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력덕후의 나라, 조선

조선 왕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바로 외적의 침략에서 국가를 지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무기개발은 고대부터 국가의 중요한 과제였다.

화력덕후의 나라, 조선

화력덕후의 나라, 조선 왕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바로 외적의 침략에서 국가를 지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무기개발은 고대부터 국가의 중요한 과제였다. 중세를 넘어 근대로 향하던 시기, 무기개발은 더 치열해졌고 더 과학적으로 업그레이드 됐다. 현대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괄목할 만한 무기 기술은 그렇게 이룩된 것이다.


일찍이 화약무기의 중요성 인식한 조선의 왕들

태종은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을 등용해 화약무기 연구 개발에 전념케 했다. 그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 북으로는 여진, 남해와 서해에는 왜구의 침략이 끊이질 않아 이들의 침략을 막기 위한 화약무기 보유가 절실했다. 태종의 지원 아래 최해산은 태종 9년(1409년) 총통 수십 개를 장착한 화차를 개발한다

태종의 영향을 받은 세종은 왕자 시절부터 화약무기 개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새로운 화약무기 연구개발에 더욱 힘을 많이 쏟았다. 세종은 평소에도 화약무기 연구 현장에 쉽게 가보기 위해 군기감의 대장간을 궁궐 옆에 짓게 하였다. 화약무기 개발 중 폭발사고가 발생했을 때는 부상자들을 잘 치료하고 보살피며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세종이 화약무기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왕의 많은 관심과 지원으로 당시 화약무기 기술자들의 사기도 무척 높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세종 15년(1433년) 9월에는 한 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총포를 개발한 공로로 변상근 등이 포상을 받았는데, 그 시기에 한 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우리의 독창적인 화포를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


01.보물 860호 비격진천뢰 02.병기도설 25종 화기 그림


독창적인 우리의 화약무기

세종은 1445년 3월 30일, 그동안 진행된 화약무기의 개발과정과 성과를 직접 발표하였다. “내가 즉시 군기감에 명하여 대장간을 행궁(行宮) 옆에 설치하고 화포를 다시 만들어서 멀리 쏘는 기술을 연구하게 하였더니, 전의 천자화포(天字火砲)는 4, 5백 보를 넘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만든 것은 화약이 극히 적게 들고도 화살은 1천 3백여 보를 가고, 한 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1천보까지 가며, 전의 지자화포는 5백 보를 넘지 못했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8, 9백 보를 가고 한 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6, 7백 보를 가며”라고 새로 개발된 총포의 제원을 발표한 것이다. 이를 보면 개량 전보다 사거리 가 2배가량 향상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총포 기술이다.

세종 때의 총포는 고려 말부터 사용하던 총포의 내부 구조를 창의적으로 개량한 것으로, 적은 양의 화약을 사용하지만 폭발력이 극대화돼 발사체를 더 멀리 날아가게 하며, 한 번에 여러 발의 화살 발사가 가능하도록 개발했다. 이러한 총포의 내부 구조는 우리의 고유한 방식으로 조선 말기까지 계속 쓰인다.

세종이 1445년 3월 발표한 화약무기 정보는 3년 뒤인 1448년 9월 『총통등록』이라는 책으로 간행된다. 안타깝게도 『총통등록』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지 않지만 천만다행으로 1474년 편찬된 『국조오례의서례』의 「병기도설」에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개발된 모든 화약무기의 자세한 제원이 전해지고 있다. 세종 때 개발해 확정한 화약무기 종류는 모두 23종으로, 크게 나누어 보면 총포류가 10종, 폭탄류가 8종, 로켓화기가 5종이었다.



해전 필수화기, 장군화통과 대전

세종대의 가장 큰 포는 ‘장군화통’이다. 포신의 길이가 90cm, 최대 지름 16.6cm, 구경 10cm이며 무게는 104근 10세총통량(약 63kg)이었다, 무게 4근 8냥(약 2.7kg)짜리 철촉이 달려있는 길이 1.9m의 ‘대전(大箭)’을 1,300보까지 날려 보낼 수 있는 성능이다. 거의 1.5km 이상 날아간 셈이다.

그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성능이 아닐 수 없다. 장군화통은 임진왜란 때 ‘지자총통(地字銃筒)’으로 개량되어 거북선과 판옥선에서 사용되었다. 최근 필자의 연구 결과 지자총통은 거북선의 2층 전면 좌우에 설치되어 왜군의 함선을 파괴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자총통은 1555년 규모가 확대되어 천자총통으로 개량 발전되고 거북선에 장착되어 길이 3m의 대장군을 발사하여 왜선을 침몰시키는 등 큰 위력을 발휘했다.


03.천자총통 ©국립중앙박물관 04.보물 854호 세총통


육전 필승화기, 진천뢰와 총통완구

‘총통완구’는 큰 돌을 발사할 수 있는 포다. 일반적으로 총포는 총의 내경보다 작은 탄환이나 화살을 넣고 발사한다. 그런데 완구는 총의 구경보다 큰 것을 발사하는 총통이다. 총통완구는 직경 33.5cm, 무게 32.6kg짜리 석환 1개를 쏠 수 있는 포이다. 이 포는 무게가 무거워서 석환을 담는 상부와 화약을 넣고 폭발시키는 하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발사할 때는 상부와 하부를 밧줄로 묶어 하나로 조립해 사용하였다.

상부는 최대 외경이 42.5cm이고 길이가 34cm, 무게는 62.4kg이며 하부는 최대 외경 20cm, 길이 41cm인데 무게는 59.4kg이어서 무게의 합이 121.8kg으로 장군화통보다 두 배나 무거운 포이다. 발사할 때 화약을 30냥(약 1,125g) 넣고 발사하면 370보 정도 날아갔다. 즉, 185m에서 370m를 날아간 셈이다. 유럽의 전함에서는 무게 10.9kg짜리 철환으로 100m 거리에서 약 1m 두께의 단단한 선체를 관통할 수 있었다고 하니 총통완구의 석환도 왜선을 충분히 파괴할 수 있는 무게였다.

총통완구는 임진왜란 때 대완구로 개량되어 직경 33cm에 무게 72kg의 진천뢰를 발사했다. 진천뢰는 철로 몸통을 만들고 그 속에 철 파편 30개와 화약을 넣고 주화로 점화해 대완구로 발사했다. 중완구에서는 비격진천뢰를 발사하였다. 진천뢰와 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 때 육지 전투에서 왜적을 격퇴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거북선 용두에 설치된 일총통

‘일총통’은 길이 75cm, 총구 직경 67mm, 무게 24.9kg이다. 길이 168cm 차대전(철촉 무게 900g)이나 길이 73cm 중전(철촉 무게 337g)을 발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 포는 현자총통(玄字銃筒)으로 개량되어 거북선과 판옥선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거북선에서는 용두에 설치해 한 번에 직경 3cm 철환 30개를 발사하여 적군을 살상하는 데 사용했다. 실제로 1978년 2월 10일 통영군 산양면 저도 앞바다에서 어부가 건져 올린 것도 있다.

필자는 1979년 12월 5일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있던 일총통을 조사하던 중 포 속에서 화약의 폭발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막는 나무로 만든 원통형 격목(激木)과 화약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발사준비를 해놓고 배가 침몰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일총통은 임진왜란 당시에는 현자총통으로 개량되어 거북선의 용두에서 한 번에 철환 수십 개씩 발사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과 판옥선 전면에 천자총통과 지자총통이 설치되어 대장군전과 장군전을 발사함으로써 적선을 격침시키는 방법으로 23전 23승을 거둘 수 있었다. 특히 거북선은 왜선에 가까이 접근하여 공격함으로써 대포의 명중률을 높여 전쟁에서 기선을 제압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육지 전투에서는 진천뢰와 비격진천뢰 그리고 화차 등이 큰 공을 세웠다. 결국 태종대부터 50년간 개발한 전통 화약무기를 해전과 육전에서 잘 활용한 덕분에 임진왜란에서 왜적을 격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 조상들의 무기에 대한 연구와 호기심, 고민은 정신적 계승을 통해 현대로 이어지고 있다. 최신 무기체계인 육군의 다연장로켓 ‘천무’를 비롯해 제리코 미사일 ‘현무’ 등이 바로 그 계승의 산물이다.

그 밖의 우리 무기 여성과 아동도 쏠 수 있는 조선 권총 ‘세총통과 철흠자’ 세종 때 개발한 총 중 가장 작은 총은 길이 14cm, 무게 3량 5전(약 106.5g)의 ‘세총통‘이다. 장군화통의 360분의 1로 아주 작은 총이다. 『세종실록』에는 “군기감에서 만든 세총통을 시험해 보니 갖고 다니기와 쏘기에 모두 편리하였다. (중략) 위급할 때에는 어린이와 여자라도 가지고 쏠 수 있기 때문에”라고 기록되어 있다. 폭탄 덕후의 나라 ‘질려포통’, ‘발화통’ 그리고 ‘진천뢰’ 세종대에는 폭탄도 있었는데 25~35cm의 공 모양의 나무통에 화약, 지화, 소발화, 철 파편[菱鐵]을 넣어 만든 ‘질려포통’이라는 폭탄이 3종류 있었다. 종이로 윈통형으로 통을 만들고 화약을 넣어 점화선에 불을 붙여 적에게 손으로 던지는 ‘발화통(發火筒)’은 지금의 수류탄 같은 종류의 폭탄이었는데 4종류가 있었다. 질려포통은 임진왜란 직전 ‘진천뢰’와 ‘비격진천뢰’로 발전되어 육지 전투에서 왜적을 격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5세기 세계 최대 다탄두 미사일 ‘신기전’ 2008년 영화로도 소개된 신기전의 종류는 소, 중, 대, 산화(散火) 신기전 등 4종류가 있었다. 신기전의 구조는 종이를 말아서 만든 약통을 안정막대 역할을 하는 긴 대나무에 묶은 것이다. 가장 큰 대신기전의 경우에는 사거리가 400~500m였다. 일반적으로 대신기전에는 폭탄으로 ‘대신기전발화통’을 약통 앞에 달고 발사되었으나 60% 정도는 ‘소질려포통’을 달고 발사하였다. 특히 소질려포통은 대신기전의 앞에 부착하여 적에게 발사하면 수백 m를 날려 폭발시키는 방법으로 적군을 살상하였다. 당시로는 수백 m 떨어진 적진에 폭탄을 날려 보내 폭발시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육상 전투의 최종병기 ‘화차’ 태종대 개발된 화차는 1451년 문종이 2가지 종류로 업그레이드했다. 한 종류는 길이 2.3m, 폭 73cm, 높이 1.2m의 수레 위에 소, 중신기전 1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발사틀을 장착한 것이고 또 다른 것은 ‘4전총통’ 50개를 장착한 발사틀을 설치한 것이다. 4전총통은 세전 4발을 쏠 수 있는 것이니 모두 200발의 세전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화력의 화기이다. 문종 때 전국적으로 450여 대가 제작되어 배치되었다. 화차에서 사전총통을 발사하면20~30m 폭의 전방 120m에서 180m 지역에 200발의 세전이 날아가니, 그야말로 조선 최종병기였다. 출처 / 채연석(UST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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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