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련종日蓮宗은 법화경을 성불로 가는 길로 보고 있다

『법화경』의 본래 명칭인 '묘법연화경'이라는 이름 자체가 모든 경전의 본질이며, 그것은 사실상 석가모니부처님이 성취한 깨달음의 경지와 동일함은 물론이고,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참된 경지인 진여眞如와도 동일하다고 선언하였다.

일련종日蓮宗은 법화경을 성불로 가는 길로 보고 있다

과거 한국과 일본에서 성립된 불교의 종파들은 대개 중국의 것을 유입하여 나름대로 전개한 것들이다.
특히 일본에서는 중국의 종파들이 그대로 전래된 사례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현재 일본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확보하고 있는 정토진종淨土眞宗은 중국 정토종의 일본적 변용이다.

친란親鸞을 종조로 하는 불교의 일파로 생략해서 진종眞宗이라고도 하며『정토삼부경』을 정의의 성전으로 한다.
진종이라는 명칭은 중국에서도 보이며,당나라 종밀의『우란분경소』에는 “진종 아직 이르지 못하니”라고 되어 있고, 법조의『정토오회법사찬』에는 염불성불시진종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자체 내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되어 크게 번성한 종파도 있다.
그래서 종파의 명칭도 창시자의 이름으로 불린다.



일본 발음으로 니치렌이라 불리는 일련一連(1222∼1282년)이 창시한 일련종日蓮宗이 바로 그것이다.
일련종은 천태종과 대승경전의 하나인 법화경을 성불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로 보고 있으나, 천태종보다『법화경法華經』을 좀 더 절대적으로 받아들여 다른 가르침을 배격한다는 점이 다르다.

일련 사후에 여섯 제자에 의해 널리 퍼졌으며 여러 분파가 생겨났다.
사찰은 5,200개, 신도는 330만 명으로 집계된다.
대학과 병원도 운영하고 있다.

일련종은 일제시대 이래 끊임없이 우리나라에 포교하길 시도하고 있을 만큼 적극성을 지니고 있는데, 창시자인 니치렌의 사상과 행적 속에 이미 일련종의 성격이 담겨 있다.

가마쿠라鎌蒼시대를 마감하는 위대한 개혁가요 종교인이었던 일련은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천태종의 성지로 유명한 히에이산比叡山에서 10년 동안 천태교의와 수행을 닦은 후,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한다.

즉 일체를 포용하는 최상의 진리는 천태종의 근본경전인『법화경』에 있으나, 특히 말법시대의 단순한 일반인에게 있어서는 천태종의 교의와『법화경』의 독송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법화경』의 본래 명칭인 '묘법연화경'이라는 이름 자체가 모든 경전의 본질이며, 그것은 사실상 석가모니부처님이 성취한 깨달음의 경지와 동일함은 물론이고,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참된 경지인 진여眞如와도 동일하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주장하길, 따라서 누구나 부처님이 성취한 최상의 경지 속에 처해 있음을 발견하려면,『법화경』의 제목을 '나무묘법연화경(불가사의한 법인『법화경』을 부릅니다)'이라는 형식으로 입 밖에 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였다.

그는 이처럼 간단한 개인적 신앙에 국가적 의의를 부여하였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나무묘법연화경'의 염송이라는 수행을 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계단戒壇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이념이 실현된 국가가 바로 계단이라고 하였다.
일련은 자신이 주창하는 신앙을 확고히 하기 위해 만다라를 만들었는데, 이 만다라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나무묘법연화경'이라는 글씨였다.
이 글씨를 중심으로 하여 부처와 보살들의 이름, 유명한 불교인의 이름, 그리고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神道의 신들의 이름이 둘러싸여 있다.
신앙의 구심점이 된 이 만다라는 묘법연화경이라는 제목에 담겨 있는 진리가 모두를 포용함을 상징한다.

『법화경』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니치렌은 자신의 확신을 그려 나갔다.
그 확신이란 일본을 통하여『법화경』의 교의가 세계 전역으로 전파될 것이며, 자신은『법화경』에 등장하는 보살의 화신이고『법화경』을 보급하는 데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관심을 현상세계로부터 초월세계로 돌리지 않았고,『법화경』의 종교적 진술을 자신이 처한 당 시대와 국가에 결부시켰다.
일련의 이러한 확신과 적극성은 당연히 당시의 정부와 다른 종파들로부터 불신과 반발을 야기하였다.

1260년『입정안국론入正安國論』을 비롯한 몇몇의 소론에서 그는 거짓된 교의, 특히 정토교의 교의가 확산되고 있음과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경고하였으며, 몽고족의 침입을 예언하였다.
오로지 자신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나무묘법연화경'을 외움으로써 국가를 대이변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입정안국론』을 황실에 보내 바른 교의를 확립해야만 국가가 안정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수도인 가마쿠라의 거리에서 자신의 교의를 설파했다.
이에 정토교 추종자들은 그의 집에 불을 질렀고, 1261년 정부는 그를 유배시켰다.
사면되자 그는 더욱 열을 올려 다른 종파들을 공격하였고, 정부를 비판하는 비망록을 저술하였다.

굽힐 줄 모르는 그의 태도는 결국 다른 종파와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군사정부를 자극하여,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극적으로 사형집행으로부터 벗어나 사도라는 섬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시절에 그는 여러 저서를 통하여 자신의 교설을 발전시켰다.
유배에서 풀려나자 미노부산身廷山에 기거하면서 전교활동과 추종자들을 수련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의 재가신도에는 지방의 무사계급이 많았다.
특히 여성신도가 많았던 점이 특색이다.
이에 따라 가족도덕과 주종主從의 도덕을 중시하고, 특히 조상과 부모에 대한 보은, 군주의 은혜, 아랫사람에 대한 보은을 강조했다.
이는 무사계급을 주체로 하는 당시의 사회질서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군주나 부모와 신앙이 다를 경우에는, 그들을 법을 그르치는 무리라고 비난하여 관계를 끊더라도『법화경』에 의지하는 신앙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생각한 것은 국왕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법화경』의 신자가 될 때, 신들도 선신善神이 되어 국가를 수호할 것이라는 이상이었다.
그렇게 하여 일련종은 세력을 확장하여 갔다.
그의 강한 국가의식은 결국 추종자들을 확대시킬 수밖에 없었다.
다른 종파의 지도자들은 주로 개인의 해탈을 강조한 반면, 일련은 국가적 차원에서 사회적, 종교적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후 일련종 내에서도 몇 개의 분파가 형성되었는데, 그중 어떤 지파들은 민족주의적 성향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고, 지나친 경우에는 국가를 위한 창시자의 종교적 감정을 곡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현상의 원인은 바로 일련 자신의 행적에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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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