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택트 시대의 소통 역사적 인물들의 편지

교통이나 통신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편지는 상대와 의사소통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언택트 시대의 소통 역사적 인물들의 편지



교통이나 통신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편지는 상대와 의사소통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직접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거리와 시간의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편지는 인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현재에는 이메일이나 SNS 등이 편지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지만, 불과 20~30년 전 현대사회에서도 편지는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었다.

조선시대 학자들의 개인 문집의 구성에서 시와 더불어 빠지지 않는 것이 ‘서(書)’라는 항목으로 나오는 편지다. ‘與○○書’나 ‘答○○書’ 등의 편지에는 개인 안부, 학문적 토론, 정치적 입장 등 다양한 내용들이 기록이 되어 있다.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 퇴계 이황의 경우 현존하는 편지만 약 3,000여통이 넘으며, 오희문은 임진왜란 시기 피난 중에도 부지런히 편지를 썼다. 정약용이 강진 유배지에서 가족에게 보낸 애틋한 사연을 담은 편지들도 남아 있다.

당대의 지성이 주고 받은 편지

1501년 같은 해에 태어난 퇴계 이황(李滉:1501~1570)과 남명조식(曺植:1501~1572)은 당시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으로 지칭될 만큼 그 명성이 높았다. 두 사람은 직접 만나는 대신에 편지를 자주 주고 받았다. 이들 편지에는 두 사람의 학문관과 출처관이 잘 드러나 있다. 1553년 두 사람이 나눈 편지를 보자. 조식은 “공은 서각(犀角)을 불태우는 듯한 명철함이 있지만, 저는 동이를 이고 있는 듯한 탄식이 있습니다. … 게다가 눈병까지 있어 앞이 흐릿하여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지가 여러 해 되었습니다. 밝은 눈을 가진 공께서 발운산(撥雲散)으로 눈을 밝게 열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여, 이황에게 발운산으로 눈을 밝게 열어 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런데 발운산에는 정치 현실의 잘못을 걷어 달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이에 이황은 “발운산을 찾아달라고 하신 말씀은 감히 힘쓰고자 하지 않으리요만은 다만 스스로 당귀(當歸)를 찾되, 능히 얻지 못하니 어찌 공을 위하여 발운산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 하여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처지임을 답신으로 보내고 있다.

1564년 9월 18일 조식은 발신인에 ‘갑말(甲末:동갑내기 못난 사람) 건중(楗仲:조식의 자)’이라 하며 다시 이황에게 편지를 썼다. “평생 마음으로만 사귀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 머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결국 정신적 사귐으로만 끝나고 마는 것인가요?”라며 아쉬움을 표한 후에,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피력했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뿌리고 빗자루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은 천리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 상처를 입게 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아마도 선생같은 어른께서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일 것 입니다.”라고 하여 이황의 학문 경향과 학자로서의 위치에 대해 쓴 소리를 하였다. 학문에 있어서 실천을 중시한 학자 조식은 성리학의 이론 탐구에 주력하는 이황의 학문 경향을 편지를 통해 비판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학자들이 서로 만나지 않아도 편지를 통해 자신의 학문관과 출처관을 밝힌 사례가 잘 확인되고 있다.


01.퇴계 이황 선생의 문장을 모은 『퇴계집』ⓒ국립민속박물관

02.남명 조식 선생의 문집인『학기유편』ⓒ국립민속박물관




피난 중에도 쓴 일기 속 편지

조선중기의 학자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이 쓴 일기인『쇄미록(瑣尾錄)』에도 편지와 관련한 기록이 자주 보인다.『쇄미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 11월 27일부터 시작하여 1601년 2월까지 9년 3개월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제목을 ‘쇄미록’이라 한 것은 『시경』의 ‘쇄혜미혜(瑣兮尾兮:누구보다 초라함이여) 유리지자(遊離之子:여기저기 떠도는 사람들)’에서 인용한 것으로, ‘유리기(遊離記)’ 또는 ‘피난의 기록’ 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1595년 1월 1일 일기에는 “저녁에 함열 사람이 한양에 가는 길에 이곳에 들러 묵었다. 딸의 편지와 날전복 24개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새해를 맞아 딸이 현대의 택배 방식으로 선물까지 보낸 것이다. 1월 17일 일에는 “저녁에 안악(황해도)에 사는 계집종 복시가 … 올 때 해주(황해도)에 있는 윤함에게서 편지를 받아 가지고 왔다. (중략) 내일 사내종 막정을 양덕(평안남도)으로 보내면서 지나는 길에 마전(연천)에 들러 내 편지와 어머니의 편지를 전해서 … ”라고 기록되어 있다. 편지는 다른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2월 30일의 “누이가 어머니와 내게 편지를 보냈는데, 온 집안이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다. 밤에 등불을 밝히고 윤함과 양덕에게 전할 편지를 썼다.

또 예산 김한림의 집에 들러 임진사 보낸 의복을 전해준 뒤에 올라간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김자정(金子定:김지남)에게 보낼 편지로 썼다.”는 기록에서는 호롱불 아래에서 가족과 지인을 챙기는 편지를 쓰고, 이를 통해 교유 관계를 유지해가는 오희문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4월 5일에는 “허찬이 하루를 머물고 한양으로 출발한다고 하기에 편지를 써서 생원(오윤해)과 시직(오윤겸)에게 전하게 했다. 예산 김한림의 사내종도 돌아가려고 하기에 편지를 써서 보냈다. 안악의 사내종 중이는 내일 장에 가서 양식을 사서 모레 돌아간다고 하니, 편지를 써서 윤함에게도 보내려 한다.”는 기록에서는 인편만 있으면 편지를 써서 보내려는 오희문의 열정을 확인할 수 가 있다.

9월 19일 일기에는 “자방(신응구)이 어제 편지를 보내, 이별좌와 강에서 모이기로 약속했다며 나에게 이별좌의 집으로 일찍 와서 그와 함께 배를 타고 내려 오라고 했다.”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편지가 초청장의 역할을 하면서 사회관계망 형성에 주요 수단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사례다. 이처럼 편지는 조선시대 사람들 간의 네트워크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편지지로 쓰기 위한 종이를 구하는 모습도 일기에서 살펴볼 수 있다. 1595년 2월 30일 일기에는 “집에 종이가 한 조각도 없어서 시직(오윤겸)을 시켜 홍주서(홍준)에게 구해 오게 했다. 5장을 얻어다가 세 곳에 편지를 썼다.”라는 기록이 발견된다.


03.조선시대 학자 오희문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의 상황을 담아 쓴 일기인 『쇄미록』에 담긴 편지 ⓒ문화재청

04.정약용이 유배 중 자식들에게 보낸 당부의 편지인 하피첩 ⓒ국립민속박물관



유배지에서 쓴 편지

1801년 정약용은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유배의 길에 올랐다.처음 경상도 장기로 갔다가, 마지막 유배지가 된 곳은 전라도 강진이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도 편지를 통해 외부와 소통하였다. 특히 하피첩을 이용하여 쓴 편지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피첩에 제(題)함」이란 글에서는,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을 적에 병이 든 아내가 헌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는데, 그것은 시집올 적에 가져온 훈염(纁袡 시집갈 때 입는 활옷)으로서 붉은빛이 담황색으로 바래서 서첩으로 쓰기에 알맞았다. 이리하여 이를 재단하고, 조그만 첩을 만들어 손이 가는 대로 훈계하는 말을 써서 두 아이에게 전해 준다.

다음 날에 이 글을 보고 감회를 일으켜 두 어버이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그리는 감정이 뭉클하게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하피첩’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곧 ‘다홍치마’의 전용된 말이다.”고 적어 하피첩을 만든 사연을 기록하고 있다. 유배 시절인 1810년의 어느 날, 풍산 홍씨 아내는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폭을 인편으로 보내왔다. 정약용이 15세 때 혼인을 했으니, 35년의 세월이 흘렀다. 치마는 이제 다섯 폭의 천이 되었고, 다홍색의 짙은 색깔도 빛이 바랜 황색으로 변했다.

정약용은 옛적 곱고 풋풋했던 아내를 떠올리며 치마폭에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훗날 부모를 기억하라는 뜻을 상징물과 함께 보낸 것이다. 3년이 지난 1813년 다시 이 치마폭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시집 가는 외동딸을 위해 매화나무에 멧새 두 마리를 그려 넣고 시 한 수를 보탰다. 이 매조도(梅鳥圖)에는 사뿐사뿐 새가 날아와/우리 뜨락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서 쉬네/…이제부터 여기에 머물러 지내며/네 집안을 즐겁게 해주어라./꽃도 이제 활짝 피었으니/열매도 주렁주렁 맺으리라는 시를 써서 딸이 시집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라는 당부를 담았다.

정약용은 유배지인 장기와 강진에서 자식들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다. 자식에 대한 정약용의 각별한 사랑에는 뼈아픈 경험이 자리했다. 정약용은 홍 씨와의 사이에서 6남 3녀를 낳았지만, 2남 1녀만 살아 남고 4남 2녀는 만 세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조선시대에도 전염병으로 큰 곤욕을 치렀다. 정약용의 딸 효순도 마마로 희생되었다. “내 어린 딸은 임자년(1792년) 2월 27일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 순하게 나와 제 엄마에게 효도하였으므로 처음에는 ‘효순’이라고 불렀다. (중략) 태어난 지 24개월 만에 마마를 앓았다. 제대로 곪지를 않고 까만 점이 되며 설사를 하더니 하루 만에 숨을 거두었다.모습이 단정하고 예뻤는데 병이 들자 까맣게 되어 타서 숯처럼 되었다. (중략) 이제 또 너를 여기에 묻는구나. 오빠의 무덤 곁에 둔 것은 서로 의지해 지냈으면 해서이다.”이라 하여 딸을 잃은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1801년 9월 3일 첫 유배지인 장기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날짜를 헤아려 보니 82일 만에 너의 편지를 받았구나. 그동안 턱 밑에 준치 가시고기 같은 흰 수염이 7, 8개가 생겼다. 네 어머니가 병이 날 줄은 짐작하고 있었다. 큰 며느리도 학질을 앓은 뒤라 모습이 더욱 초췌하겠구나. 생각하면 견디기 어렵다. 더욱이 신지도에 계신 둘째 형님(정약전)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중략) 내가 밤낮으로 축원하는 것은 오로지 문아(둘째 아들 학유)가 독서하는 것 뿐이다. 문아가 선비의 마음 자세를 갖춘다면 내가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느냐. 아침 저녁으로 부지런히 책을 읽어서 아비의 간절한 마음을 저버리지 말아라. 팔이 시큰거려 이만 줄인다.”고 하여, 아들이 학문과 독서에 정진할 것을 거듭 당부하였다.

1802년에는 막내아들을 잃는 슬픔도 겪었다. ‘우리 농이’라는 글에서 “농(農)이는 내가 곡산에 있을 때 잉태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은데도 나는 살아있고,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나은데도 너는 죽었다. (중략) 네 모습은 깎아 놓은 듯 빼어났다. 코 왼쪽에 조그만 검은 점이 있고, 웃을 때면 양쪽 송곳니가 드러나곤 하였다. 아아 네 얼굴이 생각이 나서 사실대로 말한다.” 하여 정약용은 막내를 잃은 안타까움을 편지에서 절절하게 표현하였다.

16세기 최고의 지성 이황과 조식이 주고받은 편지, 임진왜란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편지가 소통의 중요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쇄미록』의 기록, 그리고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쓴 편지 등에서 전통시대 편지가 주는 기능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접촉이 일상화된 지금의 시기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편지를 써 볼 것을 권한다. 그동안 잊히거나 소원했던 관계들이 회복되는 계기도 마련되지 않을까? 글.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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