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이야기3

조선통신사 이야기3

 

한일 문화교류의 상징, 조선통신사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일본 에도막부의 초청으로 12회에 걸쳐,  조선국에서 일본국으로 파견되었던 외교사절단에 관한 자료를 총칭하는 것이다.  이 자료는 역사적인 경위로 인해 한국과 일본에 소재하고 있다.

조선통신사는 16세기 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국을 침략한 이후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고,  양국의 평화적인 관계구축 및 유지에 크게 공헌했다.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은 외교기록, 여정기록, 문화교류의 기록으로 구성된 종합자산이며, 조선통신사의 왕래로 두 나라의 국민은 증오와 오해를 풀고 상호이해를 넓혀, 외교뿐만 아니라 학술, 예술, 산업, 문화 등의 다양한 분야에 있어서 활발한 교류의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이 기록에는 비참한 전쟁을 경험한 양국이 평화로운 시대를 구축하고 유지해 가는 방법과 지혜가 응축되어 있으며, 「성신교린」을 공통의 교류 이념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를 존중하는 이민족간의 교류가 구현되어 있다. 그 결과, 양국은 물론 동아시아지역에도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졌고, 안정적인 교역루트도 장기간 확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기록은 양국의 역사적 경험으로 증명된 평화적․지적 유산으로, 항구적인 평화공존관계와 이문화 존중을 지향해야 할 인류공통의 과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현저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가진다.

 

조선시대 우리 민족의 공식적인 해외 체험은 사신행차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곧 명明과 청淸에 각각 파견된‘조천사朝天使’· ‘연행사燕行使’로 대표되는 중국과, ‘통신사通信使’로 대표되는 일본으로의 사행이 그것이다.

특히 조선통신사는 1428년부터 1811년까지 조선의 왕이 일본의 실질적인 최고통치자인 막부장군幕府將軍에게 보낸 외교사절을 말한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파견 되었지만, 일반적으로 임진왜란 이후 행해진 12차례의 사신행차를 일컫는다. 그것은 후기의 조선통신사가 전란의 상처를 딛고 행해진 외교사행인 데다, 이를 통해 양국의 다양한 문화가 교류하는 공식 통로 역할도 수행했기 때문이다.

 

외교사절단인 조선통신사를 문화사절단으로 보기도 하는 것은 그 구성원의 면면에서 잘 드러난다.  곧 조선 조정은 일본인과의 교류를 염두에 두고 외교에 밝고 학식과 문장으로 이름난 세 사신을 비롯하여 제술관製述官, 서기書記, 의원醫員, 사자관寫字官, 화원畵員, 악대樂隊, 마상재馬上才등 한결 같이 문학적 재능과 기예로 당대를 대표하는 이들을 선발하였다.  조선통신사는 이와 같은 문화적 역량을 바탕으로 일본인과 시문詩文을 주고받는 문학적 교류를 비롯하여 서화書畵와 음악을 포함한 예능은 물론 의복과 음식 등 생활문화와 의술과 조선造船등 기술문화의 교류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 결과 조선통신사는 진솔한 마음의 교류를 통해 상대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극복하고 상호소통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는 국제외교사에서 찾기 힘든 문화사행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국내 노정 속의 공식행사

 

조선통신사의 전체 노정은 왕복 약 4700㎞이며, 그 중 약 1/5이 국내 노정이다.  왕명을 받고 숭례문을 나선 사행은,‘갈 때는 경상 좌도左道를 거쳐 가고,  올 때는 경상 우도右道를 거쳐 온다.’는 규정에 따라 양재· 판교· 용인· 양지· 죽산· 무극· 숭선· 충주· 안보· 문경· 유곡· 용궁· 예천· 풍산· 안동· 일직· 의성· 청로· 의흥· 신녕· 영천· 모량· 경주· 구어· 울산· 용당· 동래를 거쳐 도일 전 마지막 집결지인 부산에 이르렀다.  1763년 사행에 제술관으로 참여한 남옥의 『일관기日觀記』에 기록된 국내의 전체 노정은 20일 동안 약 30개 지역으로 무려 440㎞에 달한다.  이틀을 머문 세 지역을 제외하면 하루 평균 26㎞를 이동한 셈이다. 왕명을 수행하는 사행인 만큼 국내 노정에는 전별연餞別宴·  마상재馬上才·  해신제海神祭등 공식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별연은 일본으로 향하는 조선통신사를 위로하는 잔치로 영천에서는 경상도 관찰사가, 부산에서는 경상 좌수사가 베풀었다.  특히 부산의 전별연은 경주·동래·밀양의 기생들이 저마다의 기예를 뽐내는 경연장이 되어,  예능인들의 기예 향상과 상호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신유한이 『해유록海游錄』에서‘왼쪽으로 뛰다 오른쪽으로 뛰고, 두 말의 등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웃으며, 가로 누웠다 벌떡 일어나는’것으로 묘사한 마상재는,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기예,  또는 기예를 부리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안동과 영천에서 열렸다.

특히 영천의 경우 조양각 에서는 악공의 연주와기생의 가무가 어우러진 전별연이,  그 앞 남천 변에서는 마상재가 함께 베풀어져 관람객과 장사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지역축제의 장이 마련되기도 했다.

 

또, 해신제는 도일을 앞둔 조선통신사가 부산의 영가대永嘉臺앞에 해신을 모신 제단을 설치 하고, 사행의 안전과 무사항해를 기원하던 행사였다. 5일 전에 제삿날이 잡히면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고 이틀 동안 술·고기·파·마늘을 먹지 않았다. 문상과 문병을 하지 않으며 하루 동안 목욕재계를 할 정도로 온 정성을 쏟았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당시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닷길을 건너야 하는 여행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던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역사의 애환과 국토산하의 재발견

 

비록 왕명의 수행이라는 뚜렷한 지향점과 목적의식을 가진 사행이라 하여도 여행의 특성상 개인적인 감흥이나 풍류가 없을 수 없다.  근대적 교통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서의 여행은 그 자체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전이고, 그 체험은 소중한 것이었다.  조선통신사의 발걸음이 머문 곳마다 소록소록 역사의 애환이 묻어났다.  충주의 탄금대를 지날 때는 배수진을 치며 왜적과 맞서다 결국 순국한 신립장군과 8천 군사의 한을 떠올렸고,  안동의 삼구정三龜亭에서는 청나라와의 화의에 반대하고 낙향한 김상헌의 강직함을 떠올렸다.

 

특히 국내 노정의 마지막 노정인 동래에 이르면 어김없이 충렬사에 들러 참배를 하였는데, 한 결 같이 왕명을 수행하는 긍지와 더불어 그 이면에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일본에 사행을 떠나야 하는 원통함을 피력했다. 이는 김인겸이 <일동장유가>에서‘충렬을 감격하야 재배하고 / 우리길 생각하니 괴루愧淚를 금할소냐’라고 읊어 동래부사 송상현으로 대표되는‘충렬’과 자신들의 ‘부끄러운 눈물’을 대비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의 발걸음이 머문 곳에는 이제껏 깨닫지 못했던 국토 산하의 아름다움도 오롯이 피어났다. 괴산의 수옥정에서는 10여 길의 폭포수가 물방울이 되어 흩어지는 아래서 의관을 풀어헤치고 한 잔술을 나누었고, 힘겹게 넘어온 문경새재의 교귀정交龜亭에서는 가을빛으로 물든 산봉우리에 넋을 잃고 말았다. 어디 그 뿐이랴.  안동의 영호루와 망호루, 영천의 조양각, 의성의 문소루와 관수루, 밀양의 영남루, 부산의 태종대· 해운대· 몰운대· 금정산성 등 노정 상의 명소를 마주할 때마다 누에가 실을 토해내듯 어김없이 그 감흥을 시문으로 옮겨냈다.  그야말로 사행노정을 따라 국토산하의 재발견이 이루어진 셈이다.

 

인적 교류와 몇 가지 일화

 

조선통신사의 발걸음이 머문 곳에는 사람 간의 교류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곧 중앙의 문사들과 지방 문사들 사이의 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통신사 사행원과 영천 선비들과의 만남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객관을 찾은 수십 명의 영천 선비들은 조호익의 제자들이었다.  조호익은 유배된 죄인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후진 양성에 힘써 선조임금으로부터‘관서부자關西夫子’라는 칭탄을 받은 인물이다.  일본 내에서 보이던 조선통신사와 지역문사 간의 집단적 교류가 이미 국내 노정에서부터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한편 긴 여행길에는 다양한 일화가 생기기 마련인데, 특히 1763년 사행은 여성과 관련된 일화가 많이 전한다.  출발 전에 일찌감치‘재색財色’을 경계하는 각오를 단단히 한 정사 조엄은 평소 가까이 하던 기생이 안동에 있었지만 만나지 않았고, 귀로의 대구에서는 직접 그녀를 만났지만 서숙부가 돌아가셨다는 핑계로 물리친 후 비로소 그 경계를 지켰다고 기뻐한다.  또 서기 김인겸은 여자를 밝히는 나이 어린 비장이 최고로 예쁜 기생을 침소에 배정해 달라고 조르자 가장 박색인 기생을 돌려 앉히고 등불을 켜지 못하게 한 뒤 비장을 들여보내 골탕을 먹인다.  그리고 숙맥인 역관 이언진은 아비의 제삿날이란 기생의 거짓말에 속아 그녀를 집으로 보낸 후 홀로 밤을 하얗게 새고 만다.

 

 

조선통신사 노정의 현대적 의의

 

이처럼 조선통신사의 국내 노정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상호교류에 의한 소통’의 가치를 중시했다는 것이다.  전별연에서 드러난 예능인의 교류와, 중앙과 지방문사들 간의 교류, 그리고 국토산하의 재발견 등은 조선통신사가 내디딘 발걸음을 통해 얻어진 값진 결과물이다. 길이란 주인이 따로 없고 오로지 그 위에 있는 사람이 주인이라고 했다.  이처럼 수백 년 전의 역사적 사실인 조선통신사가 ‘길’에서 발견한 가치를,  이제는‘고립’·‘단절’·‘소외’라는 단어에 익숙한 오늘날 우리들이 발견할 차례다.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최고 통치자에게 파견된 공식적인 외교 사절로 알려진 ‘조선통신사’.  통신사는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고,  양국 관계의 변화 속에서 통신사가 수행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 쓰시마, 시모노세키下關, 도모노우라鞆浦, 우시마도牛窓, 오사카大坂, 교토京都, 나고야名古屋, 시즈오카靜岡를 거쳐 에도막부의 쇼군이 거하는 에도江戶에 이르는 왕복 약 8개월이 걸리는 긴 여행이었다.

 

조선통신사 상륙비 시모노시키 아미다이치죠(下関 阿弥陀寺町)

 

흔히 통신사는 문화사절단이기도 했다는 점이 강조되기도 한다.  조선인들이 사행록을 남겼듯이 조선의 문화에 관심이 있는 일본인에게 사절단 일행과의 접촉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조선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통신사 일행의 구성원은 다양했다.  사절단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삼사三使를 비롯하여 통역을 맡은 역관譯官,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제술관製述官, 동의학東醫學에 정통한 의사, 글씨에 능한 사자관寫字官, 서기書記, 화원畵員, 승마술에 능한 마상재馬上才, 풍악수風樂手와 수부水夫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통신사가 머무는 각지의 숙사에는 일본의 학자, 문인, 상인들까지 면회를 원하며 모여들었고 상호 간에 시문詩文이 교환되었다. 통신사가 경유했던 지역에는 그들이 남긴 시와 기행문이 현재까지도 전래되고 있다.

 

이국정취 가득한 퍼레이드였던 통신사 행렬

통신사는 그 존재만으로도 당시 일본의 서민들에게는 매우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왜냐하면 에도시대의 일본은 막부가 ‘쇄국정책’을 실시하는 바람에 일반인의 해외 도항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중국의 선박과 네덜란드의 선박이 일본에 와서 무역을 하기는 했지만 오직 규슈九州의 나가사키長崎로 만 입항할 수 있었고, 입항해서도 중국인과 네덜란드인은 막부가 지정한 장소에서만 머물다가 떠나도록 되어 있었다.

 

에도시대 일본의 서민들에게 외국인을 볼 수 있는 기회란 거의 전무한 셈인데,  그런 상황에서 조선통신사 행렬은 외국인을 직접 목격하고 ‘외국’을 의식할 수 있는 제한된 기회였다.  통신사는 교토 부근에서부터 에도까지 육로를 이용하여 이동했는데,  통신사 자체만으로도 약 500명의 인원에 쓰시마의 무사들이 앞뒤로 호위하며 함께 움직였으니 전체 인원은 500명을 훨씬 상회했다.

 

쓰시마의 무사들과 함께 조선의 풍악을 울리며 이동하는 통신사는 행렬의 선두에서 말미까지 구경하는 데 약 2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통신사가 정기 사절도 아니고 수십 년에 한 번 성사되는 것이다 보니 수백 명 규모의 통신사 행렬은 당시 일본 서민들이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비일상적인 이벤트’였다.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차림새를 한 통신사 일원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이국의 정취가 가득한 ‘2시간짜리 퍼레이드’이자 오락이었다.  자연히 일본인들은 통신사 일행의 외모와 행동에서 얻은 인상을 회화, 예능, 공예 등을 통해 표현했다.

 

대륙의 이국에 대한 인상, 도진 오도리로 남아

그중 대표적인 것이 무형의 예능인 춤, ‘도진 오도리당인춤: 唐人踊り’이다. 일본의 여러 지역에서는 조선통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진 오도리가 지역의 전통 축제인 ‘마쓰리祭り’를 통해 아직도 행해지고 있다.

오카야마岡山 현 우시마도 초牛窓町에 전래되는 ‘가라코 오도리唐子踊り’는 두 명의 소년이 추는 춤인데, 통신사의 최고위 직인 세 사신三使의 종자로 시중들던 소년小童의 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통신사가 남긴 기록에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사행단원 중의 악사에게 연주를 시키고 소년들에게 맞춤을 추게 했다’라는 서술이 나온다.  조선 소년들이 추던 낯선 춤에서 받은 인상을 모티브로 해서 현지 서민들이 그것을 흉내 내기 시작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의 형식화된 춤사위가 되어 계승된 것이다.  우시마도 초의 가라코 오도리는 1960년 오카야마현의 ‘중요 무형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시모노세키下關 야스오카초安岡町 와키우라에서도 ‘도진 오도리唐人踊り’라는 기우제 춤이 메이지 시대까지 전해졌는데, 오카야마현 우시마도초의 ‘가라코 오도리’의 대무對舞와 거의 비슷한 형식이었던 듯하다.  그 외에도 많은 지역에서 도진 오도리가 행해졌다고 하나, 현재에는 미에현 스즈카시의 도진 오도리, 미에현 츠시의 도진 오도리가 남아 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남긴 문화적 유산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조선통신사로부터 유래했다는 이런 전통 예능이 ‘도진 오도리’라는 명칭으로 불린 이유는 무엇일까.  ‘당인唐人’이라 하면 보통 중국의 ‘당나라 사람’이라는 의미를 떠올리지만, 16세기 이후 전근대 시기 일본에서 ‘당唐’은 중국과 조선 모두를 지칭했다.  쇄국정책으로 인해 외국에 대한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일반 대중의 감각으로 ‘당’은 막연하게 ‘대륙의 이국’을 의미했다.  각지의 도진 오도리나 가라코 오도리를 찍은 사진을 보면 춤꾼들이 조선의 복장을 정확히 재현했다고 보기 어려운 의상을 입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게다가 각지의 도진 오도리 춤꾼들이 입은 의상은 서로 유사성도 적다.  도진 오도리는 당시 일본의 서민들이 조선통신사를 통해 얻은 ‘인상’이 ‘기억’을 통해 변주되며 전승되다가 ‘전통’이 된 ‘이국풍의 예능’인 셈이다.

 

조일 우호의 상징이 된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에도 시대 쓰시마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의 대중적인 인지도가 일거에 높아진 계기는 1990년 5월의 일이다.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이 궁중 만찬회에서  “270년 전 조선과의 외교에 관여한 아메노모리 호슈는 ‘성신(誠信)와 신의(信義)의 교제’를 신조로 했다”라며,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 구축을 역설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에도 시대 조·일 관계 연구자가 아니면 잘 알지 못하던 일본의 역사인물을 한국의 대통령이 언급했으니, 아마도 평범한 일본인들은 대부분 ‘호슈가 누구지?’하며 어리둥절했으리라.

국정 운영으로 다망했을 노태우 대통령이 한일 학계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어떻게 발굴해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호슈는 들여다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인물이다.  조일 통교 업무를 경험한 실무자이자 지식인으로서, 통교의 교본을 다수 저술하여 쓰시마의 조선 외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의 통칭은 ‘도고로(藤五郎·東五郎)’, 교토에서 병원을 개업한 의사 아메노모리 기요노리(雨森淸納)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업을 이어 의사가 되려고도 하였으나 당시 교토 학풍의 영향을 받아 유학자의 길로 전향, 1685년 에도로 가서 주자학자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의 문하에 들어갔다.  동문이었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무로 규소(室鳩巣) 등과 함께 ‘木門의 오선생(五先生)’으로 존칭 되었던 호슈는 스승인 준안의 추천을 받아 1692년, 쓰시마 번청으로부터 봉록을 받는 유학자 생활을 시작했다.

쓰시마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2회에 걸쳐 나가사키로 유학하여 중국어를 배웠고,  조선의 부산 왜관에도 건너가 조선어를 익혔다.  왜관에 있는 동안에는 조선이 펴낸 일본어 사전 『왜어유해(倭語類解)』 편집에 협력했고, 그 자신도 조선어 입문서인 『교린수지(交隣須知)』를 저술했다.

 

1698년, 조선담당부서(朝鮮向御用)의 좌역(佐役,주무관에 해당)에 임명되었고, 1702, 1713, 1720년에는 쓰시마가 조선에 파견하는 임시 사절의 도선주(都船主,使者의 용무 담당)로, 1728년에는 조선 쌀 수입의 연장 교섭을 위해 왜관에 건너갔다. 1711년과 1719년 통신사행 때에는 쓰시마번의 ‘진문역(眞文役,외교문서 담당)’으로 통신사 일행을 에도까지 수행하기도 했다. 1721년, 조선 인삼 밀수입에 긍정적이던 번청에 불만을 품은 호슈는 조선 담당 부서를 사임하고 가독(家督)을 장남에게 물려주었다. 1729년 특사가 되어 왜관에 건너간 것이 그에게는 마지막 조선행이 되었다. 그리고 1734년에는 쓰시마의 내정에 관한 상신서 『치요관견(治要管見)』과 『교린제성(交隣提醒)』을 저술했다.

 

앞서 말한 前 대통령의 연설 덕분인지 호슈는 ‘성신지교(誠信之交)’를 설파한 조일 우호의 상징적 인물로 인용되곤 하지만,  실제 그의 인물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1711년 통신사행 때 아라이 하쿠세키가 통신사 의례 개혁을 강행하려 하자 호슈는 하쿠세키와 대립했다.  또한 막부 정책에 의해 쓰시마의 조선 수출용 ‘일본 은’의 순도가 낮아져 조선 상인들이 조선 인삼 판매를 거부하며 항의하자 호슈는 조선 측 요구에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막부나 조선을 상대로 하는 갈등 국면에서 쓰시마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쓰시마번의 봉록을 받는 상황이었으니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처신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메노모리 호슈의 ‘성신지교(誠信之交)’

조일 통교에 대한 호슈의 인식은 『교린제성(交隣提醒)』에 집약되어 있다.  『교린제성』은 61세가 된 호슈가 자신의 실무 경험을 집대성한 책으로, 번주 소씨(宗氏)에게 올리는 의견

이다.  그 유명한 ‘성신지교’란 『교린제성』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로, ‘성신이란 실의(實意)를 말하는 것인데 서로 속이거나 다투지 않고 진실로써 교제하는 것을 성신이라 한다’는 문장이 인용되어, 이것이 조일 관계에 대한 호슈의 우호적인 인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이 문장 바로 뒤에는 ‘조선과 진실로 성신지교를 행하려면 쓰시마에서 보내는 송사(送使)를 모두 사퇴하고 조선의 접대를 받아서는 안 되지만 그것은 쉽게 성사될 수 없다’는 결론이 이어진다.  일견 의미 파악이 쉽지 않은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호슈가 『교린제성』을 저술한 이유를 힌트로 삼아야 한다.  ‘교린’이란 ‘이웃 조선과 교류하는 것’이고, ‘제성’이란 ‘주의(注意)를 환기하다, 암시하다’라는 의미이다.  호슈가 이 책을 집필한 동기는 단순히 ‘조선과 교류하는 기술’을 정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양국 간에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사례로 들어 주의를 환기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취할 수 있도록 암시를 주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시대의 풍조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 쓰시마번 당국에 커다란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조선은 임진왜란 직후 얼마간은 일본의 ‘무력을 앞세운 위세’를 두려워했고, 쓰시마는 그런 조선을 업신여겨 종종 위압적, 폭력적인 태도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곤 했다.  호슈는 이를 ‘난후의 여위(亂後의 余威)’라 표현했는데, 임진왜란으로부터 이미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난후의 여위’가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같은 위압적 방식을 고수하다 외교의 장에서 패착하여 갈팡질팡하곤 하는 쓰시마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호슈가 말하고자 했던 ‘성신’이란 추측건대 조일 양국의 외교와 무역 현장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상대의 실상과 시대의 풍조를 읽어서 최선의 방책을 찾아내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했던 듯하다. 분명한 것은 그가 말하는 ‘성신지교’가 단순한 장밋빛 이상론이 아니라 치열한 외교 경험의 산물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출처:동북아역사재단 뉴스레타 윤유숙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연구위원)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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