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가 여기 잠들어 있는 - 망우리 묘역

경관 면에서나 역사 면에서 가치가 높은 망우리 묘역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모색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가 여기 잠들어 있는 - 망우리 묘역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과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에 걸쳐 있는 망우리 묘역은 1933년 조선총독부가 주택난 해소를 위해 일대를 공동묘지로 지정하면서 조성되었다.



묘역 부근은 명당으로 소문이 나 인기 있는 묫자리라는 인식이 퍼져 봉분이 급격히 늘어났다. 1930년대 말에 이미 3만 기가 넘었고, 해방 후 1960년대 중반에는 4만8,000기에 가까운 묘가 들어섰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름을 남긴 유명 인사들 가운데도 망우리에 안장된 인물이 많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 독재자, 정치깡패 등 부정적 인사들의 묘역도 존재한다. 묘역 가운데 만해 한용운 묘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인사 9인의 묘소는 2010년대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1973년 만장이 되었고, 1990년대 후반부터 정비작업이 시작되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수목이 울창한 묘소 둘레로 ‘사색의 길’이 조성되었고, 산책 시민들이 쉬었다 가는 약수터(동락천)도 만들어졌다. 경관 면에서나 역사 면에서 가치가 높은 망우리 묘역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모색이 진행되고 있다.




망우동묘원

삼봉사


망우산은 서울광역시와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에 있다. 해발 282m로 높지 않은 산이지만, 아차산과 이어지는 망우산 능선에 올라서면 서쪽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수목이 잘 자라 풍광이 아름답다. 망우산의 서쪽은 서울광역시 중랑구에 속하고 동쪽은 구리시 땅이다. 동쪽 끝자락은 서울에서 경기도로 넘어가는 망우리 고개다. 조선총독부는 1933년 당시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 망우산 자락에 공동묘지를 설치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묘 터(건원릉)를 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제는 근심을 잊게 됐다’고 하여 망우리(忘憂里)라 했다는 망우산 일대에는 이로부터 이승의 시름을 잊고 잠든 영령들의 안식처가 됐다.
식민 당국이 경성의 대표 공동묘지를 지정한 이유는 주택난 때문이다. 1920년대까지 경성에는 이태원, 홍제동, 아현동 등 곳곳에 공동묘지들이 있었다. 경성 인구 증가로 집 지을 터가 부족해지자 조선총독부는 이태원 묘지를 망우리로 옮기기로 했다. 경성부가 경기도로부터 임야 20여만 평을 임차하는 형식으로 땅을 확보했다. 경성 외곽이나, 성묘를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멀지 않은 곳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조선 왕조의 왕릉이 9개나 자리잡은 동구릉 근처에 백성의 묘지를 두어 왕조의 위신을 깎아내리겠다는 속셈도 없지 않았다.
망우산 숲이 베어지고 묘지가 들어서기 시작하자 서민들은 망우리 공동묘지를 다른 곳보다 선호했다. 명당자리라는 소문도 큰 몫을 했다. 1933년부터 1973년까지 3만기 정도 분묘가 들어섰다. 정식 공동묘지 자리를 넘어 구리시 교문동 방향으로도 수많은 무덤이 생겼다. 1960년대 중반에는 이 일대 분묘가 4만8,000기 가까이 조성되었다. 장례 치를 비용이 없어 변변찮은 봉분에 나무 비석도 겨우 갖춘 무덤과 돌비석에 상석을 번듯이 갖춘 어엿한 봉분이 아래에서 위까지 꽉 채워져 나갔다.

무덤의 사연도 갖가지였고, 안장된 인물도 다양했다. 독립운동가도 있었고, 친일파도 있었다. 한국에 애정을 쏟았던 일본인(아사카와 다쿠미)도, 식민지 산림 수탈에 앞장섰던 일본인도 망우리에 묻혔다. 당대에 이름을 떨친 명창(임방울)도, 불우한 삶을 살다간 화가(이중섭)도 망우리가 영면의 안식처가 되었다. 종두법을 독학으로 터득한 의학자 지석영, 정권의 미움을 사 사형을 당한 정치인 조봉암,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 임화수, 요절한 가수 차중락…….


망우리 묘역 안창호 묘터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유명인사의 망우리 묘역만 9기다. ‘님의 침묵’ 만해 한용운 묘소가 2012년 제519호가 되었고, 2017년에는 3·1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위창 오세창(619-1호), ‘조선심(朝鮮心)’ 연구와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호암 문일평(619-2호), 어린이 운동의 최선봉이었던 소파 방정환(619-3호),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오기만(619-4호), 서광조(619-5호), 서동일(619-6호), 오재영(619-7호), 유상규(619-8호) 선생의 묘소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앞으로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한국 근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이들의 묘역 또한 등록문화재가 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소는 1938년 망우리에 안장되었으나, 1973년 도산공원(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으로 이장했다. 망우리 묘역에는 비석만 남아 있다. 도산의 묘역처럼 이장한 한국 근현대사 인물의 묘소가 적지 않다. 1973년 공동묘지를 관리하는 서울시가 만장(2만8,500기)을 선언한 이래, 새로운 묘소를 만들기는 힘들어졌고, 연고를 찾아 이장하는 묘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2018년 현재 망우리 묘역에 남은 무덤은 7,425기로 집계되었다. 그래도, 근현대 인물들의 묘역은 여전히 상당수가 망우리에 남아 있고, 찾는 발길이 이어진다.

망우리에 안장되는 무덤이 한창 늘어나던 1940년대에는 아차산과 망우산에 사는 여우들이 무덤을 파헤치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구리 일대가 격전지였던 탓에 포격으로 상당수 무덤이 파괴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비석이 바뀌어 서로 자신의 조상 묘라고 주장하는 유족들 간에 다툼이 빚어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4·19 민주의거 후 이기붕과 아들 이강석의 묘도 망우리에 자리 잡았으나, 시민들이 다시 파헤치는 일도 있었다. 이기붕 일가의 묘는 현재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망우리 묘역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사람들이 차차 늘어나면서 묘역을 정비하는 사업이 진행됐다. 1997년 중랑구가 묘역 내에 산책로를 조성하고, 안내판과 나무 정자 등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산책로는 ‘사색의 길’로 명명되었다. 묘소들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이승의 삶과 저 세상의 의미를 되새겨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근현대 인물들의 묘역은 주로 사색의 길을 따라가면서 만날 수 있다. 사색의 길은 애초에 2.5㎞ 정도였으나 차츰 늘어나 지금은 5.2㎞에 이른다.

사색의 길에는 중간쯤 약수터가 있다. 해관 오긍선 묘 표석 옆 약수터의 이름은 동락천(同樂泉)이다. 남녀노소가 함께 즐겁게 물 한 모금 나누라는 소박한 뜻으로도 읽히고, 산 사람과 죽은 이들이 동락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중의적으로 담겨 있다. 동락천의 물줄기는 어쩌면 한국 근현대의 고달픈 삶을 살다간 이들이 오늘날의 후손들을 위해 흘려주는 눈물인 듯 졸졸 흐른다. 망자를 기리는 눈물은 짭짤하지만, 동락천 물은 맑고 달다.

중랑구와 구리시는 망우리 묘역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묘지가 세계문화유산이 된 선례는 스웨덴과 마카오에 이미 존재한다. 스웨덴 스코그스키르코 묘지공원(일명 우드랜드 묘지공원)은 숲과 묘지가 어우러진 이상적인 공원이고, 마카오 신교도 묘지도 평화로운 분위기로 소문난 관광 명소다. 망우리 묘역도 그에 못지않다. 역사적 인물들이 한 곳에 묻힌 사례가 흔치 않은데다, 망우산 숲 사이 사색의 길과 묘역이 어울려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하는 인문학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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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