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 고치고, 새롭게 쓰다

문화재의 복원과 재현은 역사를 되새기는 작업이다. 산업혁명 이전의 세계는 문화재의 보존에 대한 이론과 방법이 전무했다.

바르게 고치고, 새롭게 쓰다

문화재의 복원과 재현은 역사를 되새기는 작업이다. 산업혁명 이전의 세계는 문화재의 보존에 대한 이론과 방법이 전무했다. 무지의 연습을 반복하며 복원 기술과 재현의 정교함이 더해졌다. 어느덧 우리나라도 문화재를 복원하는 데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게 됐다. 다시 태어난 우리의 문화재,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자

01.국보 제1호 서울 숭례문 2008년 방화로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훼손되었다. 이후 5년 2개월에 걸친 복원공사로 2013년 부활하였다. Ⓒ셔터스톡



콘크리트에 뒤덮인 백제 최고의 석탑

7세기 중엽 백제 무왕대에 창건된 미륵사는 백제를 대표하는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으며, 세 개의 탑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탑과 동탑은 소실되었으며, 서쪽의 탑이 바로 국보 제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다. 이 석탑은 현존하는 최대(最大)·최고(最古)의 석탑이자 초기 석조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백제고도(百濟古都)의 상징과도 같다.

1,300년이라는 긴 시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오던 석탑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콘크리트로 보강되었다. 당시에는 석탑의 붕괴를 막기 위한 대책이었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었으므로 그 위상에 걸맞은 새로운 모습이 필요했다. 80년의 시간이 더 흐른 1999년, 콘크리트의 노후와 구조적 안정성 등의 문제로 석탑의 해체수리가 결정되었으나 그 당시에는 석탑의 수리기술이나 과학적 기초 자료가 충분히 수립되지 않았고, 보존과학의 인식조차 부족한 상태였다.


02.국보 제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 시기가 명확히 밝혀진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것이다.Ⓒ셔터스톡
03.미륵사지 석탑은 문화재 복원에 대해 다양한 사회적, 학문적 논의를 가져왔다. ⓒ문화재청


문화재 보존처리의 전환점을 맞다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보수가 결정된 후 10년이 지난 2008년 2월 10일, 보존과학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대한민국의 상징과도 같던 국보 제1호 숭례문이 화마(火魔)에 휩싸인 것이다. 2층 문루에서 화재가 시작되어 2층의 지붕이 무너져 내렸고, 그 충격으로 1층까지 부분적으로 파손되는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지붕의 소실로 내부 구조물이 외부로 노출되어 추가적인 붕괴 위험성이 존재했기에 하루 빨리 조치를 취하기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복구 대책을 세우게 되었다. 문화재의 수리 원칙에 따라 문화재 수리기술 및 복원에 사용될 재료의 측면에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기존 소재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고자 했으며 검증되지 않은 현대식 기법과 신 재료의 사용은 배제 하고자 했다.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내는 부품을 사용하는 것은 ‘외형’을 되살릴 수는 있으나, 내재된 가치까지 복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1층의 부재는 상당수 재활용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되었고, 소실된 건축부재는 모두 전통 소재를 사용해 전통 기법으로 새롭게 제작하도록했다. 우리나라의 상징인 숭례문에는 작은 못과 꺽쇠 하나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철물, 단청, 안료, 기와 등 모든 부재는 전통 장인들이 과거에 사용하던 방식 그대로 제작되어야 했다.

명맥이 끊어진 전통기술을 재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기에 복원 과정에서 여러 차례 진통을 겪기도 했고, 실제로 급하게 공사가 진행되었기에 부족한 점도 있다. 하지만 ‘전통 기와’에 대한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이루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진행된 「숭례문 복구용 전통기와 제작 방안 연구」 와 「전통기와 및 전돌의 활성화 방안 연구」를 통해 전통기와의 미적 아름다움과 구조적 안정성, 동파에 비교적 강하다는 점이 입증됐고 전통 수제기와 제작 기법을 기록화함에 따라 전통기와의 표준화 및 활성화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었다.

숭례문 방화 사건 이후 문화재 방재 및 보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증대됨과 동시에 화재를 대비한 중요 문화재 기록화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또한 문화재 원형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전통소재·전통기술 연구의 초석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04.국보 제155호 무령왕비 금제 관식 2012년 발굴 41년 만에 잃어버린 받침대가 발견되어 관식의 원형이 복원됐다. Ⓒ셔터스톡
05.국보 제91호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경주시 금령총에서 출토된 한 쌍의 토기. 단층촬영을 통해 그 내부가 파악되어, 용도를 추측하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으로 역사를 되살리다

보존과학계는 숭례문의 화재와 복원공사를 통해 형태 복원뿐만 아니라 역사적 고증을 기반으로 한 ‘올바른’ 보존처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보존과학의 인식이 부족했던 과거와 달리, 발전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미륵사지 석탑의 보존처리 또한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다방면의 연구를 진행했고, 수많은 전문가의 노력과 시간이 더해져 체계적인 학술연구의 성과 및 실험 데이터가 축적되었다.

학술발표, 논문게재, 특허등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술적 성과를 이룰 수 있었음은 물론이고 2009년 석탑 1층 내부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며 미륵사지의 조성연대, 창건 배경 등을 규명할 수 있는 백제사의 중요 유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석탑 수리기술 분야의 발전뿐만 아니라 고건축학·인문학·고고미술사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해체보수가 결정된 후 20년의 보수공사를 마친 미륵사지 석탑은 1,3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일각에서는 석탑을 6층까지만 복원한 점에서 의문을 제기하지만 이는 오랜 시간을 들인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거쳐 결정된 사안이었다. 7층 이상의 부재는 거의 수습되지 않았으며, 7층 이상의 모습은 문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고증 없는 보존처리는 문화재의 진정성을 해칠 수밖에 없다. 복원되지 않은 7, 8, 9층의 모습은 상상력에 맡긴 것이다.


보존과학이 나아가야 할 길

숭례문 복원과 미륵사지 석탑의 수리공사, 무령왕비 금제 관식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해 문화재 분야의 주요 학문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한 보존과학은 ‘현재진행형’ 학문이다. 보존과학자들은 문화재의 원형 복원에 힘쓸 뿐만 아니라 첨단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분석 방법을 적용해 문화재에 숨은 비밀을 찾아내고, 우리 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문화재의 가치를 지켜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전문적인 학술연구와 더불어 문화재 보존을 위한 모든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내 최고 기관인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도 다양한 전시와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실제 보존처리 현장을 직접 체험하고 싶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진행 중인 국립문화재연구소의 [生生보존처리데이] 프로그램과 함께,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빛의 과학, 문화재의 비밀을 밝히다] 특별전을 통해 첨단과학기술과 함께 발전한 보존과학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X선과 컴퓨터 단층촬영법(CT) 등의 분석 장비가 문화재 분야에 도입되면서 문화재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고, 문화재의 형식적·양식적 측면에 집중한 인문학적 연구가 주를 이뤄 오던 과거와 달리, 자연과학적 연구가 함께 진행되어 당대의 우수한 제작기술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신라시대의 대표 유물인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고려·조선시대의 청자, 연적 등이 과학기술을 만나 내부에 지니고 있던 다양한 학술적 정보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 정광용(한국전통문화대학교 기술과학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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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