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인기 벼슬 능참봉

조선 당대 최고 선호직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고인기 벼슬 능참봉


조선 왕릉은 세계적으로도 유래 없는 단일왕조 왕가의 무덤 모두가 온전하게 남은데다 유교철학과 풍수사상이 담긴 탁월한 조형미를 인정받아 40기 모두 세계유산이 됐다. 이렇듯 조선왕조 500년 세월동안 왕릉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능참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조선시대에는 동반(東班:文官), 서반(西班:武官)이 있었는데 이를 양반이라 통칭한다.
동반의 잡직(雜職)과 토관직(土官職), 서반의 잡직과 토관직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문관직으로는 참봉(參奉)·검률(檢律)·부정자(副正字)·학유(學諭)·전화(典貨),
외관직으로는 훈도(訓導)·심약(審藥)·검률·역승(驛丞)·참봉 등이 있었다.

무관직으로는 선전관·부사용(副司勇)·수문장(守門將)·초관(哨官),
외관직으로는 별장(別將)·권관(權官)이 있었다.
종9품관은 녹과(祿科)의 18과(科)에 해당되어 조미(糙米) 8석, 전미(田米) 1석,
황두(黃豆) 2석, 소맥 1석, 정포(正布) 2필, 저화(楮貨) 1장을 연봉으로 받았다

참봉과 같은 말로 장사랑(將仕郞)도 있다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도 능참봉 출신인데, 능참봉은 조선시대 최하위직 관료인 종9품으로 오늘날 9급 공무원에 해당한다. 예조에 속했으나 임금의 능을 모시는 일선의 실무자로서 실제 직책보다 높은 권한을 행사했다. 조선시대 대표적 능참봉인 황윤석이 쓴 일기형식의《이재난고(頤齋亂藁》를 비롯한 기록을 통해 당시 능참봉의 업무를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종3품인 능참봉은 부사와도 거리낌 없이 왕릉관리 문제를 논했으며 고유제 때 지방관을 헌관으로 직접 차출하는 일도 예사였다. ‘나이 70에 능참봉을 했더니 한달에 거동이 스물아홉번’이라는 말이 대변해 주듯 능참봉은 역할도 매우 다양했다. 원칙적으로 2인이 매월 보름씩 2교대로 재실(齋室)에 기거하며 근무했는데 왕과 왕비의 제례를 관장하고 능을 살피는 봉심(奉審), 능역 내의 수목관리 및 투작(偸斫:함부로 나무를 베는 일)의 감시를 주로 담당했으며 능지 또한 제작했다. 정자각, 비각이나 석물을 개수하는 일에 감독을 맡기도 했고 수복(守僕:능침에서 청소하는 일을 맡은 사람)과 수호군을 살피는 방호도 중요한 역할의 하나였다. 이러한 직무특성 때문에 그들은 유학적 지식과 건축, 토목, 조경 등 기술 분야의 전문성까지 겸비한 직무능력을 갖춰야만 했다.


‘연소하지 않고 경륜이 있는 자’를 시험을 거치지 않고 특별채용의 형식으로 능참봉을 임용했다는《성종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데다가 왕릉수호라는 상징적 권한 때문에 당대 최고 선호직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은《경국대전》 〈봉심규정(奉審規定)〉을 통해 능역관리를 체계적으로 수행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높은 직책은 아니었지만 조선 최고의 왕릉 관리 전문가로서 조선 왕릉의 세계유산 가치를 오늘까지 보존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능참봉이 있었음을 기억할 만하다. 오늘날에는 조선왕릉 관리소를 중심으로 동부·서부·중부 등 3개 지구의 14개 권역에서 문화재청 직원들이 능참봉의 역할을 계승하고 있다.

<순조 유릉 공사모습>
<철종 국장 도감의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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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