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保寧 聖住寺址 郞慧和尙塔碑)

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保寧 聖住寺址 郞慧和尙塔碑)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비각)



사적 제307호.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에 의하면 백제 법왕이 창건한 절로 처음에는 오합사라고 불렀다.  신라 문성왕(839~859) 때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2년(801)에 태어나 열세살에 출가하여 현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어 문성왕7년(845)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가람을 크게 중창하면서 선(禪)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또한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는 적마가 나타나 밤낮으로 울면서 절 주위를 맴돌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절은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지금까지 절터만 남아 있다. 1968, 1974년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해 금당·삼천불전지·회랑·중문 등의 건물지가 밝혀졌으며, 이때 통일신라시대의 소조불두와 백제·통일신라·고려 시대의 와당류가 출토되었다.

현재 중요문화재로는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5층석탑(보물 제19호), 동서 일렬로 배치된 보령 성주사지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과 보령 성주사지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 성주사지 동 3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성주사지 석등(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등이 전해지고 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상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하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이수) 상단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이수)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귀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비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비문) 확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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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