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배려하고 존중했던 조선시대 부부간의 예의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며 살아라

서로 배려하고 존중했던 조선시대 부부간의 예의



서로 배려하고 존중했던 조선시대 부부간의 예의 우리 선조들은 부부간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기록들을 살펴보면 한반도의 부부관은 대체로 남녀의 조화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황조가>나 『고려도경』의 내용을 보면 남녀가 대체로 자연스럽게 어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리학적 관점이 들어온 조선시대에도 선조들의 부부관은 서로를 동등하게 여기는 데 기반을 두었다.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며 살아라

조선시대 부부는 예(禮)를 중시했다. 예란 본래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해석한다. 하지만 예의 진정한 의미는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교적 부부관은 퇴계 이황이 손자 안도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부부란 인륜의 시작이요 만복의 근원이란다. 지극히 친근한 사이이기는 하지만, 또한 지극히 바르고 조심해야 하지. 그래서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거란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부부간에 서로 예를 갖추어 공경해야 하는 것을 싹 잊어버리고, 너무 가깝게만 지내다가 마침내는 서로 깔보고 업신여기는 지경에 이르고 말지. 이 모두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거란다. 그 집안을 바르게 하려면 마땅히 시작부터 조심해야 하는 것이니, 거듭 경계하기 바란다.”

01.퇴계 이황 표준영정. 이유태 화백이 그린 퇴계 이황의 표준영정으로 천 원권 지폐에 사용되고 있다. 이 초상에서 퇴계는 폭건과 심의 등 사대부의 전형적인 편복을 입고 있다. 현재 한국은행에서 소장하고 있다. ⓒ문화재청
02.경상북도 기념물 제42호 퇴계 종택. 퇴계 종택에서 1.5km 쯤 더 가면, 퇴계 묘소와 양진암 옛터가 있는 하계동에 이른다. 그는 둘째 부인 사후, 46세에 양진암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현재 양진암 옛터에는 양진암구지(養眞庵舊址)라는 작은 비석만 덩그러니 남았다. ⓒ사진제공 (김지호/한국관광공사)


퇴계는 부부란 예의 시작이므로 비록 친근한 사이지만 바르고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서로 깔보고 업신여기는 지경에 이르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퇴계는 손자에게 늘 예를 갖추어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며 살아가라고 당부했다.



실제로 조선시대 부부는 서로 존칭을 사용하며 존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당시의 언어생활을 반영한 한글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15~16세기 나신걸의 한글편지와 17세기 곽주의 한글편지를 보면, 남편이 아내에게 ‘~하소’, ‘~ 하네’, ‘상백(上白: 아내에게 올립니다)’ 같은 경어체를 사용했다. 추사 김정희 같은 이도 아내 예안 이씨(禮安 李氏) 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극존칭을 쓰며 존경을 표현했다.


03.혼인 60주년 기념 잔치. 이 화첩은 혼인한 지 60년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다시 한번 혼인 의식을 치르며 장수를 축하하던 회혼례 잔치를 그린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지적장애 아내에게 끝까지 예를 다하다

퇴계 이황의 부부관에 얽힌 이야기는 또 있다. 그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이 두 아들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나이 서른에 안동 권씨와 재혼했다. 그런데 그녀는 지적장애인이었다. 전승에는 당시 안동으로 귀양 온 권씨의 아버지 권질이 퇴계 이황을 찾아와, “과년한 딸이 정신이 혼미하여 아직 출가하지 못했다”라며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한다. 그리고 퇴계는 이를 거리낌 없이 승낙했다. 조선 성리학의 종주답게, 아무리 상대방에게 부족한 면이 있다 할지라도, 철저히 예로써 대한 것이다.

그렇게 두 번째 부인과 결혼한 후, 한번은 온 식구가 분주하게 제사상을 차리던 때였다. 그만 상 위에서 배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권씨는 그것을 집어 치마 속에 감추었다. 퇴계의 큰형수가 그것을 보고 권씨를 나무랐다. 방안에 있던 퇴계는 그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와, 아내 대신 사과했다. 그리고 얼마 후 퇴계는 아내 권씨를 따로 불러 그와 같은 행동의 연유를 물었고, 권씨가 그저 ‘먹고 싶어서’라고 답하자, 그 배를 손수 깎아 주었다고 한다.

또 하루는 권씨가 흰 두루마기를 다림질하다가 조금 태우고는 붉은 천을 덧대 기웠다. 그걸 입고 외출한 퇴계를 사람들은 경망스럽다며 탓했다. 그럼에도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모르는 소리들 말게. 붉은색은 잡귀를 쫓고 복을 부르는 것이라네. 우리 부인이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기라고 해준 것인데 어찌 이상하단 말인가.”

이렇듯 퇴계는 부인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며 살아갔다. 그리고 권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을 뿐만 아니라, 처소생 두 아들에게도 친어머니와 같이 시묘살이를 시켰다. 그리고 스스로 권씨 묘소 건너편 바위 곁에 ‘양진암’을 짓고 1년 넘게 머무르며 아내의 넋을 위로했다.

04.화조도 8폭 병풍. 꽃·나무ㆍ새 등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8폭의 병풍이며, 꽃나무와 어우러진 암수 새들의 모습을 다정하게 표현하여 부부간의 화목(和睦)을 염원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아내를 스승으로 여기며 살다

조선시대 부부는 공경하고, 배려하는 관계 이상인 경우도 있었다. 학문적 동료로 서로를 대하기도 했고, 조선 후기 선비 윤광연처럼 아내(강정일당, 1772~1838)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기도 했다.

강정일당의 이름은 지덕(至德)으로, 충북 제천에서 강재수와 안동 권씨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스무 살 때 윤광연과 결혼했는데, 당시 그는 열네 살의 어린 신랑이었다. 윤광연은 명문가의 후예였으나 집안은 곤궁한 상태였다. 부부는 서울 남대문 밖의 약현에 자리를 잡았는데, 윤광연은 학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정일당은 삯바느질을 하며 조금씩 재산을 모았다. 정일당은 일하는 틈틈이 남편의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는데,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그 결과 여러 경전에 두루 통하였고, 고금의 정치와 인물에 관해 손바닥 보듯 밝았다.

윤광연은 그런 정일당을 그야말로 ‘스승’으로 여기며 살아갔다. 학문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서당일과 일상생활까지 모든 것을 조언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05.현풍 곽씨 한글편지. 17세기 중반, 곽주가 아내 하씨부인에게 보낸 한글 편지로, 곽주는 만삭의 몸으로 출산을 위해 친정에 간 하씨부인에게 편지를 써서, 각별한 아내 사랑을 표현했다. ⓒ국립대구박물관
06.나신걸의 한글편지 안정 나씨 나신걸이 부인 신창 맹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로 현전하는 한글 편지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영안도 경성에 군관으로 가면서 고향에 들르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필요한 것들을 아내에게 부탁하고 있는 내용이다. ⓒ대전시립박물관


“나에게 한 가지라도 잘하는 것이 있으면 기뻐하여 격려하였고, 나에게 한 가지라도 허물이 있으면 걱정하여 문책하였다. 그래서 반드시 나를 중도의 바른 자리에 서게 하며, 천지간에 과오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비록 내가 우둔하여 다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좋은 말과 바른 충고는 죽을 때까지 가슴에 새겼다. 그 때문에 부부지간에 마치 엄한 스승을 대하듯이 했고, 조심하고 공경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윤광연은 이처럼 공경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가 남긴 글을 모아 문집으로 간행했다. 또 주변의 이름난 문사들을 찾아다니며 서문이나 행장, 묘지명, 발문 등을 받음으로써 그 문집의 가치를 더욱 빛내고자 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부부간에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고, 존경하기까지 했다. 서로 예를 다했던 선조들의 마음가짐은 지금도 부부 사이에 유효한 가치일 것이다.  출처: 정창권(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조교수, 문화체육관광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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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