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고구려가 살아 있다

일본에는 고구려가 살아 있다. 

天皇陛下の高麗神社参拝で「天皇特権」「極左皇后」というパワーワードが誕生した模様…

 

日高市周辺は、7世紀に滅んだ朝鮮・高句麗(こうくり)からの渡来人が移住した地で、明治半ばまで高麗郡と呼ばれた。同神社は渡来した当時の指導者をしのんで創建されたという。

 

일본의 신사神社! 우리는 때때로 일본인의 신앙에 있어서 샤마니즘 적으로, 21세기에 있어서 후진적인 종교로 몰아붙이는 경향이 많다. 이는 그들이 신사마다 통일되지 않은 다양한 신을 모시고 있기에,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 는 세계 주류의 유일신 종교 기준으로 보면 힘이 없는 하찮은 신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일본의 신사는 유명한 역사 속 인물을 모시기도,  동물 신을 모시기도,  심지어 유명 장군의 갑옷을 모시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각지에는 한반도 출신의 신을 모신 신사가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도쿄 옆 사이타마겐에 고구려 왕족 (보장왕 아들이라고 함)출신  <약광장군신>을 모신 高麗神社(고마신사)가 있다.  일본에서는 각 신사에는 특별한 능력으로 효험이 있는 신이 있다고 믿는다.  이 고마신사에 참배하면 총리가 된다는 운은 국회의원이 방문 후 총리가 여러 명이 되었기에 붙여진 신사의 명예이기도하다.  이러하다보니 출세~개운~ 등으로 유명해졌다. 

 

 

 

 

 

일본 역사 속에, 근대사에 있어서 감히 아키히토 前 일왕만큼 우리 한반도(백제)인의 프라이드를 세워 준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이곳 고마신사에 아키히토(明仁) 일왕 부부가 개인 자격으로 2017년 9월 20일 약 3시간 가량찾았던 것이다.  고마신사(高麗神社)는 일본 도쿄에서 북서쪽 40여 Km 떨어진 사이타마현(埼玉縣) 히타카시(日高市)에 있다.  이 부근은 고려촌, 고려원, 고려본행, 고려치, 고려역, 고려촌역, 고려산, 고려천, 고려소학교, 고려중학교, 고려우체국, 등 고구려와 연관된 지명이 수도 없이 많다. 

 

 

 

고마신사(高麗神社)를 찾은  아키히토 일왕의 이 소식은 일본에서도 뉴스화가 되었으나 한국에서 더 크게 보도됐다.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68세 생일 때 왕실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자리에서, 일왕가에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폭탄 발언을 한 것이 관심을 더 갖게 한 큰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2015년 한일수교 50주년 기념으로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전시된 금동반가사유상을 관람도 하는 등 늘 한국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기에 더더욱 감사한 마음이 우러나온다.  이곳 고마신사의 경치는 마치 안동 화회 마을처럼 山水가 고려(高麗)하며 관광객은 40만 명이 고려신사를 찾는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관심의 씨앗일까  당시 아키히토 일왕을 약 3시간 영접하고 안내 한, 고구려의 약광 장군의 60대손, 고마후미야스 (高麗文康)ㆍ 宮司구지(신사의 제일 높은 지위의 책임자)씨는 당시 인터뷰에서 이야기 했다.  "나루히토(徳仁:현재 일왕) 왕세자는 고등학교 1학년때 고마신사(高麗神社)를 찾았고 역사학 공부를 했다" 고마신사는 7세기 일본으로 건너온 고구려인 왕족의 ‘약광(若光)’ 장군을 신으로 모신다. 약광 장군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할 위기에 처하자 일본으로 구원군을 청하러 왔다가 거절당했다.  이때 일본은 군사상 지원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 후 돌아가지 못한 약광장군은 함께 온 사람들과 망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국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백제인, 고구려인을 모았다.  당시의 넓었던 무사시노(武蔵野) 지방에 일본국 내의 제법 큰 고마군(高麗郡)이라는 마을을 세웠다.  고마신사(高麗神社)가 鎭座한 사이타마현 히타카시는 고마강(高麗川)의 맑은 물과 녹음이 어우러진 풍요로운 토지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716년에 신설된 고마군(高麗郡)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건군(建郡) 당초, 초대군수(고마신사가 모시고 있는 신)高麗王 若光(일본명:고마노고키시 쟉코)를 비롯하여 1799명의 고구려인이 개척한 이래,  이 지역에 사람들의 발자취가 끊어진 적이 없었다.  행정구역의 명칭은 일본의 여러 역사 지우기와 마찬가지로 히다카시로 바뀌었다. 그러나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 속 고유명사는 고마가와(高麗川)역, 고마高麗소학교, 고마高麗찌개 (김치찌개와 비슷) 등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 리고 고마 지역에선 당시 그릇이 많이 발굴돼 도래인의 영향으로 도기와 가마 문화가 발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1897년 이루마군(入間郡)으로 합병됨에 따라 고마군의 이름은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렇게 고마신사는 원래 이 지역의 신을 모시는 곳이기도 하지만 지역주민들에게는 역사적 인식이 깊지 않을 정도로 일본문화 속 일상화된 존재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또 당시에 망명한 약광 장군의 바뀐 성씨였을까 고마(高麗)성씨의 후손도 남아있다. 

 

고마신사(高麗神社)에는 재일본 한국인 단체 민단이 가끔 큰 행사를 하기도 하며 관계자가 자주 찾기도 한다. 신사 입구에는 2005년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해서 민단중앙본부에서 기증한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장승 2개가 다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기념식수를 한 나무도 있다.

 

책임자인 고마후미야스(高麗文康)씨는 “아키히토 일왕이 일본의 고대사 가운데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원래 어류학(魚類學) 박사이며 학자다.  고마신사에 방문하기 일주일 전에는 도래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를 불러 따로 수업을 받는 등 특별히 방문을 준비하신 것으로 들었다고도 했다.  이제는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살아생전 스스로 물러나 상왕上王이 되었다.  이렇게 한반도에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지는 일왕이 앞으로도 있을까? 를 생각할 때...  무엇인가가 다가오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  아마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관계가 우리들 가슴을 안타깝게 하고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아키히토 前일왕은 (상왕上王) 존경 받을 수 밖에 없는게 아닌지..

 

고마 신사에는 대한제국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심은 나무가 있어 일제강점기 때는 많은 독립투사가 찾아 일제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고구려 후예들은 동명왕을 받들고 있다.           

 

 

고구려왕 약광동상과  묘이다.    

  

한일우호를 위해  세운 장승이 보인다.

   

고구려 약관  축제시 행사 모습  

 

 참배객 명단에는 한일회담대표 허정, 민족대표33인이었던 최린, 공화당 의장이었던 윤치영, 

 전고려대학교 총장 김준엽 등 주요인물이 보인다.                 

 

고구려의 역사고구려는 한반도, 동북아시아에서 일찌기 국가를 형성한 기마민족의 하나였다. 그들은 광대한 토지를 영유하고 반농반목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천여년을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1세기 河伯의 딸이 日象에게 감응하여 잉태하였다고 하는 朱蒙은 어린시절을 보냈던 부여를 떠나 沸流水(현渾河)지역의 卒本(현요령성 桓仁)의 땅에 고구려를 建國하였다.그 후 영토를 확장한 고구려는 3세기 초 集安(현길림성 集安)으로 수도를 옮기고, 4세기 후반 談德이 왕위에 올라 20여년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확장하고 번영의 기초를 쌓았다. 談德은 사후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라고 칭해지고 그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장수왕이 높이 6미터의 거대한 비석 「광개토왕비」를 세웠다. 이「광개토왕비」는 동아시아 고대사에서 중요한 자료로서 현재에도 길림성 集安 땅에 우뚝 솟아있다.조선반도 북부에서 중국 동북부의 넓은 지역을 영유했던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치세백년은 고구려의 국력이 가장 충실했던 전성기였다. 장수왕이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고구려는 완전한 성숙기를 맞이하게 된다.문화적으로도 고도의 발달을 이루었으며 그 중에서도 고분벽화는 규모나 다채로움과 아름다움에서 매우 뛰어나다. 인물, 천문, 대열, 유적마, 역사, 수렵, 무용, 곡예, 천인, 문양, 사신도(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은 고구려인의 생활풍속과 신앙을 다양하고 흥미롭게 잘 그려낸 아름다운 세계다. 그 예술속에 표현된 세계는 실크로드로 연결된 유라시아 문화의 향기를 자아내고 또 나라현(奈良縣) 아스카무라(明日香村)다카마츠총(高松塚)과 키토라 고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들 고구려 고분군은 「광개토왕비」와 함께 200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고대 일본과의 문화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져 성덕태자의 불교의 스승이었던 승려 慧慈나 그림 도구와 먹 그리고 종이의 제조법을 일본에 전했다고 하는 曇徵 등은 잘 알려진 고구려인이다. 고구려는 일본에서도 고마(高麗)라고 불려지며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아악의 「高麗樂」도 원래 고구려 전래의 음악을 가르키는 것이다.

 

高麗王 若光(일본명:고마노고키시 쟉코)의 도래 이미 동아시아의 강국으로서 지위를 구축하고 있었던 고구려는 중국에서 생겨나는 대국의 침략으로부터 반도를 지키는 방어벽이기도 했다. 610년 수나라의 황제인 煬帝는 고구려 정벌을 선언하고 세 번에 걸친 원정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나라 군대의 맹공격을 을지문덕 장군의 활약으로 저지하고 수나라는 이 원정에서 입은 손실로 인해 멸망했다.수나라 다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도 642년 고구려 국내에서 연개소문이 일으킨 쿠데타를 계기로 세 번에 걸쳐 고구려 원정을 시도했지만 모두 고구려의 끈질긴 방어에 저지당한다. 660년 나당 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이듬해인 661년에 당나라는 재차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고구려는 철통같이 이들을 방어하며 권력자 연개소문에 의해 일시적인 안정을 찾지만 이것이 마지막 강성기였다. 665년 연개소문이 서거. 그 후 장남인 男生과 그 동생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후계를 둘러싼 대립은 국가권력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권력 싸움에서 진 장남男生은 666년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며 결국 고구려의 단단한 결속에도 금이 가게 된다. 국가의 위기를 맞이한 그 해 5월과 10월에 고구려로부터 야마토(大和)조정으로 외교사절이 파견되었다. 『일본서기』에는 10월에 일본으로 온 사절 중에「玄武若光」이라고 칭하는 인물이 기재되어 있다. 「玄武若光」이 훗날의 高麗王 若光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격동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배경으로 국가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온 若光은 두번 다시 고국의 땅을 밟을 일은 없어졌다. 667년 신라와 함께 고구려 정벌을 선언한 당나라는 바로 원정을 개시. 다음해인 668년 결국 수도 평양이 함락. 건국 이래 약 700백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융성을 자랑하던 고구려는 이렇게 멸망하게 된다. 고구려의 멸망을 전 후 해서 많은 고구려인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들은 새로운 안주의 땅을 찾아서 열도 각지에 정주하였다. 격변하는 동아시아 속에서 새로운 국가체제를 모색하고 있었던 일본에게 있어 조선반도로부터 앞선 기술이나 풍부한 지식을 전달해 주는 도래인은 귀중한 존재였으며 많은 고구려인, 백제인, 신라인이 등용되어 각 분야에서 힘을 발휘하였다. 若光은 일본 조정에서 五位下라는 지위를 부여 받고 703년에는 「王」이라는 성을 받아 얼마동안 일본조정의 관료로 종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도래한지 반세기가 지난 716년 東?(현 ?東地方) 7개 지방에 살던 고구려인 1799명이 무사시노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새롭게 고려군을 설치하게 된다. 이 때 若光은 초대군장으로 무사시노의 한 지역으로 부임한 것이다.

 

고마신사(高麗神社)의 창건若光이 일본으로 도래한 시기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666년 10월로 추정된다. 고구려 사절 중에 ‘二位玄武若光’이라는 이름이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高麗王 若光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 다음 若光이라는 이름은 703년 3월 『日本記』의 ‘종 5위하 高麗의 若光에게 王의 姓을 하사한다’라는 기사에 재차 등장하게 됩니다. 姓이라고 하는 것은 각각의 가문을 규정하기 위해 야마토 조정이 수여하는 칭호로서 王이라는 姓은 외국의 왕족 출신자에게만 부여되는 姓이었다. 若光은 군수로 취임하기 전에 이미 직위를 부여받았으며 그가 고구려의 왕족이며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王의 姓을 하사받는 특별한 대우를 받고 이후 군의 통치까지 일임받기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그 후 『日本記』 제 7권에 의해 716년 5월 야마토 조정은 駿河(靜岡), 甲斐(山梨), 相模(神奈川), (千葉), 常陸(茨城), 下野 7개 지역에서 고구려인 1799명을 이주시켜 ‘고마군(高麗郡)’을 창설한다. 이 때 若光은 군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若光은 지역 고구려인들을 능숙하게 지휘하고 미개발 지역을 개척하는 등 이 땅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치게 된다. 군민은 그 덕망을 칭송하고 그 영혼을 기려 高麗郡의 수호신으로 받들게 되었다. 이것이 이 신사의 창건 유래다. 『高麗氏係圖』 전문에 ‘若光이 작고하자 그를 추종하여 도래한 고구려인들이 귀천을 불문하고 모두 모여서 그의 시신을 성 밖에 묻고 신국의 선례에 따라 영묘를 어전 뒷산에 세워 高麗明神으로 받들고 흉사가 있으면 기원한다. 맏아들 家重이 그의 뒤를 잇는다. 한편 751년 고구려의 승려 勝樂이 죽자 그 제자 聖雲이 스승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 勝樂寺라는 절을 건립하게 된다. 聖雲은 若光의 셋째 아들이다’(원문은 한문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高麗신사와 勝樂寺(현 聖天院)의 유래를 알 수 있다. 若光은 만년에 흰 수염을 늘어뜨린 모습에서 白鬚樣이라 추앙되어 白鬚明神이라고도 불리우게 되었다. 또한 요즘에는 ‘출세의 신, 개운의 신’으로도 받들고 있다.

 

고마(高麗) 씨족의 계보若光의 뒤를 이은 家重은 748년 정월 17일에 세상을 떠나 弘仁이 그 뒤를 잇게 되었다. 14대 一豊(996년 서거)의 시대에 高麗神社는 ‘大宮’이라는 칭호를 받아 일본 국내 대사원의 하나로 인정받게 되고 高麗씨는 22대 純丸(1146년 서거) 시대에 이르기까지 ‘大宮司’라는 칭호로 불려진다. 23대 純秀(1199년 서거)는 修驗道의 시조 役行者를 신봉하게 되고 스스로도 受驗者가 되어 麗純으로 개명하고 ‘大宮寺’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그 후 56대 大記 시대에 이르기까지 高麗씨 일가는 受驗者의 길을 걷게 된다. 高麗씨는 若光 이래 5백 여년 남짓한 26대에 걸쳐 고구려인의 자손끼리만 혼인했다. 하지만 27대 豊純(1242년 서거)은 ‘源(미나모토)씨의 친족’인 駿河(靜岡)의 승도(僧都:승려를 통괄하는 승관)인 道曉의 딸을 아내로 맞아 그 계보에 있어서 최초로 고구려인이 아닌 집안과 혼인을 맺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심오한 사정으로’라고 기술되어 있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승도 道曉에 대해서는 최근의 연구에 의해 가마쿠라 막부를 연 源?朝의 이복동생인 全成의 아들임이 밝혀졌다. 이 혼인에 의해 高麗씨는 가마쿠라 막부의 가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28대 永純 시대인 1259년 11월 8일 화재가 나 계보를 비롯한 고구려 시대 이후의 보물이 소실되었다. 이리하여 高麗씨 일족 및 구신하들이 모여 각 집안의 고자료 등을 기초로 『高麗氏係圖』를 재편한다. 이것이 현재의 『高麗氏係圖』다. 이 係圖의 재편에 관여한 것은 高麗井, 新井, 本所, 新, 神田, 中山, 福泉, 吉川, 丘登大野, 加藤, 芝木 등의 집안이었다.32대 行高는 1337년에 奧州 국사가 가마쿠라의 足利씨를 공격하는 데 호응한 新田義興의 부름에 응하여 가마쿠라 공격에 가담하여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1351년에 足利尊氏와 그 아우 直義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直義 측에 가담하고 패전하게 된다. 이어 1352년에 足利씨와 新田씨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에서는 新田 측에 가담하여 3년에 걸친 싸움에 패한다. 이리하여 行高는 잠시 上野지방 藤岡으로 친척을 찾아 은신하고 高麗씨 가문의 토지는 몰수되어 한때 폐망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足利씨의 허락에 의해 다시 이 지방으로 돌아온 行高는 임종시 ‘우리 가문은 修驗道이므로 앞으로 전쟁에 참가해서는 안된다’라는 훈계를 남겼다.39대 良阿와 41대 覺與는 출전하라는 권유를 받지만 선조의 유언을 지켜 출전하지 않고 제사에 전념했다. 1868년에 탄생한 메이지 정부에 의해 修驗道가 금지되자 당시 가문의 일인자였던 大記는 신사의 신관이 되었다. 그 역사는 1,310여년이 지나간 지금은  60대 고마씨가 족보를 지키고 있다.

 

사진출처 : 인터넷 이미지

글 : 편집부  (참고문헌,  동경 박정석선생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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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