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소개할 이규경은 새로운 문물을 탐구하여 우리나라에 맞는 대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고, 귀로만 들은 지식이 아니라 직접 보고 확인한 지식을 내세워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온 천하에 드러냈다.
19세기 도자기의 청화 안료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
19세기 조선에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에서 다양한 문물이 물 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같은 새로운 흐름 앞에서 사람들은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빗장을 걸어 잠그는 식으로 대응하였다. 여기 소개할 이규경은 새로운 문물을 탐구하여 우리나라에 맞는 대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고, 귀로만 들은 지식이 아니라 직접 보고 확인한 지식을 내세워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온 천하에 드러냈다.


01.) 〈백자청화매조죽문호〉, 15~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02.)〈백자청화송호문호〉, 18~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주발에 그림을 그려 넣는 청색 잿물 재료로는 오직 무명이밖에 없다. 옻장이도 오동기름을 달여 쓰는데 이때도 무명이를 써서 빨리 마르게 한다. 어떤 이는 회청(回靑)을 중국에서 만든 것으로 잘못 알고 있으나 회청이란 것은 서역(西域)에서 나는 대청(大靑)이며, 그 질이 우수한 것을 불두청(佛頭靑)이라 불렀다. 중국에서는 고급 무명이로 만든 유약을 써서 구워낸 빛깔이 대청과 비슷하다. 그러나 대청과 같은 이러한 종류의 안료는 가마에 넣어 고온을 거치면 원래의 남색을 지니지 못한다.” (이규경, 『오주서종박물고변』, 1834년)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은 도자기에 쓰인 푸른색 안료 ‘회회청(서역에서 온 코발트 안료)’과 ‘무명이[중국 장시성(江西省)의 무명자(無名子) 광석에서 얻은 안료로 추정]’의 정체를 파헤친 인물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그는 당시 사람들이 “회회청이라는 이름만 듣고 무명이와 구분하지 못한다”라고 꼬집으며, 귀로 들은 풍문이 아니라 직접 확인한 지식을 강조하였다. 그가 보기에 두 안료는 아무렇게나 뒤섞여 불렸고, 어떤 사람들은 “무명이를 구우면 회회청이 된다”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이규경은 이를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 중국 명·청대의 여러 기술 문헌을 직접 찾아가며 두 안료의 차이를 조사했다.
조선시대 문헌에는 청색 안료가 청화·회청·소마리청·대청·평등청·불두청·석청·토청 등 여러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명칭이 다양한 것은 중국이나 이슬람권에서 다양한 경로로 안료가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회회청과 무명이 모두 중국에서 들어와서 어느 쪽이 진짜 서역산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가격도 극명하게 달라서 중국 연경(燕京, 베이징)에서는 회회청이 금과 비슷한 값에 거래되었으나, 무명이는 동전 몇 푼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두 안료 모두 고온에서 구울 수 있는 천연 코발트였다. 하지만 생산지와 품질, 명칭이 섞여 있는 탓에 조선 사람들은 둘을 잘 구분하지 못했고, 모두 ‘중국에서 들여온 귀한 안료’ 정도로 바라보았다. 조선 전기부터 왕실은 청화 안료의 수입과 청화백자 제작·소비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1) 중국에서도 회회청의 수급은 불안정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자국산 토청을 확보하는 정책이 있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청화 안료의 공급망이 안정되자 조선에서는 청화백자의 소비층이 중인까지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 조선에 들어온 청화 안료는 무명이였을 개연성이 높지만, 일반 사람들은 회회청과 무명이를 모두 중국에서 들어온 사치품으로 인식하였다. 영·정조대인 1785년과 1795년에는 청화백자의 사치를 엄격히 규제했음에도 길상(吉祥)과 벽사(闢邪) 등의 문양을 장식한 청화백자의 수요가 꾸준히 증가했다.2)
03.) <백자청화어문호>,20세기 황해도 해주 일원 Ⓒ국립중앙박물관
04.)<백자청화초화문호>, 19세기말~20세기 양구 칠전리가마터 Ⓒ국립춘천박물관
18세기 이후 유럽에서도 ‘푸른색’은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1704년 뉴턴이 빛 스펙트럼의 색채이론을 발표한 후 유럽 전역에서 색상 표준을 분류하면서 그 중심에 블루(Blue)가 있었다. 1774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이 입은 푸른 연미복은 모방 열풍을 일으키며 낭만주의를 상징하는 색으로 떠올랐다. 이런 상황 속에서 1709년 베를린에서 최초의 합성 안료인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가 등장한 이후 1802년 코발트 블루(Cobalt Blue), 1828년 울트라마린(Ultramarine) 등이 개발되었다.
유럽에서 나타난 새로운 기술은 곧 동아시아로 전파되었고, 조선에서는 유럽산 푸른 안료가 ‘양청(洋靑)’으로 불렸다. 19세기 조선의 청화 안료 시장은 유럽산 ‘양청’, 일본산 ‘왜청(倭靑)’, 중국산 ‘무명이’, 서역산 ‘회회청’이 한꺼번에 유통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다채로운 안료 시대를 맞이했다. 그 가운데 양청은 저렴하면서도 안정적인 색감으로 청화백자의 수요층을 넓히는 결과를 나타냈다. 하지만 1874년 왕실은 양청을 ‘서양 물품과 관련된 색’으로 몹시 부적절하다며 이를 금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실제 시장에서는 양청이 회회청·대청과 함께 쓰였다. 이런 급변한 시대 변화 속에서 관요(官窯, 왕실용 백자가마)는 1884년에 민영화되었고, 지방 가마는 청화백자를 대량생산하면서 소비층이 크게 넓어졌다.3) 4)
19세기 청화 안료를 둘러싼 이야기는 결국 ‘오해와 진실’의 문제라기보다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진실을 찾아가려는 한 개인의 집요한 탐구 정신을 보여준다. 이규경은 당시 그 누구도 문제로 삼지 않았던 안료의 실체를 검증하며, ‘귀로만 들은 지식[耳學]’이 아니라 ‘직접 보고 확인한 지식[目識]’을 강조했다.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많은 정보와 인공지능(AI)이 제공하는 수많은 지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혼란한 시대 우리의 자세를 이규경의 삶에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출처/ 이지희(국가유산청 대구국제공항 문화유산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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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