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말로 자신의 주인인데 어떤 주인이 따로 있을까

자기야말로 자신의 주인인데 어떤 주인이 따로 있을까, 자신을 잘 다룰 때 세상에서 얻기 힘든 자기라는 주인을 얻게 된다.  <본생경>

 

어떤 상인이 남에게 돈 반 푼을 빌렸는데 오랫동안 갚지를 못하였다. 그는 고민을 하다가 단돈 반 푼의 빚을 갚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어쩌면 그는 극히 작은 반 푼의 돈 때문에 그에게는 중요한 신의와 명예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는 앞길에는 큰 강이 있었다.

그는 강을 건너 빚을 갚으려고 하였으나 뱃삯으로 두 냥을 주어야만 건널 수 있었다. 그 마저도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그는 강을 건너기 위해 쓴 두 냥과 돌아오기 위해 쓴 두 냥 등 반 푼의 돈을 갚기 위해 네 냥의 돈을 쓰고야 말았다. 이 같은 사연을 들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것은 <백유경>에 나온 빚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이 같은 이야기를 두고 우리는 두 가지의 견해를 가질 수 있다. 비록 적은 돈일지라도 신의를 잃지 않으려면 많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갚아야 한다는 견해와 지금 당장 갚지 않고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때 갚아도 된다는 견해이다. 양자 모두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갚아야 한다는 견해는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인간적인 도리와 함께 삶의 중요한 법칙이 존재한다. 사람은 태어나 성장하면서 가져야 할 것은 ‘정직한 마음, 신의를 지키는 마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마음, 남의 부인을 탐하지 않는 마음, 어리석음을 구하지 않는 마음’ 등 이다.

반 푼의 돈을 갚기 위해 네 냥의 돈을 쓰는 것은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신의와 믿음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삼자가 볼 때는 어리석은 병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반 푼의 돈을 갚는 행위는 신의, 믿음, 은혜 등 여러 가지 마음을 구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남이 보기에 그 행동이 비록 어리석게 보일 지라도 사실 그들은 이 일에 대해서는 극히 제 삼자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돈을 꾸어 준 사람이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면 두 사람의 신의는 더욱 굳게 맺어 지게 될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이치도 이와 같다. 작은 명예와 이익을 구하기 위해 더 큰 손실을 보게 되는 일이 많은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의를 갖추는 것이 큰 사람의 도리이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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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