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아들고기로 알라

음식을 아들고기로 알라

 

 남방불교에서는 대부분 스님들이 탁발로 하루 한 끼를 들고, 오후에는 끼니를 먹지 않

 습니다. 물론 아침으로 간단하게 미음을 먹는 경우는 있지만, 이러한 식사 형식은 아마

 도 부처님 당시부터 그랬을 것으로 경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참으로 하루에 한번 식사한다. 하루 한번 먹는 것으로 무병하고, 건

 강하고, 상쾌하고, 힘이 있고, 편안함을 느낀다. 그대들도 하루 한번 식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맛지마니까야> ‘밧달리 경’)

 

  그런데 부처님의 이런 당부와는 달리 여러 끼를 먹기도 하고, 식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수행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차제 수행의 세 번째 단계로 식욕을 절제하는 과정을 두셨지요.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면 가장 먼저 계율규범을 지키는 수행을 하고, 다음으로 불선(不善)을 막기 위해 육근(六根)을 단속하는 수행을 하고 나서 식사의 분량과 절도를 알게 하는 수행에 들어갑니다.    

 “비구들이여, 더 할 일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식사에 절도를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는 향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과 매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이 몸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또한 아픔을 치료하고 청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예전의 고통은 끊고 새로운 고통은 만들지 않으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리라’는 생각으로 현명하게 숙고하면서 먹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대들은 배워야 한다.”(<맛지마니까야> ‘앗싸뿌라 설법의 경’)

  그런데 부처님의 이러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식욕과 식탐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식욕이란 것이 생명체의 본능적인 욕구이기도 하고, 더구나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개념이 잘 먹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참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극단적인 처방을 내리시지요.

  

 

중생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꼭 섭취해야만 하는 네 가지 자양분〔四食〕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매일 먹는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로 된 음식으로 이를 단식(段食)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바로 이 음식을 마치 사랑하는 아들을 잡아 말린 고기로 생각하고 먹으라는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다.

  <쌍윳따니까야> ‘아들고기의 경’에 나오는 이 가르침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부부가 아들과 함께 황야를 건너다가 식량이 떨어져서 굶어죽을 지경이 되자 아들을 잡아서 말린 고기로 목숨을 부지하기로 했다면, 이들 부부는 울고불고 가슴을 치면서 그것을 먹을 것이 아닌가? 어떻게 그것을 놀이삼아, 취해서, 진수성찬으로, 보양으로 먹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오로지 황야를 벗어날 때까지만 먹을 것이 아닌가?’ (<쌍윳따니까야> '아들고기의 경')

 

  지금부터 46억 년 전에 지구별이 탄생하여 최초의 생명체인 원핵생물이 등장한 것이 34억 년 전입니다. 그리고 이 원핵생물이 진화하여 동물과 식물로 분화된 것은 20억 년 전, 다시 이들이 진화를 거듭하여 포유류는 2억 년 전, 원숭이는 2천5백만 년 전, 원시인류는 4백 만 년 전에 출현하게 되지요. 이처럼 동물과 식물이 같은 원핵생물의 자손이기 때문에 인간의 유전자의 절반 정도가 식물과 동일하고, 다른 동물 종들과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원핵생물의 유전자를 아직도 우리가 지니고 있다는 것은, 유정(有情)이든 무정(無情)이든 본래 나와 한 몸이었고, 또 나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의 과학적인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아들고기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단순히 식욕을 다스리기 위한 처방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은 나와 몸을 나눈 아들의 살점이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황야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많은 생명들의 희생을 먹이로 삼아야 합니다. 마치 아들의 살점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그러니 우리가 음식을 흥청망청, 배불리, 맛에 취해 먹어서는 아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늘 그들의 희생에 감사하고, 또 그 희생을 섭취하여 유지한 우리의 삶이 값져야만 그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요즈음 텔레비전을 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 채널을 돌리기만 하면 온종일 요리하고 먹는 방송이 일색입니다. 그것도 흥청망청, 푸짐한 진수성찬. 게다가 생동감을 준다고 그 자리서 죽이거나 산채로 조리하는가 하면, 사체를 놓고 별미 부위를 해체하는 끔직한 모습이 여과 없이 방송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잔인하고 야만적인 포식자가 되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온 중생의 행복과 안락을 추구하는 대자비의 불교가 이러한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불자들도 이러한 시류를 함께 즐기는 듯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님들이 육식을 파계라고 여기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나, 웬만한 불교행사에서 차려진 산해진미의 음식을 보면 그렇습니다. 밋밋하면서도 소박하고, 덤덤하면서도 정갈하던 사찰음식이 이제는 화려하고 기름진 성찬이 되어 가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박호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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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