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와 같은 기개로 세상을 호령하다

6진(종성·회령·경원·경흥·온성·부령)을 개척한 문관 출신의 호랑이 장군 김종서

호랑이와 같은 기개로 세상을 호령하다
節齋 忠翼公 金宗瑞(1383∼1453)


세종의 업적 중 자주 거론되는 북방 개척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바로 4군(여연·자성·무창·우예)을 개척한 최윤덕(崔潤德)과 6진(종성·회령·경원·경흥·온성·부령)을 개척한 문관 출신의 호랑이 장군 김종서(金宗瑞)이다. 오늘날의 국경인 압록강~두만강까지의 국경선이 확립되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두만강, 압록강 유역에는 여진족이 자주 출몰해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에 세종은 야인(野人)의 본거지를 토벌하고자 했다.


먼저 1433년(세종 15)에 우의정 최윤덕(崔潤德)을 평안도 절제사로 삼아 압록강 유역의 야인을 정벌하고,여연(閭延), 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虞芮)의 4군을 차례로 설치해 조선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김종서는 동북면 지역의 야인을 정벌하고 6진(종성·회령·경원·경흥·온성·부령)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1435년(세종 17)부터는 함길도 병마도절제사가 되어 새로 개척된 지역에 남쪽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조선의 영토로 정착시키고, 북방 방위를 위한 비변책(備邊策)을 지어 올렸다. 김종서는 무려 7년간 함길도에 머물며 변방을 호령했다.

김종서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이다. 1383년(우왕 9) 도총제를 지낸 김추(金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대범하고 호탕한 기질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 같다.
(문화재청에서 만든 안내 책자에는 김종서장군은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어떤 역사학자는 1390년 전남 순천의 도총제(지금의 도지사급)김추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관 출신 장수로서 변경에서 세운 공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해 세종, 문종, 단종에 이르는 세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김종서는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한 후 상서원 직장, 행대감찰을 거쳐, 1419년(세종 1) 사간원 우정언이 되었다. 1426년(세종 8) 이조 정랑에 오른 데 이어 사헌부 집의, 황해도 경차관, 좌대언 등을 지냈다. 1433년(세종 15)에는 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북방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1435년(세종 17)에 함길도 병마도절제사가 되어 북방에서 여진족을 무찌르고 6진을 개척해 조선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김종서의 활동을 세종은 적극 지원했다. 이후 중앙 정계에 진출해 형조 판서, 예조 판서, 우참찬, 좌찬성 겸 평안도 체찰사를 지냈으며, 문종이 즉위한 후 우의정에 올랐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고명대신으로 국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일찍 세상을 뜬 문종의 유지를 받은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단종을 보필하다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에 희생되었다.

한때 북방의 호랑이로 용맹을 떨치고, 중앙 정계에 진출한 후로는 역사 편찬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으며, 재상이 된 후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신권으로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김종서. 그의 말로는 이처럼 허망했다. 그는 사후에 영조 22년에 복관 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신원이 될 때까지 역적으로 기록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대범한 기개와 나라를 위한 충정으로 이룩했던 김종서의 여러 가지 업적들은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아래의 시는 육진(六鎭)을 개척한 김종서의 시조이다. 무인(武人)답게 호쾌한 기상으로
호기가 豪氣歌라고도 불린다.

“호기가 豪氣歌”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에라

(해석)
몰아치는 북풍은 나뭇가지를 스치고 중천에 뜬 밝은 달은 눈으로 덮인 산과 들에 차가운데,
천리만리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국경) 성루에서 긴 칼을 짚고 서서 북녘을 노려보며,
휘파람 불어치며 큰 소리로 호통을 치니 사나이의 기상에 거칠 것이 없구나

*삭풍(朔風)-북풍 / * 만리변성-멀리 떨어진 변방의 성 (여기서는 함경도 북쪽의 6진)
* 일장검-긴칼 / * 파람-휘파람 / * 없에라-없구나

다른 시조 한 수

장백산(長白山)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셕은 져 션비야,
우리 아니 사나희냐. 엇더타, 능연각(凌練閣) 상(上) 뉘 얼골을 그릴고.

* 능연각 : 당 태종이 24 공신들의 얼굴을 그려 걸어 두게 했던 누각

<현대어 풀이>
백두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썩은 저 선비들아,
우리 아니 사나이냐 어떻다 능연각 위에 뉘 얼굴을 그릴꼬.

<배경 및 해설>
장군이 함길도 관찰사로 있을 때,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을 설치, 두만강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 지었는데, 그때, 그 호탕한 기개를 읊은 작품이다. 초장의 '장백산'과 '두만강'은 좋은 대구를 이루어 우리의 국토를 나타내고 있다. 중장에서는 선비들을 낮추어 표현해 무인들이야말로 나라를 수호하는 사내대장부가 아니냐는 호기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종장에서는 우리 무인들이 큰 업적을 세웠으니 공신(功臣)으로서 이름을 남겨야 하지 않느냐 하는 당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장군의 대망(大望)과 호탕한 면모가 넓게 펼쳐진 산과 강을 배경으로 잘 나타나고 있으며, 실제 공을 세운 사람을 멀리하고 썩은 선비들이 큰소리치는 현실을 고발한 작품이다.




무덤 앞에 서있는 오래된 이 묘비는 영조24년(1748년)공주판관 이익진과 지방유생들에 의하여
세워졌는데 앞면에는 "조선좌의정 절재 김선생종서 지요"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비석을세운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 의하면 이곳에 장군의 묘소가 마련된 것은 이곳이 원래 장군의 선산이었고, 그 당시까지 현지 주민들에 의해 장군의 묘소라는 사실이 전해 내려온 것에 근거하게 되었다는 점을 적어둔 내용이다.




장군의 묘소는 이곳 세종시 장군면 국사봉 아래 대교리에 모셔져 있다.
묘소로 가는 길은 전형적인 시골길이다. 묘소 일대는 세종시가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김종서 장군 묘역을 역사교육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묘역과 그 주변을 역사공원으로 조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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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