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같은 日 군인 "조선 처녀의 고기로 만든 국"

짐승 같은 日 군인 "조선 처녀의 고기로 만든 국"

세계일보 : 2018-09-23 08:27:54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일본이 본격적인 침략에 나서며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일제는 일본 군인들의 성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군대 내에 위안소를 만들고 식민지 및 점령지 여성들을 데려다 성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사용했다.

 

위안부의 비극을 기록한 영화 '귀향' 속의 한장면

 

일본군 병동에서 일하면 한달에 30엔(쌀두가마) 월급을 준다고 해서 모집에 응한 조선처녀들

 

조선의 처녀들이 도착한 곳은 남양군도 일본군 성노리개가 되는 쪽방 막사

 

전쟁을 위하여 위안부를 동원한 범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성욕을 채우고 모두 죽인 주검들

 

남양군도 야산 구석구석에 시체로 사라진 조선 처녀들의 비참한 주검들

 

전쟁 내내 위안부를 운영하며 성노예로 여성을 부려먹던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이 끝나갈 무렵 식량보급이 중단되자 상상조차 힘든 일을 벌였다. 자신들이 성노예로 부려먹던 조선인 위안부를 총창으로 찔러죽이고 일본도로 토막을 내어 나눠먹은 것.

 

믿기 힘든 이 이야기는 지난 2005년 북한 노동신문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노동신문은 "그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두뇌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만고의 죄악 이었다"며 "일제의 죄악의 역사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덮어버릴 수 없으며 일본은 그에 대한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이 행위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 일제가 식인 행위를 했다는 것은 북한의 희생자 박영심 할머니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38년 17살 나이에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 중국 난징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박 할머니는 "일본 놈들이 어느 날 '너희들이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있으니 오늘은 고깃국을 대접 하겠다'면서 고깃국을 주었다"고 말했다. 아무 영문도 모르던 박 할머니는 그릇을 깨끗이 비웠고, 그 모습을 본 일본 군인들은 껄껄 웃으며 " 그 고깃국이 '조선처녀의 고기로 만든 국'이다"고 조롱했다는 것이다.

박 할머니는 "(일본군은) 저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처녀를 죽여 가마에 넣어 끓였다고 했다며  "일본 놈들은 정말로 짐승 같은 놈"이라며 치를 떨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폭로한 일제시대 일본군의 만행은 도저히 인간의 행동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광기 그 자체다. 위안부 여성들을 성노예뿐만 아니라 인체 실험 및 식인의 대상으로 삼은 일본의 만행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역사다.

 

선명한 흑백 사진 속 20명의 조선 여성이 있다.

이들은 1944년 8월 버마(현 미얀마)에서 포로로 잡힌 위안부들이다.

 

조선일보 박정훈  사기획 에디터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가 없다"는 노다 일본 총리 발언에 분개한 독자 김원태씨가 소장하던 일본 책을 보내왔다. 요시다 세이지라는 일본인이 1972년에 쓴 육성 수기(手記)였다. 

 

 요시다는 시모노세키에서 일제의 노동자 징발 기구인 노무보국회(勞務報國會) 동원부장을 3년여 동안 지냈다.  그는 수많은 조선인을 강제 연행해 전쟁터로 보냈고, 그때의 만행(蠻行)을 참회하려고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 인"이라는 책을 썼다.  요시다의 증언은 현장을 보는 듯 세밀하고 구체적이다. 그는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아 한반도까지 넘어와 조선인을잡아갔다.  경찰 호송차를 앞세우고 경북 영천 일대를 누비며 젊은 남성을 연행했다는 것이다.  당시 요시다 패거리는 조선인 징발을 "사냥"이라고 불렀다.  아닌 게 아니라 아무집에나 들어가 사람을 끌고 가는 행태가 인간 사냥과 다를게 없었다.  그는 조선인 남성 사냥엔 별 죄책감이 없었다고 했다. 전 쟁중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 요시다도 여성을 군 위안부로 징발하는 일은 "혐오감"이 들었고, "창피하고 더럽게 느꼈다.  전장(戰場)의 위안부가 얼마나 유린당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본군) 1개 중대가 줄 서서 기다리면 위안부는 20~30명씩 상대해야 한다더라"고 썼다.  그에게 조선인 위안부 "사냥" 지시가 떨어진 것은 1944년봄이었다.  이해 4월 3일 "하이난도(海南島) 주둔 황군(皇軍) 위문(慰問)을 위한 조선인 여자 정신대(挺身隊) 100명을 징발하라"는 명령서가 내려왔다.  대상은 18~35세, 월급여 30엔에 임신부만 아니면 기혼자도 괜찮다고 적혀 있었다.  30엔이면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이걸 바라고 성노예를 자원할 조선인 여성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강제로 끌고 가면 시끄러워질 수 있었다.  요시다와 부하들은 사기를 치기로 했다.  위안부가 아니라 세탁 청소 등을 하는 잡역부(雜役婦)를 뽑는 것처럼 위장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조선과 가까운 쓰시마(對馬島)의 육군 병원에서 1년간 일할 잡역부를 모집하는 것처럼 내세운다는 각본을 짰다. 요시다의 책엔 "위안부 사냥" 수법이 4개 장(章)에 걸쳐 기록돼 있다. 경찰서 형사까지 가세해 4명으로 구성된 요시다. 팀은 시모노세키의 조선인 징용자 부락을 돌면서 사냥에 나섰다.  월급 30엔에다 쓰시마 병원 근무를 선전하자 조선인 여성들은 혹하고 넘어왔다.  다들 그 돈을 모아 조선 땅에 돌아가겠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요시다 팀은 일주일 만에 할당된 100명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18세 미만도 10여명 있었지만 지침에 따라 나이를 18세로 고쳐 적었다.  요시다는 "조선 민족에 대한 범죄를 나는 비겁하게도 30년간 은폐해왔다" 고 뒤늦은 고백을 사죄했다.  그는 일본 언론을 통해서도 자기 만행을 증언했지만 일본 정부는 거짓말이라며 덮었다.  요시다의 위안부 모집은 총칼 대신 "덫"을 썼다는 차이뿐 명백한 인간 사냥이었다.  이 책 한 권만으로도 일제의 위안부 강제 연행은 입증되고도 남는다.  총을 들이대지 않았으니 강제성이 없었다고 우기는 일본 정치인들은 이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요시다가 모집한 조선인 위안부 100명은 4월 10일 전쟁터로 떠났다. 이날 시모노세키항엔 조선인 처녀와 가족으로 붐볐다. '사냥'당한 여성들은 자신을 맞이할 험난한 운명도 모른 채 돈 벌어 고향에 돌아갈 희망으로 웃음꽃을 피웠다. 오후 1시, 기선(汽船) 두 대가 조선인 여성 100명을 태우고 떠났다. 목적지는 쓰시마의 병원이 아니라 남중국해 전선의 일본군 기지였다. 요시다는 부두에서 그 광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05/2012090502681.html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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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