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들의 무덤 초안산 楚安山

내시들의 무덤 초안산 楚安山

도봉산의 지맥이 남쪽으로 이어져 월계동에서 산봉우리를 형성한다. 높이는 약 115.5m이며 동쪽에는 중랑천이 흐르고 서쪽에는 우이천이 흐른다. 초안산 남쪽 일대는 예안이씨의 선산이었으며 조선시대 예안이씨 묘역과 전통한옥인 각심재(恪心齋)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청백리였던 정간공 이명 묘역과 신도비(神道碑)가 있으며 불교 사찰로는 추원사(追遠祠)가 있다. 초안산 일대는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초안산에는 내시들을 비롯해 양반과 서민 등 조선시대 분묘 등 다양한 계층의 분묘1,000여기와 수 백여기의 석물들이 시기별로 분포해 조선시대의 공동묘지였음이 밝혀지고 있어 조선시대 묘제와 석조각 변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되고 있으며 2002년 3월 9일에 'xx산 조선시대 분묘군(xx山朝鮮時代墳墓群)'이라는 이름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특히 이곳에는 조선시대 궁중의 여러 업무를 담당하던 내시부(內侍府)의 관원인 내시의 분묘가 모여 있으며, 따라서 이 초안산을 '내시의 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내시묘가 다수 존재하고 있으며, 내시들의 묘들은 대부분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죽어서도 궁궐을 바라보며 왕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매년 가을에 마을사람들이 내시들을 위해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내시묘 자체는 거의 사라지고 석물들도 쓰러진 나무 취급을 받을 정도로 여기저기 흩어져 나뒹굴고 있다. 목이 잘려 나가고 허리가 잘려 나가고 배드민턴장 가림판에 덮히고 낙서하고 수난이다. 한쪽에 비석공원이라고 해서 석물들을 모와 놓았다.

와룡관(臥龍冠)을 쓰고 관복을 차려입은 예사롭지 않게 조성된 문인석들을 만났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왕이나 정승,장군 기타 벼슬아치들 등등...의 무덤 앞에 배치되어 무덤을 호위하는 형태를 띠고 있고 무덤 주인의 권위를 보여준다. 또한 무덤주인이 문신이면 문인석을, 무신이라면 무인석을 무덤앞에 배치하므로 무덤앞에 배치된 석상의 형태를 통해 무덤주인의 신분이 문신인지 무신인지 여부를 알수가 있다. 문인석은 문관을 상징하며 머리에 복건을 쓰고 손에는 홀을 들고 있으며, 무인석은 무관을 상징하며 머리에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허리에 칼을 차고 있는것이 특징이다.


훼손되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석물들


동자상


비석공원  


이 석상들이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옮겨진게 아니라면 분명 이 석상 주위엔 분묘가 존재한다.
문화재 관리 당국에서 이 분묘를 발굴해 석상과 함께 다른 곳으로 이장하거나 이곳 내시산 외곽에 내시산 전용 박물관을 만들어 내시산 곳곳에 흩어져 방치되고 있는 유물들을 한데 모아 박물관에 전시하든지 아니면 이곳은 문화재보호구역 이므로 등산로를 폐쇄하는 등 국가차원에서 문화재 보존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수립 되어야 할 것 같다.


내시 무덤의 대표격인 승극철 부부 묘역

비문 : 通訓大夫行內侍府 上世承公克哲 兩位之墓
비문의 주인공은 숙종 때 활약한 정6품 내시 '승극절 承克哲'이다.

승극철은 선조 시절 내시였던 김계한(? - 1705)의 손자이다. 그가 언제 나고 죽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1686년 포상으로 어린 말 1필을 받은 기록이 있으며, 묘비가 1694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여1687 1693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1676년 4월 11일에 존호 보 차비로서 종묘의 하향 대제와 부묘 친제에 참여하여 말 한필을 하사받았고, 1682년 10월 28일에는 주방(酒房), 1686년 4월 1일에는 주사내관(注事內官)의 자격으로 왕실 행사에 참여했다가 역시 포상으로 말 1필을 받았다. 사망할 당시에는 통훈대부로서 내시부 상세(정6품)를 지냈다. 그의 무덤을 초안산에서 최초로 발견된 내시 묘로 서쪽을 향하고 읽으며, 묘표와 혼유석, 상석 등을 갖추었다. 묘표에는 '통훈대부행내시부 상세 승공 극철 양위지묘(墓)'라 쓰여있고, 뒷면에는 숭정기원후 갑술 삼월 일 립(崇禎紀元後甲戌三月日立)'이라 쓰여 있다.
숭정 기원후 갑술년은 1634년 이지만 재갑술(再甲戌)의 오기로 추정되고 있어 묘표 (묘비)가 세워진 시기는 1694년이나 그 이후로 여겨진다. 특히 이 무덤은 묘표에 '양위지묘'라 쓰여 있는데, 이는 부부의 무덤을 뜻한다. 하여 내시도 혼인을 하여 부인을 두었음을 알려주는 존재로 유서가 깊다.


승극철 묘역 묘표(묘비)


이 무덤은 '양위지 묘' 4자, 즉 대지 부부 무덤으로 유명하다. 내시는 번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보통 양자를 들여 대를 잇는데 그 후손이 끊기거나 비리비리하면 무덤은 방치되기 일쑤다.
다행이 승극철 묘는 후손들이 남아있어 봉분과 묘표, 상석 등은 그런데로 남아있다. 이곳에는 그의 무덤 외에 조부인 김계한 등의 무덤도 있었으나 최다 양주시 효촌리로 이장되어 지금은 승극철 부부묘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선시대 내시는 궐내 음식물의 감독, 왕명의 전달, 궐문의 수직 등을 담당하던 내시부의 관직이다. 이곳에는 선조 때 호성공신이었던 승극철의 조부 김계한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으나 양주 효촌리로 이장하고 현재는 승극철 부부묘만 남아 있다. 내시들은 양자로 대를 잇기 때문에 손자의 성이 다르기도 하다. 연양군파 (延陽君派)라는 이름난 내시문중을 이루었던 승극철 가계에 대한 기록과 부인과 함께 묻혀 있는 모습을 통해 내시 또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으며, 養子를 통해 가문을 만들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내시부의 정원은 140명. 그들은 궁의 음식과 청소 등 궁중 살림살이를 담당하며 왕과 왕비 등 왕족을 모신 유일한 남자 궁인이었다. 이들은 거세당해 남성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왕의 남자'로 권세를 지니게 된 이들은 혼인을 하고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내시들의 혼인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이어졌지만 왕실의 비호 덕분에 내시들도 '혼인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사진 인터넷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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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