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은 신안선 발굴이 시작된 지 50년이 되는 해다. 어부의 그물에 걸려 올라온 깨진 청자 그릇에서 출발해 군인과 학자가 함께한 9년에 걸친 대장정,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국가적 성취와 땀방울을 다시 돌아보는 일은 한국 수중발굴 50년의 의미를 새롭게 짚어보는 출발점이 된다.
한국 수중발굴 50년의 출발점 모든 것은 신안선에서 시작됐다
1976년 10월 26일. 수심 25m, 수중시계 제로, 시간당 5km 속도로 흐르는 조류,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을 지닌 신안 앞바다에서 해군 해난구조대(SSU)의 잠수사가 중국 원나라 시대 유물을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이날은 우리나라 문화유산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는 ‘신안 보물선 발굴’의 신호탄이 쏘아진 날이며, ‘한국 수중발굴의 시작점’이 되는 날이다. 2026년은 신안선 발굴이 시작된 지 50년이 되는 해다. 어부의 그물에 걸려 올라온 깨진 청자 그릇에서 출발해 군인과 학자가 함께한 9년에 걸친 대장정,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국가적 성취와 땀방울을 다시 돌아보는 일은 한국 수중발굴 50년의 의미를 새롭게 짚어보는 출발점이 된다.

신안해저 도자기
1975년 8월 어느날 어부 최○근 씨는 그물로 조업을 하다가 6점의 청자를 인양하여 집안 창고에 보관하게 된다. 이것을 당시 무안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동생 최○호 씨가 예사롭지 않다고 여겨 1976년 1월 신안군청에 신고하면서 신안유물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 당시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유물 발견 해역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했으나 수중을 조사할 수 있는 사람도, 장비도 없는 상황이어서 3개월 만에 보호구역을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 수중발굴경험과 시스템이 전무한 상황에서 ‘바닷속 문화유산’을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물 발견 사실을 알리는 언론 보도는 정부 당국의 정식 발굴이 아니라 도굴꾼을 사방에서 불러 모으는 기폭제가 되고 만다. 유물 발견이 알려진 1월부터 정식 발굴이 이루어지는 10월 사이에 수많은 도굴범이 유물을 건져내면서 우리 역사상 초유이자 최대 규모의 문화유산 도굴이 벌어지게 된다.
신안 앞바다의 송·원대 자기의 도굴 사건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76년 10월 13일이다. 정○순 등 도굴꾼 8명이 1976년 9월 1일부터 22일 사이에 청자 화병 등 122점을 인양했으나 신고하지 않고 밀매하던 중 목포경찰서에 3명이 검거되고 5명에게 수배령이 내려졌다. 자금책 역할을 했던 조○호 등이 1월의 보도를 보고, 8월 말 잠수부들을 고용해 도굴한 유물 중 일부를 매매하려다가 덜미를 잡힌 것이다. 압수된 유물은 10월 19일 서울의문화재관리국으로 보내져 감정이 이루어졌고, 곧이어 해군 해난구조대(SSU)가 포함된 조사단이 꾸려져 10월 26일부터 1차 발굴조사에 착수하게 된다.
도굴품으로 압수된 유물
그간 단 한 번의 수중발굴 경험도 없었고, 수도 적은 고고학자 중에서 다이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당시 전무했다. 게다가 신안 앞바다의 환경은 강한 조류, 깊은 수심, 극악한 수중시계 등으로 최악의 조건이었다. 이에 거의 유례가 없던 ‘군인+학자’로 구성된 발굴단이 출범한다. 바로 1950년 9월 ‘해상공작대’라는 이름으로 창설되고 1955년 해난구조대로 명칭을 변경하여 지금에 이른 조직으로 약 400명의 지원자로 이루어진 특수부대, 대한민국해군 해난구조대(SSU)다. 신안선 발굴은 그야말로 ‘군인정신’으로 뭉친 이들 특수부대원 200명을 통해 9년간 진행되어 총인원 9,896명이 동원됐다. 이들이 신안 앞바다의 컴컴한 물속에서 작업한 시간은 모두 3,474시간이었다.
1984년까지 9년간 이루어진 신안선 발굴은 50년간의 한국 수중발굴사 최초로 최장기간 이루어져 최고의 성과를 남긴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송·원대의 2만 점이 넘는 다양한 고급자기와 28톤·800만 개·70종에 달하는 동전, 729점의 금속제 유물, 1,017개의 자단목, 각종 향료 등 식물류와 화물에 달았던 364점의 목간, 무엇보다도 본래 구조를 잘 간직하고 있는 선체는 도자사를 포함한 미술사와 해양교류사, 선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제공되고 있다.
국가적 역량이 동원되었던 신안선 발굴이 시작된 지 50년이 지났다. 최고의 다이버라 할 수 있는 해군 특수부대 대원이 동원되었고, 문화재관리국과 중앙박물관의 능력 있는 조사원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래서인지 신안선 발굴 과정을 되짚어 보면 당시 적용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과 방법이 총동원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처럼 길고 험난했던 발굴 과정에서 인명사고가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며, 그 전통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바로 옆도 보이지 않는 해저에 잠수하게 되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그 긴장과 책임감이야말로 한국 수중발굴의 또 다른 유산이라 할 수 있다.
02.신안선 발굴단(1978년 3차 발굴 당시). 좌측 상의를 입고 서 있는 사람이 당시 발굴단장이었던 윤무병(타계) 박사. 앞줄 중앙 좌측이 이호관 발굴부장, 우측이 정양모 발굴위원. 다른 이들은 모두 젊은 해난구조대원.
03.1983년 신안선 용골(용골은 선체의 척추 역할을 하는 부재로,인양의 마지막 무렵에 이루어졌다.)
-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한 SSU 대원의 회상(2016년)
“지시가 있다면, 우리는 군인이기 때문에 무조건 해야 하는 겁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저희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혼나기도 하고 질책도 많이 받았어요.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그렇게 한 걸로 생각이 드는데, 당시에는 그 선배들에게 원망도 있었어요. 하지만 세월이 40년이나 지나다 보니 다시 또 보고 싶고, 우리가 40년 만에 그런 유물을 박물관에서 보니까 참 옛날생각이 새록새록 나더군요. 그 당시 유물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 철닻이라고 하지요? 그것을 제가 인양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40년 전 기억이 더욱 뚜렷이 나고, 가슴이 굉장히 두근거렸으며, 앞으로 그런 일이 있다면 과연 다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실제로 하진 못하겠지만 앞으로 후배들이 잘할 것이라고 응원하고, 굉장히 고맙게 생각합니다. 우리 부대가 40년 전에 그것을 전부 인양했습니다. 그것은 해군 해난구조대심해 잠수사의 자랑이며 대한민국의 자랑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출처 / 신종국(국립해양유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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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