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함께 피어오른 춘심春心의 색

〈상춘야흥(賞春野興, 봄을 감상하며 야외에서 즐기다)〉 속에 베풀어져 있는 분홍, 옅은 녹색, 그리고 푸른 쪽빛은 우리에게 자연에서 피어난 꽃의 빛깔과 그 시절 그림 속 값비싼 안료가 선물했던 색채의 감각을 전달하고 있다.

계절과 함께 피어오른 춘심春心의 색

색은 빛 속에 존재한다. 어둠이라는 칠흑의 시간 속에 빼앗겼던 세상의 모든 색들은 해가 오르기 전 새어 번지는 빛 속에서 찬란하게 드러난다. 여기 펼친 그림, 〈상춘야흥(賞春野興, 봄을 감상하며 야외에서 즐기다)〉 속에 베풀어져 있는 분홍, 옅은 녹색, 그리고 푸른 쪽빛은 우리에게 자연에서 피어난 꽃의 빛깔과 그 시절 그림 속 값비싼 안료가 선물했던 색채의 감각을 전달하고 있다. 이 그림이 포함된 신윤복의 화첩(畵帖)을 다시 보라. 그림의 주제는 남녀가 만나고 놀이를 하는 다양한 흥미로움이지만, 이러한 주제의 정취(情趣)를 더해주는 것은 화가가 정성스럽게 혹은 재치 있게 베풀어 놓은 색(色)의 감각이다. 화가는 분홍으로 봄날의 나들이를 표현했다. 이 그림 속 분홍 점들은 여지없이 춘정(春情)을 전달하는 매체이다.

무르익은 봄날의 색채를 담은 신윤복 作〈상춘야흥〉 ⓒ간송미술문화재단


마음까지 혼미해지는 봄의 색채, 분홍(粉紅)

사계절이 뚜렷한 동아시아의 오랜 정서 속에서 계절의 변화는 모든 경험과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계절의 변화는 인생 경로에 비유되었다. 사계절 중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 것은 겨울에서 봄으로의 변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토를 녹이면서 생명을 잉태했던 위대한 대지의 거대한 기운이 사람들 마음을 뿌리까지 흔들었기 때문일까. ‘사춘(思春)’이라 하면 남녀의 정을 말했고, 그림의 종류에 ‘춘화(春畵)’란 명칭도 오래 전부터 사용했다.


봄을 대표하는 색은 분홍이었다. 가을의 정원에 피는 맨드라미나 국화의 선명한 색들과 비교한다면, 봄꽃은 그 색조가 여리고 흐린 것이 특징이다. 가을의 서늘하고 맑은 기운이 가을 꽃색과 어울린다면, 봄날의 따스한 기운에 혼미해지는 마음은 봄 산 가득 피어나는 분홍의 색조에 어울린다. 우리의 봄을 분홍으로 물들인 꽃은 진달래였다. 진달래의 분홍에는 철쭉(躑躅)이나 복사꽃(桃花)의 분홍빛과 다른 청초함이 깃들어 있다.



푸른 색조가 살짝 가미된 진달래의 분홍은 전(煎)으로 부치고 차(茶)에 띄워도 좋은 맑고 깨끗한 맛, 그리고 이른 봄의 기운을 담고 있다. 신윤복의 〈상춘야흥〉 속에 베풀어진 분홍 점들이 우리 산에 만발하는 진달래의 분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옛 한시에서는 진달래를 두견화(杜鵑花)라 하였다. 중국에 피는 두견화가 우리 산의 진달래와 같을 수 없다는 문제는 우리 선조들도 지적했지만, 두견새가 울 때 피는 두견화의 유래가 우리 진달래의 정조에도 더해졌다. 봄날이 따스해지면 양반집 석대 위에 심어 놓은 두견화에 분홍 꽃방울이 맺힌다. 봄 잔치를 준비할 때이다.


춘정(春情)의 향연(饗宴)

그림 속 분홍 점 아래 갓끈을 풀고 앉은 이 후원(後苑)의 주인 양반 곁에 다소곳이 앉은 기생의 모습이 유난히 보는 이의 눈길을 끈다. 여인을 그린 화가의 붓질이 사뭇 정성스럽다. 여인을 가만히 보노라니, 눈길을 아래로 하고 고개를 숙인 자태가 흡사 저 유명한 〈미인도〉 속 여인을 떠오르게 한다. 쪽빛 풍성한 치마와 몸에 붙은 회장저고리, 저고리 아래 가슴 품에서 늘어뜨린 다홍색 끈의 유혹도 〈미인도〉 속 여인과 꼭 닮았다.〈미인도〉 속 화제에 화가는 “가슴 속 만 가지 봄을 그려냈노라(盤薄胸中萬化春)”고 적어 넣었다. 얌전하기 그지없는 모습이건만 가슴 속은 춘정(春情)으로 가득하다고 말해주는 내용이다.


봄의 설렘으로 남성을 기다리고 있는 어여쁜 여인은 그림을 감상하는 남성의 촉각을 붙들었다. 이 그림 속 여인은 살포시 무릎을 끌어 앉았다. 이러한 ‘포슬(抱膝)’ 자세는 대개 세상에 초연한 선비들이 자연을 감상하는 모습의 하나였다. 어울리지 않는 얌전한 퍼포먼스가 눈에 거슬렸던가. 그 옆에 앉은 기생의 눈길이 곱지 않다. 화가는 하필 분홍 꽃 아래 이 기생을 배치했다. 기생의 가슴 속 도도한 춘정을 화제 대신 진달래 꽃색으로 표현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기생 위로 피어난 진달래에 분홍 점이 유난히 촘촘하게 찍혀있다.


겨울 내내 간절히 기다렸던 후원의 봄 잔치는 이제 막 벌어졌다. 초대되어 온 악단이 분위기를 돋운다. 그 가운데 금(琴)을 뜯는 연주자의 솜씨가 훌륭하다. 지금 그는 좌중을 이끌고 있다. 대금 연주자의 은은한 화음은 금 연주를 돕고 있는 듯하다. 주인 양반도 그의 벗도 넋을 잃고 금 연주를 바라보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남성 문인들이 오래전부터 우아한 취미로 삼아온 ‘청금(聽琴)’의 시간이다. 술병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여인은 금 연주자를 보려 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계단이나 올랐으면 좋겠다. 그 곡조가 어떠하였길래. 아마도 그것은 그 시절 그들에게 봄의 교향악이고 봄의 왈츠였을 것이다.


화가는 진달래 핀 언덕에 두루 옅은 청록(靑綠)을 베풀었다. 봄 축제의 무대에 따사로운 봄 햇살 조명이 비치면 분홍과 초록은 빛을 발할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분홍 점이 늘어나고 청록이 짙어지고 나비가 날아들면 열매가 맺히고 생명이 잉태된다. 아직은 쪽빛 치마 속에서, 여린 분홍의 성근점 속에서 터지지 않은 춘정. 설레는 마음이 자라나고 봄날이 익어가는 향연의 시간이다. 출처: 고연희(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 교수)




색은 빛 속에 존재한다. 어둠이라는 칠흑의 시간 속에 빼앗겼던 세상의 모든 색들은 해가 오르기 전 새어 번지는 빛 속에서 찬란하게 드러난다. 여기 펼친 그림, 〈상춘야흥(賞春野興, 봄을 감상하며 야외에서 즐기다)〉 속에 베풀어져 있는 분홍, 옅은 녹색, 그리고 푸른 쪽빛은 우리에게 자연에서 피어난 꽃의 빛깔과 그 시절 그림 속 값비싼 안료가 선물했던 색채의 감각을 전달하고 있다. 이 그림이 포함된 신윤복의 화첩(畵帖)을 다시 보라. 그림의 주제는 남녀가 만나고 놀이를 하는 다양한 흥미로움이지만, 이러한 주제의 정취(情趣)를 더해주는 것은 화가가 정성스럽게 혹은 재치 있게 베풀어 놓은 색(色)의 감각이다. 화가는 분홍으로 봄날의 나들이를 표현했다. 이 그림 속 분홍 점들은 여지없이 춘정(春情)을 전달하는 매체이다.


01.무르익은 봄날의 색채를 담은 신윤복 作〈상춘야흥〉 ⓒ간송미술문화재단


마음까지 혼미해지는 봄의 색채, 분홍(粉紅)

사계절이 뚜렷한 동아시아의 오랜 정서 속에서 계절의 변화는 모든 경험과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계절의 변화는 인생 경로에 비유되었다. 사계절 중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 것은 겨울에서 봄으로의 변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토를 녹이면서 생명을 잉태했던 위대한 대지의 거대한 기운이 사람들 마음을 뿌리까지 흔들었기 때문일까. ‘사춘(思春)’이라 하면 남녀의 정을 말했고, 그림의 종류에 ‘춘화(春畵)’란 명칭도 오래 전부터 사용했다.


봄을 대표하는 색은 분홍이었다. 가을의 정원에 피는 맨드라미나 국화의 선명한 색들과 비교한다면, 봄꽃은 그 색조가 여리고 흐린 것이 특징이다. 가을의 서늘하고 맑은 기운이 가을 꽃색과 어울린다면, 봄날의 따스한 기운에 혼미해지는 마음은 봄 산 가득 피어나는 분홍의 색조에 어울린다. 우리의 봄을 분홍으로 물들인 꽃은 진달래였다. 진달래의 분홍에는 철쭉(躑躅)이나 복사꽃(桃花)의 분홍빛과 다른 청초함이 깃들어 있다.



푸른 색조가 살짝 가미된 진달래의 분홍은 전(煎)으로 부치고 차(茶)에 띄워도 좋은 맑고 깨끗한 맛, 그리고 이른 봄의 기운을 담고 있다. 신윤복의 〈상춘야흥〉 속에 베풀어진 분홍 점들이 우리 산에 만발하는 진달래의 분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옛 한시에서는 진달래를 두견화(杜鵑花)라 하였다. 중국에 피는 두견화가 우리 산의 진달래와 같을 수 없다는 문제는 우리 선조들도 지적했지만, 두견새가 울 때 피는 두견화의 유래가 우리 진달래의 정조에도 더해졌다. 봄날이 따스해지면 양반집 석대 위에 심어 놓은 두견화에 분홍 꽃방울이 맺힌다. 봄 잔치를 준비할 때이다.


춘정(春情)의 향연(饗宴)

그림 속 분홍 점 아래 갓끈을 풀고 앉은 이 후원(後苑)의 주인 양반 곁에 다소곳이 앉은 기생의 모습이 유난히 보는 이의 눈길을 끈다. 여인을 그린 화가의 붓질이 사뭇 정성스럽다. 여인을 가만히 보노라니, 눈길을 아래로 하고 고개를 숙인 자태가 흡사 저 유명한 〈미인도〉 속 여인을 떠오르게 한다. 쪽빛 풍성한 치마와 몸에 붙은 회장저고리, 저고리 아래 가슴 품에서 늘어뜨린 다홍색 끈의 유혹도 〈미인도〉 속 여인과 꼭 닮았다.〈미인도〉 속 화제에 화가는 “가슴 속 만 가지 봄을 그려냈노라(盤薄胸中萬化春)”고 적어 넣었다. 얌전하기 그지없는 모습이건만 가슴 속은 춘정(春情)으로 가득하다고 말해주는 내용이다.


봄의 설렘으로 남성을 기다리고 있는 어여쁜 여인은 그림을 감상하는 남성의 촉각을 붙들었다. 이 그림 속 여인은 살포시 무릎을 끌어 앉았다. 이러한 ‘포슬(抱膝)’ 자세는 대개 세상에 초연한 선비들이 자연을 감상하는 모습의 하나였다. 어울리지 않는 얌전한 퍼포먼스가 눈에 거슬렸던가. 그 옆에 앉은 기생의 눈길이 곱지 않다. 화가는 하필 분홍 꽃 아래 이 기생을 배치했다. 기생의 가슴 속 도도한 춘정을 화제 대신 진달래 꽃색으로 표현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기생 위로 피어난 진달래에 분홍 점이 유난히 촘촘하게 찍혀있다.


겨울 내내 간절히 기다렸던 후원의 봄 잔치는 이제 막 벌어졌다. 초대되어 온 악단이 분위기를 돋운다. 그 가운데 금(琴)을 뜯는 연주자의 솜씨가 훌륭하다. 지금 그는 좌중을 이끌고 있다. 대금 연주자의 은은한 화음은 금 연주를 돕고 있는 듯하다. 주인 양반도 그의 벗도 넋을 잃고 금 연주를 바라보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남성 문인들이 오래전부터 우아한 취미로 삼아온 ‘청금(聽琴)’의 시간이다. 술병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여인은 금 연주자를 보려 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계단이나 올랐으면 좋겠다. 그 곡조가 어떠하였길래. 아마도 그것은 그 시절 그들에게 봄의 교향악이고 봄의 왈츠였을 것이다.


화가는 진달래 핀 언덕에 두루 옅은 청록(靑綠)을 베풀었다. 봄 축제의 무대에 따사로운 봄 햇살 조명이 비치면 분홍과 초록은 빛을 발할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분홍 점이 늘어나고 청록이 짙어지고 나비가 날아들면 열매가 맺히고 생명이 잉태된다. 아직은 쪽빛 치마 속에서, 여린 분홍의 성근점 속에서 터지지 않은 춘정. 설레는 마음이 자라나고 봄날이 익어가는 향연의 시간이다. 출처: 고연희(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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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