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사도세자를 찾아 정조가 다니던 화성효행길

사연이 배어있는 옛길

아버지 사도세자를 찾아 정조가 다니던 화성효행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로 옮기고 매년 능을 찾았다. 도성에서 무덤이 있는 현륭원까지 이르는 길은 정조효행길 또는 화성효행길이라는 이름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배다리를 이용해 한강을 건넌 후 과천에서 수원으로 이동했지만, 1795년부터는 한강을 건넌 후 시흥(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을 지나 수원으로 향했다. 과천길을 버리고 시흥길을 택한 것이다. 시흥행궁에서 머무른 뒤 지지대고개를 넘어 수원화성에 도착했으며, 화성행궁을 출발해 대황교를 지나 현륭원으로 이동했다.

조선의 임금 정조는 한양 도성에서 백리 정도 떨어진 현륭원을 매년 한 차례씩 행차했다. 이 때문에 한양에서 경기도 화성의 현륭원에 이르는 길은 효행의 길로 닦아질 수 밖에 없었다. 본래 한양에서 남부지방으로 이동하던 길은 한강을 건넌 후 노량진에서 남태령을 넘어 과천과 수원을 지나는 길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1790년에 첫 행차부터 이용했던 과천을 경유하는 과천길 대신 1795년부터 시흥길을 새로 닦았다. 시흥길은 과천으로 이동하는 길보다 멀었지만, 평지이기 때문에 남태령과 같은 높은 고개를 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었다. 시흥길로 옮기게 된 다른 사연도 전해진다. 장헌세자를 처벌할 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김상로의 형인 김약로의 무덤이 과천에 있기 때문에, 이 무덤을 피하기 위해 과천길을 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안양에 만안교를 축조했고 시흥행궁도 설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시흥은 지금의 경기도 시흥이 아니라 서울특별시 금천구이다. 시흥길과 과천길이 만나는 곳은 안양시 평촌동에 있던 갈뫼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갈산점으로도 불렸으며,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삼남지방으로 가던 길손들이 많이 쉬어 가던 곳이었다.



만안교와 만안교비 (사진출처:문화재청)


한강은 배를 연결한 다리를 통해 건넜으며, 그 이남에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하천을 건너기 위해 새롭게 다리를 부설했다. 한강을 건널 때에는 노량진과 용산나루에 80여 척의 배를 연결해서 배다리를 만들었다.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동할 때에 안양에 이르러서는 냇물을 건널 수 있는 만안교(萬安橋)를 만들었고, 수원에서 화성으로 이동하는 중간에는 대황교(大皇橋)를 설치하여 하천을 건넜다. 만안교는 1980년 8월에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이동해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으로 이전했다. 대황교는 경기도 수원시와 화성시의 경계 부근에 있었는데, 이 구간을 통과하는 국도 제1호선의 확장 공사 때에 화성시의 현륭원 입구로 옮겨 놓았다.

정조가 화성의 융릉으로 행차하던 구간은 용산나루-배다리-노량나루-장승고개-대방천 다리-대방천들-마장천 다리-문성동(文星洞) 앞길-수성참발소-시흥행궁으로 이어졌다. 시흥행궁에서부터는 국도 제1호선의 노선과 대체로 일치하는 길을 이동했다. 장승고개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 고개이고, 대방천교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해당한다. 마장천교는 도림천이고 문성동은 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본동이다. 시흥행궁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5동 831-6번지 일대로 비정된다. 정조는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시흥행궁을 출발해 만안교-안앙참발소-군포천-서원냇다리-청천평-사근평행궁-지지대고개-괴목정교-만석거-영화정-장안문-수원화성으로 이동했다. 안양참발소는 경기도 안양시에, 사근평행궁은 경기도 의왕시 고촌동에 있었다. 지지대고개는 경기도 의왕시와 수원시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고 괴목정교는 지지대고개의 남쪽에 있던 다리이다. 만석거는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있는 저수지이다. 영화정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정자동에 있던 정자이고,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북문이다. 사근평행궁에서는 낮 시간에 잠시 쉬어갔다. 이 구간은 지금의 국도 제1호선과 일치하지 않는다. 수원시내에서 두 노선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수원시내를 통과하는 지금의 국도 제1호선이 본래의 국도 제1호선 구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성행궁을 출발해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을 지나 현륭원으로 이동했다.

정조는 가마가 지나는 길에 글을 새긴 돌을 이용해 표지석을 길 옆에 세워두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모두 18곳에 표지석이 건립되었다. 표지석이 설치된 18곳은 지지대고개(遲遲峴), 지지대(遲遲臺), 괴목정(槐木亭), 진목정교(眞木亭橋), 만석거(萬石渠), 대유평(大有坪), 관길야(觀吉野), 영화정(迎華亭), 매교(梅橋), 상류천(上柳川), 하류천(下柳川), 황교(皇橋), 옹봉(甕峯), 대황교(大皇橋), 유첨고개(逌瞻峴), 유근다리(逌覲橋), 만년제(萬年堤), 안녕리(安寧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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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