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德壽宮)은 경운궁(慶運宮) 안에 있었다.

덕수궁(德壽宮)은 경운궁(慶運宮) 안에 있었다.
원래 명칭인 경운궁으로의 회복이 시급하다. 덕수궁 고수는 일제 잔재

 

1592년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입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난리를 피해 평안도 의주로 몽진하였던 조선 14대 국왕 선조가 한성으로 환도한 후 월산대군의 사저를 국왕의 시어소로 쓰면서 궁이 되었고 1608년 선조가 승하한 후 15대 국왕 광조(=광해군)가 이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면서 궁호를 경운궁으로 명명하였다. 

1897년 대한국의 황궁 경운궁으로 이어한 대한국 고조 광무제는 10월 12일에 북악산의 남쪽 황단에서 천제(天帝)에 고유제를 올리고 대한국 1대 고조 광무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국호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 원년을 삼는다고 천명하여 조선시대에 이어 대한시대가 시작되었다.
 
1895년 이토 일본 총리의 명령을 받은 일본군에 살해된 왕후 민씨를 대한국 명성황후로 추책(追冊)하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였으며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황태자(순종 융희제)가 황제에게 축하 인사를 올리는 진치사의(進致詞儀), 문무백관들이 황제에게 축하를 올리는 하표의(賀表儀)를 비로소 거행하였고 역대의 고사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을 행하였다. 
 

▲ 1902년 그려진 지도에 경운궁과 황단(원구단), 영관,  미관,  아관(러시아),  법관(프랑스) 등이 그려져 있다.

대한국 고조 광무제는 종묘를 태묘(太廟)로,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격상하여 개칭하였으나 일본 제국주의 통감이 정미늑약 불법 늑결, 대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킨 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이유로 대한국 고조 광무제를 부정하며 황태자에게 조선 왕궁 창덕궁에서 대리청정을 명령하고 대한국 황궁 경운궁을 조선시대에 상왕의 궁에 승하시까지 한시적으로 사용한 일반 궁호로 격하시켰다.
 
1905년 11월 18일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침탈하는 을사늑약의 불법 늑결로 1906년 일제의 통감통치가 시작된 후 1907년 일제 통감부에 의해 대한제국 1대 황제 고조 광무제가 황태자(순종)에게 조선국 왕궁 창덕궁에서 대리청정을 명령한 뒤 영국인이 공사 감독한 서양식 근대건축물 덕수궁(德壽宮)에 임어하였다.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한 후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편전 겸 침전으로 사용된 서양식 근대건축물 덕수궁은 대한제국 황실 궁내부가 1900년 착공하고 1909년 완공해 1919년 1월 붕어시까지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전각으로 사용하였고 덕수궁 1층은 시종의 처소·주방, 2층은 접견실·귀빈실, 3층은 침실·욕실 등 고조 광무제의 공간이다. 덕수궁은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고문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영국인 기사인 하딩이 설계하고 건축 기사 심의석이 전체적인 공사를 감독했으며 1904년 이후 영국인 데이비슨이 덕수궁 공사 감독을 맡았다. 완벽한 좌우 대칭의 덕수궁은 고전주의 양식을 채택하였으며 이오니아식 기둥이 상부를 떠받치고 있다.
 

▲ 화재가 나기 전 경운궁의 모습. 당시 중화전은 2층 건물이었다.    
▲ 화재 후 단층으로 지어진 중화전    

정미늑약 불법 늑결,대한국 군대 강제 해산 후 황태자의 대리청정은 일본 통감의 강박에 의한 것이며 대한국 황제 고조 광무제는 대한국 황궁 경운궁에 1919년 붕어 시까지 임어하였고 황태자와 친일 내각이 조선 왕궁 창덕궁으로 옮겨 간 것이며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강탈당한 나라도 대한국이고 1945년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한 나라도 대한국이므로 대한국 황궁 경운궁 궁호의 환원은 완전한 대한 광복을 위한 역사적 당위이다. 

대한국 고조 광무제는 일본의 대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1904년 2월 8일 한반도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대한국 한성을 공격하여 황궁 경운궁을 점령한 후 1904년 2월 23일 대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한일의정서)을 불법 늑결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1905년 2월 대한해(동해)의 독도를 비롯한 대한국의 군사 요충지를 불법 점령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국을 강제 병탄하기 위하여 1905년 11월 9일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파견하여 일본군을 앞세워 을사늑약의 불법 늑결을 대한국 정부에 강요했으며 11월 18일 불법 늑결된 을사늑약에 대한국의 실질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통치자가 일본 통감이라고 규정했다. 을사늑약에 의한 여러 사무를 관장한 일본 통감은 일왕에 직속하고 외교는 일본 외무대신을 거쳐 내각 총리대신을, 기타 사무는 내각 총리대신을 거쳐 상주하고 재가를 받게 되었고 일본 통감은 대한국의 일본 관리 및 관청이 시행하는 업무를 감독하고 한국 수비군 사령관에 대하여 일본군 병력 사용을 명령할 수 있었다.
 
▲ 적색은 1911년 당시 경운궁, 노란색은 현재의 덕수궁, 파랑색은 미국 영사관, 녹색은 영국 영사관

 
1906년(광무 10) 2월 1일 일본제국주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하여 한국 수비군을 통수하는 원수의 자격을 겸임, 1개 사단 규모 이상의 전시 편제 일본군을 주둔시키고 경찰기구도 강화시켜 나갔다. 일본인 경찰고문이 5명에서 678명으로 급격하게 늘었으며, 경찰 수도 1,851명에 이르게 되었고 헌병대도 강화시켜 경술늑약 불법 늑결, 대한국 불법 병탄 이후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반을 이루었다. 을사늑약 불법 늑결, 일제 통감부(총독부) 설치 이후 대한국 국권 회복을 위한 한민족의 저항이 대한독립운동·계몽운동과 같이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전개되었으며 대한국 고조 광무제의 헤이그 특사 파견, 반일 상소, 자결이 계속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불법 늑결 후 1906년 설치된 일제 통감부가 1907년 헤이그 특사 처벌,정미늑약 불법 늑결,대한국 군대 강제 해산시킨 후 헤이그 특사(特使) 파견을 이유로 대한국 고조 광무제를 부정하며 일제 통감이 황태자에게 조선 왕궁 창덕궁에서 대리청정을 명령하고 경운궁을 조선시대에 상왕들의 궁에 승하시까지 한시적으로 사용한 일반 궁호로 격하시켰으므로 문화재청은 대한국 황궁 경운궁이라는 궁호(宮號)를 환원, 재지정해야 한다.
 
1907년 일제 통감이 황태자에게 조선 왕궁 창덕궁에서 대리청정을 명령한 후 반일 정미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자 일제 통감은 대한국을 불법 병탄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황태자에게 지방을 순행하게 하며 황태자의 대리청정이 아닌 황태자의 2대 황제(1919.1-) 즉위(고조 광무제가 황태자의 대리청정을 명한 것을 이토 히로부미 일본 통감이 황제 양위로 조작)로 왜곡,선전하였다.
 
▲ 웅장했던 경운궁의 옛 모습    

 

▲ 초라한 현재의 덕수궁 모습     © 편집부

1623년 16대 국왕 인조가 경운궁에서 즉위하였으며 1897년 2월 20일 대한국 고조 광무제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대한국 황궁 경운궁으로 이어하면서 대한국 황궁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으며 1900년 궁장 공사가 완성되고 1901년 경운궁과 경희궁,경운궁과 의정부를 연결하는 운교가 가설·개통되었으나 1904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고 1905년 태극전(太極殿)·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
 
경운궁은 경희궁 사이에 후원인 상림원(上林苑)과 궁장(宮墻), 북쪽에 평장문(平章門)과 포덕문(布德門), 영국 공사관 쪽에 생양문(生陽門), 서북쪽에 영성문(永成門)과 회극문(會極門), 서쪽에 평성문(平成門), 서남쪽에 용강문(用康門), 동쪽에 대안문(大安門), 남쪽에 인화문(仁化門)의 대문이 있으며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 중화전(中和殿), 고조 광무제의 침전인 함녕전(咸寧殿),고조 광무제가 등극한 태극전(太極殿), 편전 덕홍전(德弘殿), 어진을 봉안하는 선원전(璿源殿), 황실 도서관 중명전(重明殿), 접견실·연회장인 정관헌(靜觀軒), 고조 광무제의 접견실 구성헌(九成軒), 환벽정(環壁亭), 황태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돈덕전(惇德殿)이 있으며, 
 
황태자 대리청정 명령 후 고조 광무제가 사용한 전각 덕수궁에는 연지(蓮池), 명성황후의 혼전(魂殿) 경효전(景孝殿), 태조 고황제의 어진을 봉안한 흥덕전(興德殿), 순명황후(純明皇后)의 혼전(魂殿) 의효전(懿孝殿), 순명황후(純明皇后) 민씨가 붕어한 석어당(昔御堂), 고조 광무제가 외국 사절을 접견한 준명당(浚明堂), 어진(御眞)·예진(睿眞)을 봉안한 흠문각(欽文閣), 대한국 황실 사무와 근대적 광무개혁을 추진한 궁내부(宮內府), 최고 군통수기관 원수부(元帥府)가 있다.

 

출처 : 고구려저널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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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