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일본의 풍속화

조선과 일본의 풍속화

조선 후기에 들어서 나타나게 되는 풍속화는 어떠한 의미에서 조선 사회가 근대성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과정의 일환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이전의 풍경화등을 추구하였었던 지배계층의 요구에서 벗어나 일반 백성의 모습등을 나타내므로써 문화의 중심이 서민층으로의 이전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18세기 초 사대부 및 서민들의 생활상을 묘사하고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담기 시작하는 풍속화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사회문제와 에로티시즘을 표현하면서 통속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나타나게 됩니다.
19세기 중엽부터 생활의 이모저모를 그리는 장르로 변화되는 조선의 풍속화는 엄격한 신분제도에 동요가 일어나고 서민문화가 융성하기 시작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물론 조선후기의 풍속화에서는 완전한 근대성을 찾아내기는 어렵습니다.

아마도 굳이 그 성격을 분석한다면 중세의 신분사회에서 근대로 가는 이행기적인 성격으로 파악을 해야 할 듯 싶습니다.
하나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 시기 풍속화의 유행은 조선 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유행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비롯 풍속화가 아니더라도 그와 유사한 서민문화가 여러나라에서 발달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윤복)
(김홍도)
(성협)
(김득신)
(김준근)

‘풍속화의 나라’라고 칭함을 받는 일본의 경우 또한 17세기 서민 수요의 우키요에[浮世繪]가 발달을 합니다.
일본 풍속화는 주로 목판화로 제작이 되는데, 이는 대량생산이 가능했다는 것이고, 서민문화의 폭이 조선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풍속화인 우키요에는 18세기 중엽부터 말기에 성행하여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가쓰가와 슌쇼[勝川春章]·도리이 기요나가[鳥井淸長]·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磨]·우타가와 도요하루[歌川豊春] 등 많은 천재화가를 배출시켰습니다.
                   (항상 피터지게 싸우던 일본측 논객이 선물로 보내준 에도시대 그림첩의 한장면입니다)

1856년(아직 막부시절임) 파리만국박람회를 통해 유럽에 일본문화붐이 크게 일어납니다.
이때 소개된 일본의 우키요에는 유럽의 인상파화가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는데, 모네, 드가등이 그들입니다.
특히, 빈센트반 고흐는 완전 우키요에에 빠져, 그의 작품에는 우키요에를 따라한 작품이 많습니다.

                                        (왼쪽이 고흐작품. 오른쪽이 일본의 우타가와히로시게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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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