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효심이 어린 곳, 독산성

독산성과 세마대

정조의 효심이 어린 곳, 독산성


독산성과 세마대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있는 사적 제140호로 백제시대의 산성이다. 현재 세마대지와 함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본성의 총 연장은 1,100m이며 내성은 350m이 달하는 아담한 산성이다. 백제시대의 산성이지만 통일신라와 고려시대까지 계속 이용되어 왔고,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말을 쌀로 씻어 왜군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하다. 영조, 사도세자, 정조 3대의 애증이 묻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망이 좋고 독산성 산림욕장과 주변 먹거리 상권이 형성되어 있어 많은 오산 시민들이 방문한다.

축조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독산성의 위치적 특성이 용인, 양지 간에 있는 고성과 남한산성이 기각지세를 이루어 왕도의 문호를 굳게 한다는 전략상의 이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백제가 쌓은 고성이었고, 신라통일기나 고려시대에서도 군사상 요지로 되어 왔다.
독산은 본래 석대산, 향로봉이라고 불려왔고 조선시대에는 독산성이라 불려왔으나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폈던 진묘(眞妙)한 병법전략에 연유해 지금은『세마산』또는 『세마대』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정상의 누각은 이승만 전 대통령님 친필의 “세마대”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오산은 면적이 42.75km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이다. 주변에 있는 수원시의 면적이 121.01km 이고 평택시의 면적이 453.31km 에 달하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작은 도시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오산에는 정조의 효심이 어려 있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 바로 독산성이다.

독산성은 오산시 지곶동에 있는 산성으로 만들어진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백제시대 때 축성된 성으로 추정된다. 또한 백제 때 만들어진 산성이지만 통일신라와 고려시대까지 계속 이용되어 왔던 요충지이기도 하다.

                                        독산성 동문

독산성 남문

                                         권율 장군

독산성 성벽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  세마대


독산성은 1953년 임진왜란 때 전라도 관찰사이자 순변사였던 권율이 왜군을 물리친 장소로도 유명하다. 1750년 영조가 임진왜란을 기억하기 위해 방문하였고 10년 뒤 사도세자가 온양온천에 행차했다가 환궁하던 중에 장마로 인해 하루 머물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독산성은 한 때 위기를 맞는다. 풍수지리를 이유로 독산성을 없애야 한다는 논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산성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하루 머물러 백성들에게 인정을 베푼 의미 있는 곳이기에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풍수지리 논란을 이겨내고 독산성을 개축하도록 했고, 개축 이후 현재의 독산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독산성은 세마역에서 차로 3분 거리에 있다. 독산성 주차장에 도착해 독산성 산림욕장과 보적사라고 적혀있는 안내판을 지나 쭉 올라가면 독산성의 동문을 만날 수 있다. 독산성의 동문을 지나면 보적사를 볼 수 있으며 아담한 보적사를 구경하고 나오면 드디어 독산성의 진짜 모습과 함께 오산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새로 지은 높은 건물들이 즐비한 동탄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독산성길에 앉아 확 트인 전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그림과 같이 나온다.


보적사에서부터 독산성길을 따라 쭉 걸으면 독산성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는 돌탑도 볼 수 있으며,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와 얽힌 독산성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 안내판도 찾을 수 있고 독산성의 여러 문도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만나는 문은 남문이다. 남문은 말과 소가 다닐 수 있었고 주 출입구 역할을 했다. 현재의 모습은 1979년에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으로 문확석 2개만이 남아있다. 조금 더 걸으면, 암문도 만날 수 있다. 암문은 순조 4년에 현륭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서문을 폐쇄하고 만든 문으로 이 역시 복원된 것이다. 지도상에서는 서문과 북문도 확인할 수 있으나, 아직까지 복원중이기 때문에 아쉽게도 직접 볼 수는 없다.

독산성은 군사기지로서의 주요 위치에 놓여있긴 하지만, 샘물의 부족이 흠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1593년(선조26) 명나라 원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남하함에 전라도 순변사이던 권율장군이 명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수복하고자 2만 명의 군사로 이곳에 진을 치고 대군과 대치한 독산성 전투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끈 왜군은 이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정탐군사에게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 보냈다.
그러나 권율장군은 왜군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백마를 산 위에 끌어올려 흰쌀을 말에 끼얹어 말을 씻는 시늉을 하게 하였다. 이것을 본 왜군은 성내에 물이 많은 것으로 알고 퇴각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샘물의 부족한 단점을 권율장군이 슬기롭게 극복한 세마대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1957년에 복원되었다.

※ 1977년 간행된 전국문화유적총람에 의하면「독산성 및 세마대지」의 연혁에 대해 백제 때 축성된 고성이었고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중요한 요지로 되어 왔으며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주둔했고 변이중으로 하여금 화포를 발명, 제작케 하여 행주대첩에서 승전케 하였다. 또한, 임란 후 조정에서 독산성에 세마대를 장엄하게 세우고 병기창을 두어 무예연습을 하게 하였으며 정조16년(1792년)에 독산성과 세마대를 중수하였다.


보적사

용주사 본말사지에 의하면 보적사는 창건당시 이세계 중생의 질병치료, 수명연장, 재화 소멸, 의복, 음식 등을 만족케하고 부처의 행을 닦아 무상보리의 진리를 터득케 한다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정전으로, 독산성의 역사와 함께 오랜 세월을 같이 했으나 1990년 도광정운(道光正云)스님의 불사 때 석가여래불을 모신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창정전이 건립되면서 대웅전으로 명칭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적사는 백제의 고성인 독산성 정상하단 동문 앞에 위치해 있는데, 삼국시대에 독산성을 축성한 후 성내인 현재의 터에 전승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인한 중건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적사란 이름이 지어진 것은 백제시대 보릿고개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노부부가 겨우 쌀 두되만이 남아 있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러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결심한 후, 공양 후 집에 돌아와 보니 곡간에 쌀이 가득 차 있는 기적이 발생하였다고 하며 열심히 공양하여 보화가 쌓인 신통력 있는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1988년 7월 27일 전통사찰 제34호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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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