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노지(ほんのうじ 本能寺, 본능사) 일본 법화종 총본산

니치렌계의 불교는 가마쿠라시대 니치렌(일련)의 가르침에 따르는 종파이다. 니치렌은 이러 종파의 교리를 공부한 후 법화경만이 올바른 경전이고 나머지 진언종, 정토종 등의 가르침은 모두 틀린 것이라고 외지며 새로운 종파를 세운다. 때문에 막부의 큰 탄압을 받게 된다. 니치렌계는 니치렌의 사후 여러 종파로 나누어진다.

혼노지(ほんのうじ 本能寺, 본능사) 일본 법화종 총본산

혼노지는 니치렌계(일련계)인 법화종의 총본산이다.



화려한 법당내부, 가운데 일련의 상이 있다


 니치렌(일련)의 상



 니치렌의 서신 (어서(御書) 라고 한다)



                                                         니치류 상인 초상화


니치렌계의 불교는 가마쿠라시대 니치렌(일련)의 가르침에 따르는 종파이다. 니치렌은 이러 종파의 교리를 공부한 후 법화경만이 올바른 경전이고 나머지 진언종, 정토종 등의 가르침은 모두 틀린 것이라고 외지며 새로운 종파를 세운다. 때문에 막부의 큰 탄압을 받게 된다. 니치렌계는 니치렌의 사후 여러 종파로 나누어진다. 먼저 다른 종파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니치렌종의 신도에게 보시를 받는가 아닌가의 여부에 따라 보시를 받는 수보시파와 거부하는 불수불시파로 나뉜다. 그리고 법화경을 두 부분으로 나눠 앞부분의 적문과 뒷부분의 본문으로 나누어 본문만 경전으로 인정하는 승렬파와 적문, 본문을 모두 경전으로 인정하는 일치파로 나뉜다. 수보시파는 일치파와 동의어이고 불수불시파도 승렬파와 일지파로 나뉜다.
최근 창가학회, SGI, 남묘호렌케교 등으로 유명해진 일련정종은 승렬파의 한 갈래지만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 속한다. 일반적인 니치렌계 종파가 불보는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제불, 법보는 법화경, 승보를 니치렌 대성인으로 정하는 데 비하여 일련정종은 불보가 니치렌 대성인이고 석가모니는 하늘에 있던 니치렌이 잠시 임시방편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다른 부처님에 대한 신앙을 엄격히 금지시킨다.


방법(정법에 반대하는)이라는 그들 특유의 윽박지르는 듯 한 지도방식 때문에 이미지가 더욱 악화된다. 현재 창가학회, 혹은 SGI는 본래 일련정종의 재가신도단체로 출범했던 것인데 현재는 싸우고 완전히 결별한 상태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창가학회는 본존이 누군지 모를 정도로 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에 대한 존경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 듯하다. 일련종은 일치파를 중심으로 승렬파 일부까지 포섭한 가장 큰 종파이고, 승렬파는 여러 분파로 나뉘었는데 혼노지는 그중 법화종 본문파에 속한다.

혼노지는 무로마치시대에 지어진 절인데 본래는 교토 남부에 있었다고 한다.
혼노지의 변 이후 전소한 사찰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재건했다고 한다. 그 후 막부파와 토막파의 싸움에서도 건물이 소실되었다. 최근 발굴 조사에 따르면 해자를 갖춘 거대한 사찰로 오다 노부나가가 이미 요새화한 절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한다.

본존(本尊)은 십계만다라(十界曼荼羅)이다. 경내에는 7개의 작은 절(혜승원(恵昇院), 연승원(蓮承院), 정성원(定性院), 고준원(高俊院), 본행원(本行院), 원묘원(源妙院), 용운원(龍雲院))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배신을 당해 자결한 혼노지의 변이 발생한 장소로 유명하다. 무로마치시대 일련종 승려인 니치류가 창건했고 이후 번성하여 아시카가씨의 후원을 받고 황족의 출가를 받는 등 번성했다. 특히 규슈까지 세력을 넓혀 전국시대에 이곳에서 총과 화약을 입수하는 곳으로 다이묘들과 깊은 연관을 맺었고 오다 노부나가에게 협력해 상경 중의 숙소로 절을 제공한다. 그 때 경내는 지금의 위치가 아니다.


혼노지의 보물전에는 일련과 관계있는 국보급 문화재가 상당히 있다. 


니치류 상인의 무덤


그러나 그 유명한 아케치 미츠히데의 혼노지의 변으로 절은 전소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그 부인 및 시동 란마루가 자결 후 소사하여 완전히 사라진다. 이후 아들 오다 노부타카가 아케치 미츠히데와 그 부하 3천의 목을 이곳에 효수하고 공양하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토를 정비하며 데라마치로 절을 이전하고 오다 노부나가의 공양탑을 세운다. 지금의 절은 텐메이의 대화재와 금문의 변 당시 소실되어 1920년대 재건한 것이다.

* 오다 노부나가 (織田 信長, 1534년 6월 23일 ~ 1582년 6월 21일)는 센고쿠 시대를 평정한 인물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연 다이묘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더불어 중세 일본 삼영걸로 불린다. 오와리국의 센고쿠 다이묘 오다 노부히데의 장남으로, 아버지 대부터의 숙적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격파하고 정이대장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해 교토를 수중에 넣고, 그마저 추방해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키면서 중부 일본 일대를 기반으로 중세 일본 봉건제의 정점에 섰다. 일본 각지역의 패자들을 차례차례 굴복시키면서 센고쿠 시대의 일본을 평정해, 하극상이 계속되던 전국 시대 끝에 최초의 천하인이 됐다.



오다노부가나의 초상과 무덤


그러나 1582년(덴쇼 10년) 음력 6월 2일,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중신(重臣)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을 막지못해 혼노지에서 자살했다. 이미 형식상으로나마 가권은 장남 오다 노부타다에게 넘긴 상태였으나 장남마저 교토의 니조 성에서 살해돼 후계자리가 또다른 중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넘어갔고, 이런 일본 통일의 기반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여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생애 내내 당시의 기득권을 부정하고 처음부터 무력으로 무너뜨렸고,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했으며 정책적으로도 낙시락좌(일본어: 楽市楽座; 일종의 상업진흥, 자유무역정책), 검지(일본어: 検地; 토지조사), 서양에의 문호 개방 등 봉건적 일본에서 누구도 시행하지 않았던 정책결단으로 문화 경제적 발전을 이뤄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열었다. 종교 정책에 있어서도 기존 불교와 신토 세력의 권위를 부정했고, 포르투갈 선교사들로부터 전해진 천주교 포교를 허용하고 자신도 잠시 관심을 가졌으나 결국 자신을 신격화 하는 데로 나아갔다. 당시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를 "신이나 부처, 사후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교도이다. 스스로 서찰에서 제육천마왕 이라고 칭했다"라고 기술한 바 있다.

*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 1526년/1528년 ~ 1582년 7월 2일)는 센고쿠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이다.


                                                 아케치 미쓰히데


통칭은 주베에(十兵衛), 아버지는 아케치 미쓰쓰나(明智光綱)라고 알려져 있다. 여생의 반은 알려져 있지 않다. 유아명은 모모마루(桃丸). 아호는 쇼안(咲庵). 태어난 년도는 1528년(교로쿠(享禄) 원년) 또는 1526년(다이에이(大永) 6년)의 두가지 설이 있다. 태어난 곳도 기후현 가니 시(可児市)에 있는 아케치(明智)의 아케치 성, 야마가타 시(山県市) 미야마(美山) 등 두 가지 설이 있다.
미노 아케치 성주로서 사이토 도산의 가신이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여러 영지를 돌아 다녔으며, 뒤에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활약한다.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를 자결케 한 인물로 유명해진 무장이다.

* 혼노지의 변 (本能寺の変)은 1582년 음력 6월 2일(6월 21일) 혼노지에서 발생한 센고쿠 사(戰國史)의 분수령이 된 사건을 말한다.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일어난 이 사건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상이 열렸다.
아케치 미쓰히데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운다는 명목으로 주코쿠로 진군 중 돌연 회군, 혼노지를 기습해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가 자결하게 된 것이 사건의 개략적인 내용이다.
1582년 5, 6월의 그 당시 일본의 정세는 오다 노부나가가 마침내 그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다케다 씨를 병합하면서 오다 가는 전에 없던 강력한 세력을 형성할 것이라 보고 있었다. 그 당시 유력 가문은 크게 모리, 호조, 우에스기로 세 가문이 있었다. 그러나 우에스기 가와 호조 가는 변방에 크게 떨어져 있어 이제 중앙으로의 진출이 어려워져 대세에 벗어난 만큼 이제 오다 가문에게 실질적인 적은 100만 석의 모리 가 정도 밖에 없었다.
그 당시 모리 가문을 공격하는 일을 총지휘하는 사람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였다. 노부나가는 여분의 병력을 모리 가문을 공격하는 일에 동원하였고 동원되는 군세 중 하나가 바로 아케치 미쓰히데였다.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아들여 단바에서 자신의 군세를 소집하여 서쪽으로 진군, 노부나가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듯 보였다. 그러나 갑자기 미쓰히데는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미쓰히데는 노부나가가 교토에서 열병식을 계획한다고 말했고 이에 병사들은 의심하지 않고 따라갔다. 그러나 혼노지에 다가서는 순간 미쓰히데가 외쳤다.

“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 本能寺に あり!)" ”

혼노지의 변 


이 말과 동시에 아케치 군이 혼노지에 난입해 들어갔다. 그 당시 노부나가는 혼노지에 숙소를 잡고 있었다. 그 당시 노부나가를 수행하고 있던 인원은 얼마 되지 않았고 1만에 이르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군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노부나가는 분전 끝에 시동 모리 란마루와 함께 자결한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 라는 말은 현재에도 일본에서 많이 쓰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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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