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해로 남은 건물, 통일과 평화를 꿈꾸다.

잔해로 남은 건물, 통일과 평화를 꿈꾸다.

철원 노동당사

 

강원도 철원군에는 오래된 근대 건물 잔해가 적지않다. 그 잔해 가운데 원형 모습을 어렴풋이라도 제대로

간직하고 있는 건물 하나는 노동당사이다.

 

 

공산(共産) 치하

북위 38도선 이북에 위치한 철원은 1945년 8월 일제강점기가 끝나면서 북한의 관할권에 속했다. 1945년 10월 10일은 북한에서 노동당 창건일로 지정하고 있는 날인데, 이때 결성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다음 해 4월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했다가 다시 8월 조선신민당과 통합하여 북조선노동당이 되었다. 1946년 북조선노동당(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한반도 중앙의 거점지역 철원에 당사 건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이에 철원군 조선노동당이 현지 주민에게서 각종 물자를 징수하고 여러 인력을 징용하여 당시 철원의 번화가에 노동당사를 세웠다. 철원군의 각 리(里)에서는 당사 건립 자금으로 쌀 200가마를 강제 납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노동당사는 공산 정권에 동조하지 않던 계층에게 수탈, 착취, 고문, 공포의 장소였다.

철원 노동당사는 철근을 별로 쓰지 않고 시멘트와 벽돌로 조적(組積)하는 소련 건축공법에 따라 단순하게 지어진 건물이다. 오늘날 브루탈리즘(brutalism)으로 불리는 건축양식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냉전시대 때 유행했던 브루탈리즘의 원조로 볼 정도는 아니다. 사실 이러한 단순한 건축양식은 소련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계 곳곳에 세워졌는데, 황해남도 신천군 인민위원회 건물도 그런 예이다. 오늘날 반미(反美) 선전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신천군 인민위원회 건물은 철원 노동당사와 같은 건축가가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천 인민위원회와 철원 노동당의 전체 건물 구조는 비슷하지만, 층수와 현관 디자인 등이 서로 다르다. 철원 노동당사와 유사한 건물을 철원 외 다른 곳에서 오늘날 찾기는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도 무(無)철근 건물의 내구(耐久) 기간이 그렇게 길지가 않고 또 사회주의국가들의 체제 변화로 소련식 건물 다수가 해체되어 새롭게 재건되었기 때문이다.

 

 

열전(熱戰)과 냉전(冷戰)

철원 노동당사 건물 내구력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 사건은 6.25 한국전쟁이다. 오늘날 노동당사 건물에는 전쟁 때 입은 훼손의 흔적이 깊이 배어 있다. 건물 벽면은 여러 총탄 흔적으로 새겨져 있고, 무너진 천장은 포탄의 흔적이며, 현관 계단은 탱크 캐터필러 자국으로 패어 있다.

1950~1953년 치열한 전장의 한가운데에 있던 철원 노동당사가 70년 넘게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1953년 정전협정에 의해 설정된 군사분계선(MDL) 및 비무장지대(DMZ)는 철원을 남과 북으로 나누었다. 철원 노동당사 건물은 비무장지대 바로 남쪽에 위치하게 됨에 따라 남한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고, 또 노동당사를 포함한 옛 철원의 번화가는 비무장지대에 인접하게 됨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가 민간인통제구역에 포함시켰다. 한국전쟁의 치열한 전투가 끝난 후 철원의 새로운 중심지는 신(新)철원으로 불리는 갈말 지역이나 동송 지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동당사 등 옛 거리는 더 이상 철원의 중심가가 아니고, 그냥 구(舊)철원으로 불리고 있을 뿐이다.

철원 노동당사는 비록 전쟁으로 심각한 파괴를 겪었지만 20세기 후반의 반(半)세기 내내 민간인통제구역에 포함되어 인간의 출입을 통제했기 때문에 내구력 소멸을 늦출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부터는 민간인통제구역에서 빠졌는데, 세월의 탓인지 아니면 인간 출입의 탓인지 노동당사 벽면 곳곳의 균열이 더욱 심해졌고 이제는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 여러 철띠가 설치되어 있다.

 

개방과 평화

현재 철원 노동당사는 한적한 길가에 영화세트장 가(假)건물처럼 거의 벽면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상태이다. 본래 사회주의국가의 건축은 광장 등에서 관찰할 수 있듯이 비움과 채움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대형 구조물을 위주로 한다. 건물 벽면만이 앙상하게 버티고 있는 오늘날의 철원 노동당사도 세트장일 뿐이다. 그러다보니 각종 이벤트의 단골 장소이다.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은 철원 노동당사에서 “… 갈려진 땅의 친구들을 언제쯤 볼 수가 있을까 … 한 민족인 형제인 우리가 서로를 겨누고 있고 … 우리 몸을 반을 가른 채 … 시원스레 맘의 문을 열고 우리와 나갈 길을 찾아요 … 언젠가 나의 작은 땅에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 젊은 우리 힘들이 모이면 세상을 흔들 수 있고… 저 하늘로 자유롭게 저 새들과 함께 날고 싶어 … 이젠 함께 하나를 보며 나가요”라고 외치면서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다. 같은 해 같은 장소에서 KBS 열린음악회도 열렸다. 이후 여러 이벤트가 뒤따랐다. 음악 공연뿐 아니라 북한이나 분단을 소재로 하는 영화의 촬영장으로도 그리고 통일, 분단, 안보, 전쟁, 평화, 생태, 개발, 문화 등에 관한 토론회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지정이 시작된 2002년, 철원 노동당사는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이름을 올렸다. 비무장지대 인근지역으로는 처음 지정되었다는 점에서 철원 노동당사가 접경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등록문화재의 공식 명칭은 ‘철원 노동당사’인데, 대한민국 국어표기법에 따라 두음법칙을 적용해서 그렇게 표기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당이 북한의 특정 정당을 말하는 고유명사이니 현지 명칭대로 ‘철원 로동당사’로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남북한이 하나라는 근거 가운데 하나는 동일한 언어라는 점인데, 한글 맞춤법 문제는 사소하지만 민족, 통일, 평화를 바라보는 관점과도 연결되어 있다.

구철원의 건물 잔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극심한 연합군 폭격을 받은 독일 도시 드레스덴의 훼손된 건물을 연상시킨다. 1945년 2월 연합군 폭격으로 불길에 녹아 내려앉은 드레스덴 성모교회(Frauenkirch) 건물은 독일 통일 이후 영국과 미국을 포함한 국제적 지원으로 2005년 10월에 재건되었다. 만일 남북한, 미국, 중국 등 6.25 한국전쟁 참전국들이 구철원 잔해 건물의 복구에 함께 참여할 수 있다면 이 또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실, 건물 복구보다 마음 복구가 더 가치 있는 일임은 틀림없으나, 자유롭고 개방된 문화재 공유가 하나 된 마음의 복원에 도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글. 김재한(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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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