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언제까지 미워하고 증오만 하고 있을 것 인가

일본을 언제까지 미워하고 증오만 하고 있을 것 인가

 

'한글'을 최초로 학교교육에 도입해 체계적으로 가르치도록 한 것은, 日本의 조선총독부(朝鮮総督府)였다. 당시 조선은, 왕궁이나 관료 등 일부 지식인이 한문(漢文)으로 읽고 쓰기도 했지만, 일반 민중들은 이것이 불가능하여, 방치되고 있었다. 한글은 15세기에 발명되었지만, 문자(文字)를 독점하던 특권계층의 반대에 막혀 제대로 사용되지 못했다. 조선의 한글을 재발견(再発見)하여, 기존 日本의 '漢字-가나(仮名,일본어)혼용문'에 착안해, '漢字-한글 혼용문'을 고안(考案)한 것은 일본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1835~1901)였다.

 

이후, 조선총독부(朝鮮総督府)는 소학교(小学校) 단계에서부터 한글 교육용 교과서를 준비하여, 日本이 한반도에 세운 5천200개의 소학교(小学校)에서 한글을 학습하도록 했다. 日本은 조선인(朝鮮人)으로부터 언어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조선인(朝鮮人)이 자신의 모국어(母国語)를 제대로 읽고 쓸 수 있도록 문자(文字)를 정비(整備)했다.

 

아울러, 합병 당시, 한국인(조선인) 평균 수명은 24세였는데, 日本통치 기간 중에 2배 이상으로 수명이 늘었고, 인구(人口) 절대 수 또한 배증(倍増)했다. 쌀(米) 수확량은 3배(倍)가 되었고, 아사(餓死)가 근절(根絶)되었다. 벌거숭이 산(山)에는 6억(億) 그루의 수목(樹木)이 재배되었고, 100킬로미터였던 철도가 6천 킬로미터로 연장되었다. 수풍(水豊) 댐은 당시 세계 최대급의 수력발전소였다.

 

이러한 한반도 지역 발전에 소요된 자금은, 당시 日本정부(日本국민 세금)가 모두 부담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60조엔(円) 이상의 막대한 자금이 당시 한반도에 투입되었다. 본국(본토)으로부터 이러한 막대한 자금을 끌어다 식민지를 近代化 시킨 케이스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원래 식민지라는 것은 15세기부터 시작되었다. 근현대사라는 것은 인류에 있어서 식민지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세계는 가는 곳 마다 식민지 투성이요, 아프리카 등은 식민지시대가 끝나고도 빈곤으로부터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상태다. 그러면 식민지로부터 근대적인 경제발전을 수행한 곳은 어디인가? 한국과 대만이다. 모두 일본의 식민지였던 곳이다. 그 외에도 홍콩과 싱가폴이 있지만, 여기는 영국의 소위 천령(天領)이었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로서 대표적이지만, 인프라가 정비되어있지 않고, 좀처럼 경제발전이 되지 않았다. 지금 인도는 경제발전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레도 일인당 GDP는 890달러, 문자해독률은 64%에 불과하다.

 

한국과 대만은 일본통치시대에 인프라가 정비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 철도, 수도, 전기 등의 설비는 일본 국내와 큰 차가 없었다. 이것은 다른 외국의 식민지 경영과 아주 다른 점이다. 다른 외국은 식민지로부터는 일방적으로 착취만 할 뿐이었다. 일본은 국내의 세금을 식민지의 인프라 정비에 투입한 것이다. 그래서 주민의 생활수준에도 본토와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일본통치시대 당시 일본 국내에서 행하여지고 있었던 학교교육과 식민지교육은 차이가 없었다. 또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는 조선인의 입학을 인정하고 있었다. 당시의 다른 외국에서는 자국의 육군사관학교에 식민지인의 입학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즉 일본은 교육에 있어서도 차별을 하지 않았다. 당시의 다른 외국은 본국과 식민지를 명확히 차별하고 있었다. 식민지란 착취의 대상으로서 경영하는 것이었고, 차별당하여도 당연했다. 일본은 차별을 하지 않도록 병합한 것이고, 소위 다른 외국의 식민지지배와는 완전히 달랐다.

 

세계적으로 보면 식민지지배를 받은 측에서는 원한과 증오가 있지만, 역으로 종주국에 존경의 마음을 품는 경우도 있다. 인도인이 영국문화에 존경의 마음을 품기도 한다. 대만과 한국에서도 “그 시대는 열쇠를 잠그지도 않고 잠을 잘수 있었다.”고 하는 연배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그런 시대를 모르기 때문에, 증오의 감정만이 앞서 버린다. 이젠 냉철하게 보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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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