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 / 역(驛)이 존재하는 한 기차는 달린다.

특집 / 역(驛)이 존재하는 한 기차는 달린다.

 

열차와 기차역은 우리 삶과 직결되는 대중교통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마차와 뱃길시대를 종결짓는 자동차와 열차의 등장은 시대변화를 급속도로 진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이 국가 간 정치적으로 이용된 아픔이 가중되어 민족의 역사에 남아있지만 국민들의 삶 속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찻길은 경인선이다. 최초의 역 또한 노량진역과 인천역 사이에 설치된 7개의 역이다. 한반도를 종단하는 경부선과 경의선 외에 호남선과 경원선, 함경선, 중앙선 등 대부분의 간선(幹線)철도는 일제 강점기에 완성되었다.

이번 특집에서는 이러한 역들의 역사를 살펴보고 역의 변천과정과 기차 및 철도의 역사, 열차에 스민 추억을 살펴봤다. 또한 열차를 이용하여 즐기는 관광, 미래가치 등도 알아보고 우리나라의 최초라는 대명사가 붙은 기찻길과 철도, 재밌는 역에 대한 이야기들로 꾸몄다.  편집국

 

한국 철도 역사 출발합니다. 역의 생성과 발전 과정을 되짚다.

글 배은선 한국철도공사 영등포관리역 부역장

 

일제는 우리 정부를 압박하여 철도역 부지를 최대한 넓게 확보하고자 했다. 경부철도의 경우부지 선정 기준은 새로운 도시 개발이 아니라 기존 상권이 형성된 각 도심을 가급적 직선으로 연결해 대륙으로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역(驛, 정거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분명한 설치 목적이 존재한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사람이나 물자의 장소 이동이 있을 것이고, 철도 시스템자체를 존속시키기 위한 운전 취급을 목적으로 삼기도 한다.  이러한 목적은 시대나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가치 기준이 달라지면서 존재가치가 등락을 거듭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무도 찾을 것 같지 않은 간이역에도 저마다 화려했던 '왕년(往年)이 있는 것이고, 최신식 구조물과 수많은 이용객을 자랑하는 대도심의 복합역사도 장래의 일은 함부로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철도의 핵심요소인 역의 정의와 생성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 발전 과정을 중심으로 한국철도의 역사적 흐름을 간략히 조망해 보고자 한다.

 

역(驛)을정의하다.

일반인들은 정거장(停車場)과 역을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역'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철도에서 말하는 정거장이란 “여객의 승강(乘降), 화물의 적하(積荷), 열차 조성(造成), 차량 입환(入換), 열차 교행 또는 대피를 위해 상용하는 장소를 말한다.

이렇게 다양한 정거장의 역할 중에서 여객의 승강과 화물 적하를 위해 설치한 곳이 '역에 해당하며, 열차 조성과 차량 입환을 위해 설치한 곳이 조차장(操車場)'이며, 열차 교행 또는 대피를 위해 설치한 곳이 신호장(信號場)'이다.

이렇게 '역'이란 사람과 물자를 철도를 통해 실어 나르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한 곳이기 때문에 이름조차 생소한 조차장이나 신호장에 비해 일반인들에게 친숙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철도에서는 역을 다시 몇 가지 종류로 나누고 있는데, 먼저 역장(驛長)이 배치되어 있는 보통역(普通)'이 있다.  또한 역장이 배치되어 여객이나 화물취급을 하더라도 운전취급을 하지 않는 역이 있는데, 이런 역을 운전간이역(運轉簡易驛)'이라고 한다.  역 중에는 역장은 없이 직원만 배치되어 여객 취급을 하는 곳도 있는데, 이런 역을 배치간이역(配置簡易)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무배치간이역(無配置簡易)'이 있는데, 역장도 직원도 배치되지 않은 채 차내 취급(열차 승무원이 여객 취급 담당)을 하기나 위탁운영을 하는 역을 말한다.

철도에서는 하나의 정거장을 보통역으로 운영하다가 역세권 변화 등에 의해 간이역으로 운영하는 것을 ‘격하(格下)'라고 하고, 그 반대의 경우를 '승격(昇格)'이라고 표현한다. 통상적으로 간이역'이라고 하면 지방노선의 작은 시골 역을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으나, 실제 철도에서의 간이역이란 역의 규모나 수송 실적이 아니라 역장 배치여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역

 

우리나라 철도역의 탄생

 

우리나라에 철도가 처음 달리기 시작한 것은 대한제국 시대인 1899년 9월 18일이다.

이 날 당시 경기도 인천부(仁川府)의 인천역과 경기도 시흥군의 노량진역 간 7개 역이 영업을 개시했다. 당초 경인철도 부설구간은 대한제국의 수도인 한성부(漢城府)즉 서울의 경성역과 인천역을 잇는 10개 역으로 계획돼있다.  하지만, 부설 허가서에 명기된 공기(工期)에 쫓긴 일제가 난공사 구간인 한강철교 완성을 보지 못한 채 반쪽짜리 임시영업을 강행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철도가 처음 시작된 것이다.

당시 7개 역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인천역(仁川)이다.  이 역의 영문명은 'Chemulpo’이며, 외국인들은 조선의 행정구역명인 '인천'보다 개항장인 '제물포'란 명칭을 더 선호했기 때문에, 역의 정식 명칭인 '인천' 보다. '제물포를 더 많이 썼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이들이 경인철도의 시발지를 제물포로 잘못 알고 있다.

그 다음은 축현역(峴), 지금의 동인천역이다. 영문명은 'Saalijy‘이며, 한때 인천역을 하인천(下仁川)으로 부르던 시절에는 이 역을 上仁川(상인천)으로 부르기도 했다.  축현역 옆에는 우각동역(牛角洞驛)이 있었다. 영문명은 'Sopple'이며, 지금의 도원역 근처에 있던 이 역은 1897년 3월 22일 경인철도 기공식이 열렸던 장소로 유명한데, 영업 개시 후 얼마 되지 않아 폐역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 옆에는 부평역(富平澤, Poopyong)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는 소사역(素沙驛, Sosha)이 있었다.  이 역은 1970년대에 들어 부천역(富川驛)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지금의 소사역은 1997년에 새로 생긴 별개의 전철역이다.

소사역 다음엔 오류동역(梧柳洞驛, Oricle)이 있었고, 그 다음이 노량진역(鷺梁津驛, Nodd)이다. 노량진역은 1899년 임시영업 당시엔 한강 범람으로 인해 노량진이 아닌 영등포에 임시역사 형태로 존재했고, 이듬해인 1900년에야 노량진에 제 자리를 잡았다.

한강철교 완성과 함께 한강 이북의 용산역(龍山驛,Yungsan)과 남대문역(南大門驛, South Gate), 경성역(京城驛, Seoul)도 건설되어 경인철도가 온전히 개통되던 1900년 7월 8일에는 모두 10개의 철도역이 존재했다.

남대문역은 지금의 서울역에 해당되며, 시발역이자 종착역인 경성역은 1905년 경부철도 개통 이후 서대문역(西大門驛)으로 개칭되었다가 1919년 3월 기미독립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시점에 폐지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 경성(서울)'이라는 역명이 다시 등장한 것은 서대문역 폐지 이후 4년이 지난 1923년의 일(남대문역을 경성역으로개칭함)로, 1905년 초부터 1922년 말까지 만 18년 동안 우리나라엔 ‘서울역’이 없었다.

경인철도(훗날 경인선) 개통식은 1900년 11월 12일 성대하게 거행되는데, 이 시점에는 영등포역(水登浦驛)이 추가되어 경인철도는 모두 11개 역으로 운영된다.  이 역은 당초 설계도에도 없었던 것인데, 임시 영업 당시 노량진역으로 사용되던 가역사(假驛舍)를 철거하지 않고 운전 취급용으로 남겨두었다가 1900년 9월 1일 ‘영등포역'이라는 간판을 새로 달고 영업을 시작한 것이다.  초창기의 11개 역 중에서 유일하게 사전 시장조사가 아닌 사후 수요 발생에 의해 문을 연 철도역에 해당된다.

광명역

 

초창기 우리나라 철도역의 특성

 

경인철도는 비록 일제가 완공하였으나 1996년 조선왕조에 의해 미국인 모스(James R,Morse)에게 국내 최초로 부설이 허가되었으며, 설계와 자재 도입 초기 부설과정은 모두 미국에 의해 이뤄졌다.  따라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 의도가 개입될 여지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경부철도의 경우 부지 선정을 위한 밀정(密愼) 파견부터 부설권 확보, 설계와 건설, 운영 모두가 일본 주도로 이뤄졌기 때문에 영등포역과 초량역(草梁) 간 한반도 남단을 이어주는 경부철도에는 일제의 대륙 침략과 조선에 대한 식민지화 의지가 충실히 반영돼 있었다.

일제는 우리 정부를 압박하여 철도역 부지를 최대한 넓게 확보하고자 했다.  경부철도의 경우 부지 선정 기준은 새로운 도시 개발이 아니라 기존 상권이 형성된 각 도심을 가급적 직선으로 연결해 대륙으로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철도를 부설하는 과정에서 이 땅의 많은 백성들은 집과 농지, 선산을 잃거나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일제는 철도 건설을 통해 확보한 전국 상업 요지에 자국민 이민을 적극적으로 실시함으로써 토착 상업기반을 철저히 붕괴시켰다.

이렇게 우리나라 철도역 건설은 반민족적, 반민중적 의도로부터 출발했으며, 건설 이후엔 참담한 현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요 역 광장엔 일본으로 실어 나를 쌀과 목재, 광석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철길을 따라 일본군대가 들어오고 이 땅의 남정네들은 징용으로, 어린 딸들은 위안부로 끌려갔다.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로 떠나는 이들 역시 철도역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를 종단하는 경부선과 경의선 외에 호남선과 경원선, 함경선, 중앙선 등 대부분의 간선(幹線) 철도는 일제 강점기에 완성되었다.  우리나라 철도가 민중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데에는 역설적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큰 역할을 했다.  전선(戰線)을 따라 아군 병력과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고 피난민을 안전한 곳으로 후퇴시키며 철도와 정거장은 고마운 존재로 서서히 바뀌어 갔다.

전쟁과 혼란기를 거쳐 경제성장기에 들어서면서 사람과 물자의 공간적 이동은 부가가치 창출로 이어졌고, 철도는 물질적 풍요와 문화 수준을 평준화시키는 도구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내에도 민자역사(民資驛舍)가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역이 단순한 운송을 위한 접점 개념에서 먹고, 즐기고, 소통하며 쇼핑과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으로 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치 측면에서 볼 때, 1899년 7개로 시작한 정거장은 경부철도와 경의선 개통으로 이어지며 1906년에는 93개로 급증했으며, 1945년 광복 당시 한반도전체의 정거장 수는 729개에 이르렀다.  한반도 이남의 철도역은 광복 직후300개로 시작하여 현재 한국철도공사가 운영하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670여 개에 이르며, 서울시와 각 광역시(부산, 인천, 대구, 대전, 광주) 등에서도 도시 철도를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 철도는 식민지 철도에서 산업철도로의 변화를 겪었고, 역 하나하나도 국토개발 정책이나 역세권의 변화에 따라 부침(浮沈)을 거듭하며 생명을 이어왔다.  앞으로도 우리 철도가 국가 발전과 국민의 행복을 위한 핏줄과 젖줄이 되어줄 것을 굳게 믿는다.  2편에 계속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