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의 공간, 최초의 국립현충원 장충단(奬忠壇)

장충(奬忠)이란 ‘충을 장려한다는 단’의 의미다. 현재 장충단공원은 원래 장충단 영역의 일부일 뿐, 처음에는 지금의 신라호텔 일대 전체가 장충단이었다.

영욕의 공간, 최초의 국립현충원 장충단(奬忠壇)

서울 남산 동북쪽 기슭에 위치한 장충단은 군인들을 기리기 위한 제단으로 오늘날의 현충원과 같은 곳이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가 살해된 지 5년 뒤인 1900년 9월, 고종은 도성을 지키던 어영청의 분영인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장충단을 건립하여 사전(祠殿)과 부속건물을 건립, 을미사변 때 순사한 장졸들의 영혼을 배향하여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장충(奬忠)이란 ‘충을 장려한다는 단’의 의미다. 현재 장충단공원은 원래 장충단 영역의 일부일 뿐, 처음에는 지금의 신라호텔 일대 전체가 장충단이었다.



장충단에서는 건립 이후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는데 1909년 10월까지 총 19번의 제사를 지냈다. 현재는 장충단구조에 대한 온전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건립과정을 기록한 장충단 영건하기책과 일제강점기때의 자료를 통해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기록에 따르면 제사를 지내는 단사와 여러 부속건물이 만들어졌으며, 장충단비도 비각에 둘러싸여 있었다. 현재는 장충단비만 공원 내에 남아있다. 옛 장충단의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 있던 자리는 현재 게이트볼장이 되었다. 원래 장충단비와 사당이 있었던 곳은 현재 신라호텔 위치로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워졌다.

처음에는 을미사변 때 전사한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 갑오년에 순직한 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 이경호(李璟鎬)를 주신으로 제향하고 대관(隊官) 김홍제(金鴻濟), 이학승(李學承),이종구(李鍾九) 등 장병들을 배향하여 제사 지냈다. 그러나 ‘창선(彰善), 표충(表忠)의 일이 어찌 군인에게만 한할 것이랴.’는 육군법원장(陸軍法院長) 백성기(白性基)의 제청에 의해 다음 해부터, 을미사변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을 비롯해 임오군란·갑신정변 당시에 순의(殉義), 사절(死節)한 문신들도 추가되어 문무의 많은 열사들이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에 포함되었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군악을 연주하고 군인들이 조총(弔銃)을 쏘았다.

그러나 갑신정변과 을미사변으로 숨진 군인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이었던 장충단은 1909년 이토히로부미가 죽었을 때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장충단에서 열렸으며. 1910년 8월 일제의 만행에 의해 장충단은 결국 폐사되었고 일제는 이곳에 벚나무를 심는 등 일본식 공원으로 조성하여 1919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이름하여 조선의 주권 박탈 후 조선에서 지내는 일본인들을 위해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하였다.

장충단공원 한편에는 상하이 사변 때 사망한 일본군 육탄 3용사의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1932년 현재 신라호텔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를 만들었고, 경희궁의 정문을 뽑아다 출입문으로 만들었다. 훗날 일제는 박문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차남인 안중생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잘못을 사과하도록 강요하기도 하였다.

장충단공원 박물관에 전시된 장충단공원의 지도상에 일제가 당시 제작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찰인 박문사가 있던 자리가 표시되어있다. 일제는 박문사가 있는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명명했는데, 춘무는 이토의 호다. 현재는 이 자리에 신라호텔 영빈관이 자리해있다. 해방 후 박문사는 철거되었다.


                                              ▲1932년 일제가 장충단을 없애고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고자 세운 사찰 박문사(博文寺)

                                                 경희궁의 홍화문을 옮겨다 만든 경춘문,

                                        해방  후 경희궁 복원 전까지 신라호텔이 그대로 사용했다  (사진 고구리)


                         ▲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시던 경복궁의 선원전을 뜯어와 지은 쿠리 (주지 방, 창고)   (사진 고구리)


일제의 만행은 박문사를 지으려고 경복궁 선원전을 옮겨 승려들 거처로 사용했고, 경희문 정문인 흥화문을 통째로 떼와 박문사 앞문인 경춘문으로 둔갑시켰다.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이 열렸던 환구단의 석고전은 박문사의 종각 신세가 됐다./서울역사박물관

흥화문(興化門)은 경희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재위 1608~1623)이 처음 세웠으며, 경희궁은 왕이 유사시에 본궁을 떠나 거처하는 이궁(임금이 머물던 별도의 궁전)이었기 때문에 다른 궁궐 정문처럼 2층으로 짓지 않고 1층으로 만들었다. 원래 자리는 지금의 신문로 구세군회관 근처였다. 흥화문은 일제가 경희궁을 없애는 과정에서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장충단공원 옆 박문사로 다시 옮겨져 절 정문으로 사용되는 아픈 역사를 겪었다. 광복 후 박문사는 철거됐지만, 흥화문은 이후에도 그 자리에 남아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 일대의 복원 작업이 진행되면서 흥화문도 현재 자리인 경희궁 앞으로 옮겨졌다.

1937년쯤 이곳에서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사건 하나가 있는데, 훗날 국회의원을 지낸 종로 주먹패 김두한(1918~1972)이 혼마치(지금의 충무로)의 일본 야쿠자와 패싸움을 벌여 이겼다는 이른바 장충단공원 혈투다. 어디까지가 사실이었는지 실체가 불분명하고 대체로 항일 투쟁이라기보다는 조폭 사이의 영역 다툼 정도였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이후 이 이야기가 윤색돼 민족적 울분을 달래준 것은 사실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7년 박문사 자리에 국가의 내외빈을 모시는 영빈관을 짓는다. 뒤에 이 영빈관 일대는 모두 신라호텔이 되면서 국가 귀빈을 모시던 영빈관은 신라호텔의 부속건물인 신라호텔 영빈관으로 바뀐다. 후에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정치 유세 현장으로도 많이 쓰였다.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약 100만 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당시 김대중 후보와 박정희 후보가 벌였던 유세 대결이 유명하기도 하다.

현재 장충단공원 인근에는 이와 같은 일제의 흔적을 지우고 본래의 장충의 의미를 회복하는 동상과 기념비들이 세워졌다.


                                                                                            이한응 선생 비


장충단공원 내 이한응 선생의 기념비가 있다. 이한응 선생은 구한말의 외교가로 영국 런던에서 서리공사(임시공사)로 활동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1905년 5월 조국의 멸망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열사들 중에서 가장 먼저 목숨을 던진 의인이라는 설명이 비석에 나와 있다.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 열사의 동상은 오른손을 주머니에 깊게 찔러넣고 왼손에는 두루마기 문서를 하나 든 채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서 있다. 열사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정면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빌던 박문사가 있던 자리다.


                                                  ▲1964년 세운 이준 열사 동상의 제막식 /서울역사박물관
  
공원을 지나 국립극장 쪽으로 걷다보면 유관순 열사의 동상과 3.1독립운동기념탑 등을 마주하게 된다.3.1독립운동기념탑은 유관순 열사의 동상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모습을 나타낸다. 이 탑은 3.1독립운동 80주년 기념일인 1999년 3월 1일 준공했으며 탑의 높이가 19m 19cm이다. 이는 3.1운동의 거사일인 1919년을 의미한다.


                                              유관순 열사 동상과 삼일 독립운동 기념탑               

장충단공원 내에 있는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는 3·1운동 이후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평화회의에 전국의 유림들이 일제의 주권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여 세계에 알렸던 일을 기념하여 만든 조형물이다.


                                                                                             파리장서비



이밖에도 조선어학회 창립과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참여한 최현솔 선생의 기념비, 독립운동가 김용환 선생, 사명대사의 동상 등도 만나볼 수 있다.


                                                                                   외솔 최   선생 기념비

서울시 유형문화재 1호인 장충단비는 광복 후 신라호텔 인근에서 발견되어 1969년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 서쪽에 옮겨 세웠다. 碑의 정면에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장충단(奬忠壇)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민영환이 지은 143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장충단 비


                                                                                                     수표교


                                                                         장충단 기념관인 기억의 공간


장충단공원 초입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18호인 수표교가 있다. 세종대왕 때 만들어져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던 수표교는 원래 청계 2가에 있었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 때 철거되어 홍제동으로 잠시 이전되었다가 1965년 장충단공원에 옮겨졌다.

장충단공원 내 박물관인 장충단의 박물관인 기억의 공간에서 해설사로 일하는 강현섭씨는 서울 시내에서 장충단만큼 역사적으로 복잡하고 영욕의 세월을 견딘 공간도 드물 것이라며 일제시대를 되돌아보는 남산 기억로 탐방이나 장충단 도보 탐방인 호국의 길 등 다양한 탐방 코스가 마련되어 있으니 시민들이 와서 한 번씩 둘러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미지 네이버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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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