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넘는 박달재
박달재의 높이는 504m로, 차령산맥의 지맥인 구학산(九鶴山, 971m)과 시랑산(侍郎山, 691m)의 안부(鞍部)에 해당한다. 박달재를 박달산· 박달령· 박달현(朴達峴)· 박달치(朴達峙)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요즈음에는 천등산 박달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유래는 이 일대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하므로 박달재라고도 하고, 이 근처에서 죽었다는 박달이라는 청년의 이름을 따서 박달재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역사적으로는 1217년(고려 고종4) 7월 김취려 장군(金就礪)이 거란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다.
박달재 주위에는 한벽루(寒碧樓)· 덕주사마애불상(德周寺磨崖佛像)이 있고, 그밖에 지방문화재인 금남루(錦南樓)· 팔영루(八詠樓)· 자양영당(紫陽影堂)· 청풍향교(淸風鄕校) 등이 있고, 기념물로 의림지(義林池)가 있다.
제천은 약초의 고장이기도 하다. 매년 제천국제한방바이오엑스포가 열리는 한방엑스포공원은 한의학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하는 공간이다. 청풍호반케이블카를 타면 ‘내륙의 바다’ 청풍호를 하늘에서 감상할 수 있다. ‘청풍호반의 작은 민속촌’이라 할 청풍문화재단지, 솟대 테마 미술관인 능강솟대문화공간 등도 색다른 재미를 준다.
박달재는 38번국도가 충북 제천시와 충주시를 연결하고 있으며, 예부터 교통의 요지이자 전략적 요충지로서 1970년 도로확장 및 포장이 이루어졌다. 제천에서 충주를 잇는 박달재는, 터널로 인해 박달재 도로의 이용가치를 상실하였으나, 제천시가 박달재 옛길이라는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여 유지·관리하고 있다. 박달도령과 금봉낭자를 캐릭터화 하여 "박다리와 금봉이"로 명명하여 각종 캐릭터상품과 형상화한 조각공원과 목각공원도 설치 되여 개발 및 홍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고개입구에는 일주문을 건립하여 찾는 이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누구나 박달재를 찾아오면 추억을 남길 수 있는 명승지로 조성해놓고 있다.
박달재에 관련하여 박달도령과 금봉이 처녀의 애틋한 사연이 구전으로 전해온다. 옛날 경상도 청년 박달도령이 서울로 과거보러 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어 아랫마을 금봉이 처녀를 만나 사랑을 나눴는데, 박달은 과거급제하면 돌아와서 금봉이와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언약하고 상경하고, 금봉이는 도토리묵을 장만하여 낭군이 될 박달도령 허리춤에 매달아주고 먼길에 요기하도록 배려했다. 낙방한 박달이 슬픔에 잠긴 채 돌아오다가 평동 금봉이 집을 찾았는데 금봉이가 박달을 기다리다 지쳐 3일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 때 마침 박달은 고갯마루 방향을 바라보니 꿈에 그리던 금봉이가 춤을 추면서 고개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고, 있는 힘을 다해 박달은 고개 쪽으로 달려가 금봉이를 잡으려고 했으나 손이 미치지 못하였다. 박달은 간신히 고개 위에서 금봉이를 끌어안았으나 금봉이는 이내 사라지고 박달은 허공으로 몸을 날려 천길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박달은 금봉이의 환상을 보고 낭떠러지에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그 후로는 이 고개를 박달재라고 한다.
박달재란 이름을 전 국민이 안 것은 1948년 발표된 노래 박재홍 선생의 울고 넘는 박달재 덕분이다.
1948년에 박달도령과 금봉이 처녀의 애틋한 사연을 담은 ‘울고넘는 박달재(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 박재홍 노래)’가 발표되어 오랫동안 애창되고 있다. 박달재휴게소 입구에는 박달재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님아 물항나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산골 나를두고 가는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가소
도토리 묵을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에 금봉이야
이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영화와 악극으로도 만들어졌다. / 유시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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