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311호 『금계일기』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에는 정유재란 당시 포로가 된 노인(魯認)의 『금계일기(錦溪日記)』가 소장되어 있다. 현재 1책(67매)으로 남아 있는 필사본이며, 세로 33.4㎝, 가로 23.5㎝이다.

보물 제311호 『금계일기』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에는 정유재란 당시 포로가 된 노인(魯認)의 『금계일기(錦溪日記)』가 소장되어 있다. 현재 1책(67매)으로 남아 있는 필사본이며, 세로 33.4㎝, 가로 23.5㎝이다.

노인은 내수사 별제(內需司別提)로 있다가 고향인 전라도 나주에 가 있는 동안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權慄)의 휘하에 들어가 의병으로 활약하던 중 남원성 전투에서 적군의 총탄에 맞고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다. 이후 3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다가 명나라 포로들과 결탁하여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조정에 탄원서를 올려 조선으로 귀국했다. 현재 전하는 『금계일기』는 필사본 1책으로, 노인의 포로 생활 당시 외국의 생활상 및 문화를 자세히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학술 가치가 높다. 전체가 아니라 1599년 2월 22일부터 6월 27일까지를 기록한 것이다.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311호로 지정되었다.

그곳에서 중국 사람 임진혁(林震虩), 진병산(陳屛山), 이원징(李源澄) 등과 함께 탈출을 계획하여 마침내 배를 타고 중국 저우[漳州]·싱화[興化]를 거쳐 푸젠[福建]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그는 본국으로 송환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여 명나라 정부로부터 귀국 허가를 받아 돌아왔다.



포로 생활 중 고향과 나라 걱정을 기록한 일기

1592년, 조선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임진왜란은 오랜 시간 지속되며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 백성이 일본의 포로로 잡혀갔다. 부녀자를 비롯하여 여러 분야의 기술공 뿐만 아니라, 사대부들 또한 납치되었다.

노인의 『금계일기』는 이와 같은 포로 생활의 애절한 심사를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노인은 대개의 포로가 조선의 외교 전략에 의해 송환된 것과는 달리, 자력으로 일본을 탈출한 인물이다. 그는 명나라 인물들과의 연대를 토대로 일본 탈출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겼다. 숨 막히는 탈출 일정 속에서도 노인의 마음은 조선의 안위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했다. 그가 일기를 통해 일본의 상황을 빠짐없이 기록하고자 하였던 것은 문인으로서 그의 기질을 넘어서, 일본의 부당한 행태를 조선과 명나라에 알리고자 함이었다. 의병으로서 그의 마음가짐은 일본에 포로로 잡혀 돌아갈 날을 기약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이와 함께 『금계일기』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처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곳곳에 발견된다. 매일 같이 꿈자리에서 부모님을 만나고 눈물 흘리는 그의 모습, 처자식에 대한 걱정에 새벽잠을 설치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사대부이자 한 명의 인간인 노인을 발견할 수 있다. 명나라로의 탈출 이후, 성리학을 강론하며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 그의 모습에는 고향에 대한 애달픈 그리움이 짙게 깔려 있다.

조선인의 눈으로 본 일본과 명나라
오늘날 『금계일기』가 큰 주목을 받는 이유는 조선 중기 외국의 생활상과 문화를 살필 수 있는 사료라는 점 때문이다. 일본에 피랍된 이후의 행적 속에서, 16세기 외국인의 눈에 비친 일본의 모습이 담겨 있다. 물론 그 시각은 당시 일본을 왜적이라 낮잡아 불렀던 중세인의 관점이 바탕이 된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사와 관련한 사료가 매우 희귀하다는 점에서 『금계일기』의 가치는 크다.
그뿐만 아니라 명나라를 거치며 조선으로 돌아온 노인의 행적과 그가 남긴 기록들은 당대 사대부들의 명나라 인식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시 주목된다. 중세 유교 사회에서 대개의 사대부가 보이는 명나라에 대한 관습적인 인식 맥락이 포로 생활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오늘날 『금계일기』가 중세 사회를 이해하는 주요한 사료로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앞부분과 뒷부분이 멸실되어 완전하지가 않다. 그래서 1599년(선조 32) 2월 22일부터 그 해 6월 27일까지의 일기만이 남았다. 즉, 일본의 무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밑에서 포로 생활을 할 때부터 탈출할 때까지 우리나라의 문물제도를 그들에게 소개한 내용과 그들의 풍속, 습관 및 포로들에 대한 대우, 탈출 경위 등을 기록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는 그들과 생활하면서 그곳 사람들의 생활상태와 문화에 대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중국에 표류했다가 살아온 기록으로는 최보(崔溥)의 『표해록(漂海錄)』이 있다. 일본에 포로로 갔다가 살아온 기록으로는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과 정희득(鄭希得)의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 정호인(鄭好仁)의 『정유피란기(丁酉避亂記)』가 있다. 『노인금계일기』는 위의 기록들을 모두 한데 묶어 놓은 듯하다.

노인이 죽은 뒤 약 200년이 지나서 후손들이 그의 일기와 시문을 모아 『금계집』을 간행하였다. 거기에 『금계일기』에서 멸실된 전후 부분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문집을 편찬할 당시까지는 멸실 부분이 없이 온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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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