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천상의 소리,성덕대왕신종

위엄 있는 신라의 종성, 성덕대왕신종에는 여러 예술 미학이 어우러져 있다.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천상의 소리,성덕대왕신종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천상의 소리,성덕대왕신종 타종행사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상징이자 가슴 벅찬 울림의 소리다. 웅장하고 청아하면서도 섬세한 소리를 내며 새해가 왔음을 알리는 종소리에는 우리 전통의 소리가 녹아 있다. 제야의 종, 타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성덕대왕신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위엄 있는 신라의 종성, 성덕대왕신종에는 여러 예술 미학이 어우러져 있다.


성덕대왕신종 각부 양식이 화려하게 장식된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 ⓒ국립경주박물관



안녕과 평안을 기원한 타종 행사

제야의 종, 타종은 매년 섣달그믐(除夕)께 각 사찰에서 중생들의 번뇌를 없애기 위해 108번의 타종을 하던 불교식 행사에서 유래한다. “지옥의 중생도 사찰의 종소리를 들으면 모두 깨어나 극락으로 간다”는 말이 있을 만큼, 예로부터 불가에서 종소리는 세인의 혼탁한 영혼을 맑게 깨쳐주는 소리이자 부처의 진리에 비유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에 관계없이 많은 한국인들이 연말이 되면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제야의 종소리를 기대한다.

1년 동안 묵혀둔 감정의 찌꺼기들을 해소하고 새 기운이 들어오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까. 나 또한 1월 1일 0시가 되면 시작되는 서른세 번의 타종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런데 왜 하필 서른세 번일까? 이는 조선시대 보신각이 매일 오경(새벽 4시) 사대문이 열릴 때 서른세 번 종을 울린 것에서 유래되었다. 여기에는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이 이끄는 하늘의 삼십삼천에게 나라의 안녕과 국민의 건강, 평안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요즘은 매해 1월 1일이 시작되면 서울의 보신각뿐 아니라 수원 화성행궁 광장의 여민각,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임진각, 전주 풍남문에서도 타종을 한다. 하지만 정작 가장 듣고 싶은 종소리는 현재 타종이 중단되어 실제로 들을 수가 없다. 바로 ‘에밀레종’이라고 불리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이다. 사실 어릴 적 수학여행에서 본 성덕대왕신종은 대개 신비로움보다는 무서움에 가까웠을 것이다. 종과 관련된 무시무시한 전설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다. 종을 완성하기 위해 거리를 나선 스님이 한 아이를 재물 대신 보시로 받아 아이를 도가니에 넣자 비로소 종이 완성되었다는 전설 말이다.

이후 종을 칠 때마다 아이의 원혼이 ‘에밀레~ 에밀레~’하고 울며 엄마를 원망했다는 이야기는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으로 더 익숙한 성덕대왕신종을 강렬하게 각인시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경주를 방문했을 때 본 성덕대왕신종의 느낌은 달랐다. 그날의 햇살 때문이었을까. 무려 12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고종(古鍾)임에도 불구하고 성덕대왕신종은 자연광을 조명삼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18.9톤의 거대함이 주는 위압감을 떨치고 펼쳐진 아름다움은 순간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을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으로 만들어주었다.


용뉴와 음통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龍紐)와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 ⓒ문화재청




유장한 입체감이 만들어내는 우아한 성음

성덕대왕신종 위아래 새겨진 양각의 화려한 꽃문양은 종소리의 잔여음을 부드럽게 받쳐주고 있는 듯 보이고, 겹겹이 쌓여있는 연꽃으로 이루어진 당좌, 천의를 걸치고 공양하는 모습을 한 채 남실거리는 꽃구름을 타고 날아오를 것 같은 형상을 한 비천은 형언할 수 없는 신비감을 발현한다. 하대(종의 입구 부분)는 깔끔하게 재단된 대부분의 신라 종과 달리 중국 종에서 주로 나타나는 8개의 굴곡이 보이는데, 그 곡선미가 독창적이고 세련되어 우아한 성음을 만들어내는 야무진 입과도 같다.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종신(鍾身)은 예전에 들었던 타종 소리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성덕대왕신종이 만들어내는 웅장한 타격음, 끊어질 듯 이어지는 장엄한 소리는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천상의 소리 같다. 그 위엄 있는 종성은 자연스레 신라 때 창작되어 궁중에 연주되던 [수제천]이라는 곡을 떠올리게 한다. [수제천]의 음악적 뼈대가 굳건하고 옹골차다. 그 뼈대 사이를 연음기법의 장식음들이 우아하게 채워 이어간다. 가락을 맞추어 연주하기보다는 각각의 소리가 겹치듯 더해져 음악을 풍성하게 채워가는 식이다.

서로가 유려한 소리를 내지만 어느 악기 하나 결코 홀로 소리를 뽐내지 않는다. 다른 악기의 음률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전체가 한 호흡으로 조화를 이룬다.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도 그렇다. 하나의 타격음이 주거니 받거니 끊어질 듯 이어지며 유장한 입체감을 보여주어 듣는 이에게 신비로운 감동을 준다.

이처럼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소리를 ‘맥놀이 현상’이라고 한다. 이는 종을 칠 때 나는 소리의 주파수 중 매우 작은 두 개의 파동이 서로 간섭하여 소리의 강약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이다1). 이 맥놀이 현상의 근본 원인은 대칭형 구조 속에 숨어 있는 미세한 비대칭성에 있다. 한국의 종은 이러한 특성을 받아들이며 자연스러움 속에 조화를 추구한다.

반면 서양의 종은 잡음 없는 완벽한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종을 주조한 후에도 종신을 갈아내 비대칭성을 제거하는 등 수많은 교정과정을 거친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종은 서양의 종과는 다른 매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서양의 종이 마치 플루트처럼 맑고 섬세한, 티 없이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데 집중한다면 한국의 종은 대금처럼 정제하지 않은 자연이 머금은 그 소리를 온전히 담는 데 집중한다. 우리가 한국의 종소리를 들을 때 공간을 감싸 안는 듯한 푸근함이나 갈대청에 부딪혀 울리는 듯 청량한 상청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새해를 맞은 지금, 어쩌면 한국 종 특유의 미감(美感)으로부터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자세를 배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종은 비대칭과 불균형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을 닮은 더 좋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기회로 삼는다. 우리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재난상황을 의연히 받아들이되, 지나간 과거보다는 더 희망찬 미래가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온라인 중계를 통해서라도 타종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새해를 맞이하는 건 어떨까.   글. 이주항(『국악은 젊다』 저자, 이화여자대학교 D.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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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