련되어, 한을 맺고 풀어가는 ‘한풀이’이자 ‘줄풀이’의 기예다. 이러한 한풀이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해내는 산조는 가야금산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산조는 때로는 눈물단지가 여기저기서 깨지는 슬픔의 세계를, 때로는 곳곳에서 희열이 넘치는 세계를 창조하는 한국음악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글. 김성재(조선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의 소리 커뮤니케이션』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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