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일본의 군산’을 꿈꾸었으나 -

전라북도 군산시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구 히로쓰 가옥’으로 불리던 집이다. 히로쓰는 군산에서 재산을 불리고, 권력을 가졌던 인물이다.

‘영원한 일본의 군산’을 꿈꾸었으나 -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등록문화재 제183호다.

전라북도 군산시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구 히로쓰 가옥’으로 불리던 집이다. 히로쓰는 군산에서 재산을 불리고, 권력을 가졌던 인물이다. 예전에는 1925년 저택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일본인 학자가 후손 인터뷰 등을 통해 1934년 신축을 주장해, 정확한 연대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인 고급 주택가였던 치요다마치(현 월명동) 건너편 월명산 자락 신흥동에 지어진 이 집은 일본산 삼나무를 써서 일본식으로 건축되었다. 방 하나에 온돌을 설치해 한국식 주거문화를 일부 받아들인 흔적도 보인다. 넓은 터에 2층 본채와 객실체를 붙여지었고, 뒤뜰에는 별채를 두었다. 일본식 정원을 갖춘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군산의 근대역사 자취를 답사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수 코스로 꼽힌다. 영화 「장군의 아들」, 「타짜」에도 이 저택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에게 전라북도 군산은 그야말로 ‘기회의 땅’이었다.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 군산지점, 나가사키 제18은행 군산지점 등 금융기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광대한 농토를 사들일 기회가 열려 있었다. 조선 쌀 반출량의 25%를 일본으로 실어냈다는 항구를 끼고 있으니, 소작료로 쌀을 거둬들이기만 하면 재산은 저절로 불어났다. 대학생일 때 군산에 와서 1,000만 평(여의도 13배) 농장을 소유했다는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 재산을 보관할 3층짜리 별도 건물을 지었다는 시마타니 야소야(島谷八十八)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구마모토 농장에 속한 소작인만 3,000가구에 소작인이 2만 명이 넘었다. 구마모토는 농장 안에 별장을 지었고, 소작인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진료소까지 농장 안에 있을 정도였다. 일명 ‘시마타니 금고’(군산시 개정면 바르메길 43)를 가진 시마타니는 재산이 아까웠는지 해방이 되자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미 군정청에 귀화를 신청했다.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아 빈손으로 돌아간 시마타니는 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마모토 농장의 별장은 해방 후 이영춘(李永春, 1903~1980) 박사가 거주했다. 군산시 동개정길 7 ‘이영춘 가옥’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00호다. 시마타니 금고는 ‘일본인농장 창고’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 제182호가 되었다.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 본채

군산시 신흥동에도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군산을 꿈꾸었던 가옥이 한 채 남아 있다. 속칭으로는 ‘히로쓰 가옥’이고, 문화재 명칭으로는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등록문화재 제183호)이다. 일본인 부자 히로쓰는 군산 내항을 바라보면서 바둑판처럼 조성된 시가지가 확장되자 월명산 아래 신흥동에 저택을 지었다. 길 건너 치요다마치(千代田町), 지금의 월명동 일대에 일본인 고급 주택지가 들어설 무렵에 건축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종전까지 알려지기로는 히로쓰 게이사브로(廣津繼伊三郞)라는 인물이 지은 집이라 했다. 그는 군산 부자들이 대농장 소유로 부를 축적한데 비해, 군산 시내에서 포목상으로 재산을 벌었고, 농장은 군산시 임피면에 작은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군산부협의회 의원이라는 직함도 가지고 있었다. 군산부협의회를 직역하면 군산시의회쯤 되겠으나, 일제강점기 부(府) 협의회는 오늘날 시의회보다 하는 일은 적고, 권력과 권위는 막강했다. 다시 말해 히로쓰는 부와 권력을 다 쥔 인물이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2012년 후지이 가즈코(藤井和子)라는 일본인 학자가 후손 인터뷰 등을 토대로 새로운 사실을 주장하고 나섰다. 우선, 저택을 지은 인물은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아니라 히로쓰 기치사브로(廣津吉三郞, 1878~1949)이며, 그는 포목상이 아니라 미곡상을 통해 재산을 모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작은 농장이 아니라 군산시 성산면에 큰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군산시 전주통(현 영화동)에 집과 미곡상회가 있었는데, 은행지점장의 권유로 치요다마치 건너편 신흥동 월명산 자락에 널찍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어쩐지 ‘쌀 수탈의 도시’ 일제강점기 군산과 더 잘 맞아떨어지는 이야기 같다.

신흥동 저택을 지은 시점도 종래의 설명과 어긋난다. 일반건축물 대장에 사용승인이 1925년으로 되어 있어, 지금까지 이 해 전후를 건축연대로 추정했다. 문화재청의 조사에서도 건축연대는 1925년으로 보고돼 있다. 그러나 후지이 씨는 1934년 무렵 히로쓰가 집을 지었다고 보았다. 향후 자녀들이 결혼할 때를 대비해 터를 넉넉히 잡았고, 집은 세심하게 신경 써서 건축했다는 것이다. 정확한 건축 시기는 향후 연구를 통해 가려져야 할 대목이지만, 넉넉한 터에 잘 지은 집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 내부


오늘날 군산의 근대 흔적을 찾아 나서는 수많은 방문객에게 ‘히로쓰 가옥’은 필수 답사 코스다.

신흥동 주택가에 자리 잡은 히로쓰 주택은 2층 본채, 본채와 비스듬히 붙은 1층 객실채, 뒷마당으로는 2층짜리 별채가 더 있다. 습기에 강한 일본 삼나무인 스기목으로 지었고, 다다미방의 장식 공간(도코노마)이나 수납공간(오시이레) 등 일본 특유의 주택 건축 양식을 보인다. 문에 창호지를 붙이는 방식도 한국 방식과는 다르게 문살 바깥에 붙였다. 그런데, 방 하나를 온돌로 만들어 일본식에 한옥의 주거문화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정원은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이다.

히로쓰는 이 저택에서 후손 대대로 사는 꿈을 키웠으나, 해방이 되자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가방 하나 들고 부산항에 가서 수속을 밟다가 가방마저 잃어버렸다고 한다.

‘히로쓰 가옥’은 해방 후 적산가옥으로서, 호남제분 설립자인 이용구 씨(1914~1993)에게 넘어갔다. 현재는 이 씨의 손녀 소유다. ‘히로쓰 가옥’은 영화 「장군의 아들」(1990년), 「바람의 파이터」(2004년), 「타짜」(2006년)의 촬영지가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히로쓰 가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년)의 주 배경인 ‘초원사진관’이 있다. ‘초원사진관’은 영화를 찍기 위해 주차장에 세운 세트다.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 측면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 정문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 뒷문



일제강점기 군산의 또 다른 유지였던 모리기쿠 고로(森菊五郞)는 아들이 1932년 발생한 일본군 장교들의 쿠데타 시도[5·15사건]에 연루되자, 재빠르게 월명공원에 ‘보국탑’과 ‘공자묘’를 세워 ‘대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보국탑에는 ‘후손들이 이곳 군산에 영원히 살면서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다짐을 새겼다고 한다. 일본에는 군산에서 태어나고 군산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직장을 가졌던 사람들의 모임(‘월명회’)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군산 곳곳에 남은 일제강점기 유산이 모두 그러하듯이, ‘히로쓰 가옥’ 역시 단지 암울했던 시대가 남긴 흔적이 아니라 군산의 근대를 깊이 성찰해 봐야 하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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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