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속에 담긴 역사

황성옛터

  황성옛터  노래속에 담긴 역사



왕평(王平) 작사, 전수린(全壽麟) 작곡, 이애리수(李愛利秀) 노래, 발표 : 1928년

한국 최초의 남성무용가 조택원(趙澤元)의 추천으로 동방예술단(東方藝術團)이라는 순회 극단의 효과 음악과 막간 반주 음악 연주자로 입단한 전수린이 어느 날 그의 고향인 개성에 들렀다 작곡된 것으로, 폐허가 된 만월대를 찾아 받은 쓸쓸한 감회를 그린 노래이다.
황성이 대한제국이나 고려의 皇城이 아닌 폐허가 된 荒城을 뜻한다.

이 노래는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가 불러 크게 히트하여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부르자 일제는 금지곡으로 지정하였으나 민간에서 계속 불려 졌으며 조선의 세레나데라고 할 만큼 일본인들도 많이 불렀다.

이애리수는 귀여운 외모, 명랑한 목소리, 섬세한 연기로 인기를 누리던 연극 배우였다. 이애리수는 예명으로서 영어명인 앨리스를 한자로 번역한 것이다. 조선인 청중들은 고려의 망국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황성옛터>의 가사에 감동을 받고 열띤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이애리수는 3절을 부르는 대목에서 감정이 북받쳐 올라 노래를 중단하곤 했다. 그때마다 청중들은 재청을 외쳤으나, 이애리수는 또 다시 3절이 되자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노래를 중단한다. 사람들은 이 같은 소문을 듣자 연극보다는 <황성옛터>를 듣고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빅타레코드사는 <황성옛터>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1932년 이애리수에게 이 곡을 취입 시킨다. <황성옛터>가 수록된 음반은 순식간에 5만장이 판매되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 인구 비례로 볼 때 5만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라고 한다. 그 당시 5만장은 지금의 500만장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유성기 음반 <황성옛터>는 <사의 찬미>, <목포의 눈물>과 더불어 일제시기 3대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성기 음반은 1960년대까지 제작되다가 LP음반에 자리를 넘겨주는데, 감상용보다는 소장품으로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몇 년 전 경매에서 <사의 찬미> 초반은 5,600만원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의 달 밝은 밤, 역사의 무상함을 느껴 즉흥적으로 만든 가락이다. 느린 3박자의 리듬에 단음계로 만들어진 가요곡이다. 이 애수적인 멜로디가 전수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못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발길 닿는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설움을 가슴속 깊이 안고 이 몸은 쓰러져 가노니 옛터야 잘있거라‘

이렇게 막간무대를 통하여 유행되기 시작한 노래가 레코드로 출반된 것이 1932년의 빅타 판이었다. 그 뒤 이애리수는 여배우에서 가수로 환영받는 스타가 되어 전수린의 신곡을 계속 취입하게 되었다. 최초의 취입레코드 라벨에 인쇄되었던 곡명은「황성(荒城)의 적(跡)」이었다.

<황성옛터>는 일본풍의 2박자와는 달리 3박자를 사용했다. 조선인들은 급하게 쫓아가야만 하는 2박자 곡보다는 호흡이 훨씬 여유로운 3박자 곡을 선호했다고 한다. 가사도 일제의 수탈정책으로 고향을 떠나 타지로 가야했던 조선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실제 조선인들은 공연무대에서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쏟곤 했다.
일제는 <황성옛터>가 서정적인 가사 속에 반일감정을 내포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이 노래를 경계했습니다. <황성옛터>는 1934년 이경설 선생님이 <고성의 밤>으로 제목을 바꾸어 불렀다가 치안방해죄를 적용받아 금지곡으로 지정된다. 일제가 지목한 치안방해란 것은 독립을 고취한다는 뜻이었다.

일제시기 <황성옛터>는 고려의 망국과 조선의 망국을 연결 지음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민족의 노래로 자리매김한다. 현재 <황성옛터> 의 배경이 된 개성은 민족의식을 제고시키는 장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개성의 만월대는 2007년부터 남북공동발굴이 시작되어 많은 유물들을 수습하는 한편 고려 국왕이 정치를 행했던 화경전 등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고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성은 남북이 민족사를 공유하고 통일의 주춧돌을 놓는 장소라 할 수 있겠다. 이 때문에 <황성옛터>는 민족의 노래로서 생명력을 유지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유행가는 흘러간 노래라는 의미와 흐르고 있는 노래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황성옛터>는 일시적으로 불려 지다가 사라지는 유행가가 아니라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유행가로 보여 진다. 그것은 <황성옛터>가 한 시대를 상징하고, 그 시대의 대중들의 정서를 잘 반영했기 때문이다. <황성옛터>는 1935년 이애리수가 은퇴하자 인기가 조금 떨어졌다가, 1941년 남인수의 절창 음반으로 다시 큰 인기를 모은다. 그리고 노래 제목도 <황성의 적>에서 황성 옛터>로 바뀌어 지금까지 불려 지고 있다. 이 때 3절 가사는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에서' 한없는 이 설움을 가슴 속 깊이 ‘안'로 바뀌고, 주노나'는 '주노라'로 바뀌었다.

1절의 가사에는 월색(달빛)이 가득찬 만월대(황성)가 등장한다. 만월은 보름달을 의미한다. 여기서 작사가는 월색을 집어넣어 자신이 만월대를 방문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 고려가 망해서 궁궐이 폐허가 되었듯이 조선도 망해서 민인들이 나그네가 된 현실을 강조한다. 나그네는 식민지로 전락하여 주인에서 손님으로 전락한 조선인의 처지를 은유한 것이다. 2절에서 주인공은 폐허가 되어버린 궁궐터에 향기로운 풀들(방초)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보고 세월의 무상을 절감한다. 그리고 고려의 영화가 허무한 것처럼 자신도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허무한 꿈을 꾸고 있음을 실감한다. 3절은 주인공이 궁궐에서 나와 정처 없는 유랑을 떠나는 장면이다. 작사가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순회 공연하는 자신들의 처지가 나그네와 같다고 비유한 것으로 보여 진다.

고려의 궁궐은 개성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건설되기 시작하였는데,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가가 3년 후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이 궁전은 1126년(인종 4)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 때 척준경이 방화하여 소실되었다. 이후 궁궐 건축 및 소실이 반복하다가 강화도에서 환도하고 난 다음인 1270년(원종 11)에 재건되지만 다시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되고 끝내 재건되지 못하였다. 고려의 궁궐은 도성의 중심에 위치하지 않고 서북쪽에 치우쳐 있고, 그 궁터가 현재의 만월대(滿月臺)이다.


개성 만월대



황성옛터는 황폐해진 궁궐터를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만월대를 뜻한다. 만월대는 고려 왕조의 수도였던 개경(개성) 소재의 궁궐터를 의미하며, <황성옛터>는 고려의 멸망과 나그네의 유랑이 절묘하게 비교되고 있다. 즉 망국으로 폐허가 된 고려궁궐과 망국으로 나그네 신세가 된 조선 대중들의 상황이 담겨 있다. <황성옛터> 에는 고려 시인들이 고려 멸망 당시 만월대를 돌아보고 고려의 멸망을 슬퍼하며 지었던 시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길재 시인은 오백년 도읍지를 돌아보고 무상했던 고려 왕조의 영화를 탄식했고, 원천석 시인도 만월대가 풀 속에 가려져 황폐한 모습을 보고 비감한 심정을 노래한 바 있다. 두 시인 모두 고려 왕조에 충절을 바쳤고, 조선 왕조와는 거리를 두었던 인물들이다.

현재 만월대에는 회경전 앞의 돌계단과 회경전터를 비롯하여 신봉문 터, 창합문 터, 건덕전 터, 장화전 터, 중광전 터의 주춧돌만 드러나 있다. 개성 역사박물관에는 만월대 궁궐의 모형이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다. 왕궁 자리는 송악산 남쪽기슭에 있는데 달을 바라보는 곳이라는 뜻에서 망월대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이 전해오면서 만월대로 되었다고 한다.

태조 왕건은 풍수지리를 신봉하여 좋은 터를 물색한 끝에 송악산 기슭에 궁궐을 지었으나 궁은 너무 많은 수난을 겪었고 지금은 폐허로 남았다.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