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 아름답다

국보 제141호 정문경. 다뉴세문경으로 불리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이다. 현대 예술의 한 표현 방식처럼 채움과 반복을 강조한 이 특별한 문화재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다

우리 민족의 ‘美’에 대한 개념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출발했을까? 그 실마리를 엿볼 수 있는 문화재가 있다. 국보 제141호 정문경. 다뉴세문경으로 불리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이다. 현대 예술의 한 표현 방식처럼 채움과 반복을 강조한 이 특별한 문화재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단위 문양 제작. 정지은(영남대학교)



보면 볼수록 섬세한 표현

정문경(다뉴세문경)만큼 미세한 선으로 조밀하게 무늬를 장식한 공예품은 없다. 특히 논산에서 출토된 국보 제141호 정문경의 뒷면 가장자리 공간에 배치된 8개 동그라미 무늬를 들여다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지름 2cm의 공간에 20개의 동심원문이 0.2mm의 선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것이 확인된다. 오늘날 종이에 컴퍼스를 이용해도 그리기 어려운 무늬를 실측도구도 변변치 않았을 2,200년 전에 고운 점토 혹은 활석제 거푸집에 새겨 주조한 것이다.

무엇보다 반복되는 단위 문양의 형태와 그 조성 방식이 기발하다. 직사각형 내부를 하나의 대각선으로 나누면 2개의 직삼각형이 만들어지고, 대각선을 하나 더 그으면 4개의 이등변 삼각형이 만들어진다. 또다시 대각선 교차점에서 직사각형 단변에 평행하게 선을 그면 6개의 삼각형이 나타난다. 끝으로 방향을 달리해 각 삼각형 내부를 밀집된 평행선으로 채우는 선긋기를 통하여 같은 듯 각기 다른 수십 개의 단위 문양을 만들어 낸다.

정문경은 유물마다 각기 다른 크기에 외내구의 2구, 또는 외중내구의 3구로 구획하여 단위 문양을 배치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70여 점에 가까운 사례는 그 구성 방식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여러 계통의 장인 집단이 있었으리라 본다.

섬세한 기물이므로 완성하는 데도 많은 시간과 고도의 집중이 요구됐을 것이다. 이를 제작 실험한 이완규 장인(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7호 주성장 불구 보유자)에 따르면 직경 20cm 내외의 청동거울 무늬를 그리는 데 한 달 남짓 소요된다고 한다. 또한 귀한 주석을 구하여 구리와 섞어 이상적인 합금을 만들고, 거푸집에 주물을 부어 넣을 때 기술이 부족하면 무늬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


01. 정문경의 외중구    02. 국보 제141호 정문경




아주 오랜 추상과 상징의 미학

기원전 1000년 후반, 당시에는 중국은 물론이고 북아시아 지역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정문경이다. 정문경의 제작 배경에는 고조선의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 비파형동검에 이어 세형동검으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의 무기(혹은 제기)와 맞물려 고조선과 진국 혹은 한에 속하는 여러 정치체제를 이끌었던 왕 혹은 군장의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징표로 그들의 무덤에 부장되었다. 그처럼 귀하게 여겼던 신의 기물은 바다 건너 왜의 여러 우두머리 무덤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남부 시베리아 원주민 무당들의 사례로 미루어 보면, 원형 청동거울은 살아 있을 당시의 제사장 모자나 의상에 부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로 이를 위한 두 개 혹은 세개의 꼭지가 뒷면 가운데 달려 있어 ‘다뉴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문양 또한 거울 뒷면에 장식되어 별로 눈에 띄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세밀하여 잘 분간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시를 목적으로 하기보다 하늘신 혹은 태양신의 내재적인 의미를 추상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조선과 그 주변 소국 엘리트에 의해 천상세계의 메신저로서 활용된 청동거울은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그 상징적인 가치를 잃었다. 이를 만든 장인들이 흩어지거나 그 실력이 퇴보한 것이 아니라, 위세품 혹은 의기로서 보유하였던 왕이나 군장이 더는 제작을 주문하거나 지원하지 않게 되면서, 고조선의 멸망과 함께 우리의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출처/이청규(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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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