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존 카터 코벨 교수의 세 번째 칼럼입니다.[3]

오늘은 존 카터 코벨 교수의 세 번째 칼럼입니다.[3]

 

 영국 사학자 조지 샘슨의 일본사영국 사학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영국에서 일본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조지 샘슨(George Samson) 

 경은 컬럼비아대학 재학시절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내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한 9명의 위원 중 한 사람이고, 일본 정부가 주는 훈장

 을 받았다.  오랜 기간 일본에서 살아온 조지 샘슨은 저서 《1334년

 까지의 일본사》 33~34쪽에 《이즈모 풍도기(出雲 風土記》에 전해지는 일본 고대사의 흥미로운 전설에 대해 썼다

 

.《이즈모 풍토기》는 713년에 나온 책이다. 당시 겐메이(元明) 여왕은 각 현에 그 지방의 역사와 지리, 희귀한 일 등을 기록해놓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세 군데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하는데, 그중 하나가 신라에서 온 한국인들이 정착해 살던 이즈모(出雲)에 관한 것이다.  이즈모는 적어도 2~4세기 당시에는 일본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샘슨이 그 책에 인용한 구절이다.

 

‘신이 어느 날 살펴보니 한반도 남부에 땅이 아주 넓었다. 그래서 신라 땅을 조금 떼어내 바다 건너로 끌어다가 이즈모 자리에 붙였다.

 

’'땅 끌어가기’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빙하시대의 지표이동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샘슨 경은 “이것은 남아돈 땅이 이동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주한 것을 민간 설화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침입한 것이 아니라 이주해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신라 사람들이 대규모 이즈모로 이주해 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석기시대 일본에는 인구가 아주 적었으므로, 많은 한국인이 오늘날 미국 이민을 떠나듯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당시 일본으로 가 정착한 것은 아주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혼슈 서남쪽 이즈모(出雲). ⓒ 《부여기마족과 왜》 존 카터 코벨.

 

천조대신 아마테라스의 오빠이며 일본의 역사서에 ‘맹렬한 남성’으로 기록된 스사노오노(素尊)는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 가운데서도 아주 정력적인 남자였던 듯하다. ‘그는 김해에서 바다 건너로 금과 은을 보냈다’고 한다.  또 신라지역인들의 무속적 지도자로 흰말을 탔다고 전해진다.

 

히로히토 천황도 1930년대 거동할 때 흰말을 탔다. 1973∼74년 천마총 고분에서 자작나무 말다래에 무속적 통치자의 흰말을 그린 5세기경 신라의 천마도가 발굴됐다. 영리한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들어온 무속사상에 흰말, 곡옥, 왕관과 기타 등을 연계시켰다. 1920~30년 군국세력이 팽창할 때 통치자 숭배사상이 되살아났다.

 

자작나무 말다래에 무속적 통치자의 흰말을 그린 5세기 신라 천마도. 일본의 스사노오노(素尊) 역시 흰말을 탔다고 전해진다. 내가 샘슨에게서 배운 일본사에는 ‘일본의 성스러운 통치자’로 불리던 일왕 중에 15세기에는 아주 가난해서 그저 호구지책을 위해 글씨를 써서 팔아야 했던 사람도 있다.  어떤 왕은 장례 치를 돈이 없어서 죽고 나서 몇 달 동안이나 매장되지 못했다.  군권을 장악한 권력자나 장군들이 왕위를 마음대로 세우고 찬탈했다.  14세기에는 왕권 계승에서 차남이 장남계열을 밀어내고 차지했다.  적통 장자의 후손은 1982년 지금 오사카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고, 차남으로 왕좌에 오른 사람의 후손은 지금 도쿄의 왕궁에서 지낸다.

 

그렇다. 내가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사 중 어떤 부분은 지금 일본 정부의 인가를 받아 출판된 역사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들이다.

 

샘슨 경이 예술문화사 분야의 스승으로 여기던 사람이 바로 도호쿠(東北)대학의 후쿠이 리키치로(深井陸次郞) 교수다.  후쿠이 교수는 “15세기 아시카가 막부시대의 뛰어난 수묵화가 대부분이 한국인이다. 그들은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으로 절이 핍박받자 더 이상 절에 의탁할 수 없게 된 나머지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의 불교미술가들”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편 학자다.

 

나는 이 영국인 일본사학자로부터 일본 역사의 매우 민감한 부분인 초기 고대사와 1910년 이후 전쟁을 포함한 현대사 과정을 배웠다. 현대사 부분은 아직도 그때를 증언할 사람들이 살아 있다. 그런데 초기 고대사는 1930년대 일본이 세계의 정복자를 꿈꾸며 군국주의를 팽창시킨 기저로 활용된 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2차 세계대전사를 다시 쓰는 순간에도 자국의 건국 기초가 된 고대사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의 고대사는 712년에 씌어진 《고사기(古事記)》와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두 역사책에 주로 근거한다. 《고사기》는 과거 문자기록이 불가능하던 때 가다리베(語部)의 직업인들이 역사 속 왕의 치적과 영웅담을 자자손손 내려가며 노래처럼 외워 부르던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한국의 판소리와 같은 유형이다.  일본이 과거 왜 한국의 판소리를 말살하려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6세기에 이르기까지 가다리베가 일본의 유일한 역사가들이었다.  이것에는 어마어마하게도 서기전 660년으로 설정한 첫 번째 왕의 이야기부터 내려온다.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역사는 620년 성덕태자와 그의 삼촌이자 권력가 소가 우마코(蘇我馬子)의 합작으로 시도됐다. 소가 우마코는 한국인 후손으로 왜국의 최고 군사권력자가 된 사람이다. 그러나 645년 소가 가문이 권력을 잃게 되자 그가 쓴 역사서들도 불길 속에 던져졌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그 책의 일부가 불길 속에서 건져졌다고 한다.

 

두 번째 역사 편찬은 덴무(天武) 일왕 때 시도됐다.  오랜 역사를 모두 기억하는 신하가 한 사람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옛이야기를 모두 글자로 기록하라는 임무가 학자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덴무가 바로 죽고 다음 대에 넘어가도록 아무 진척이 없었다.  결국 712년에 와서야 구전 역사가 《고사기》로 기록돼 나왔고 이것이 실존하는 최고(最古)의 일본 역사서가 되었다.

 

당시에 만든 이 책은 한눈에도 엉성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한국인들의 놀라운 위력을 입증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한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도 압도적인 것이기에 이를 완전히 감춰버리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신하 한 사람이 기억해서 풀어놓은 옛이야기는 아마 순수 일본어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29년의 작업 결과 나온 《고사기》는 순수 한문으로 씌어진 것이었다.  그 작업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또 얼마나 부정확한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다.

출처: 《부여기마족과 왜倭》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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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