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카터 코벨 교수의 네 번째 칼럼입니다

오늘은 존 카터 코벨 교수의 네 번째 칼럼입니다.[4]

 

일본인을 좋아하지만 신뢰하지는 않는다.

 

“매켄지(Mckenzie). 그도 한때는 일본에 우호적이던 지지자였다....  그가 쓴 장문의 글은 도쿄의 신문에 보도되고 그의 뛰어난 능력에 감사하는 사설이 실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조선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깨닫게 된 이후 일본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하루아침에 ‘황색 저널리스트’라는 경멸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랜슬럿 로슨(Lancelot Lawson) 지음,  《극동의 제국들》, 1920년 런던에서 출판)

 

 “매켄지는 선교사가 아닌 외국인 중 유일하게 일본의 요시찰 인물

 이 되어 서울에서 시골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인들이 

 저지르는 짓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됐다....”  (해리슨(E.J.Harri

 son)의 글, 요코하마)

 

 .매켄지가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라고 글을 남겼

 던가?  그야말로 일본이 새로 내놓은 역사책이 거짓투성이임을 확신케 해주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도우려고’ 저지른 한일강제합방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일본 교과서 논쟁이 한참인 1982년 지금 흥미로운 읽을거리다.  여기 인용해 본다.

 

“일본은 조선인을 굴욕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식민정치를 시작했다.  행정적 입장에서는 민(民)과 융합하지 않고는 훌륭한 행정을 도모할 수 없다.  그러나 막무가내에다 어리석은 모욕 아래 그런 융화는 불가능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국가적 이상을 파괴하고, 고래로부터 내려온 관습과 양식을 뿌리뽑고, 조선인은 얼마든지 거저 부려먹을 수 있는 열등한 존재로, 일본인화시키는데 열을 올렸다.

 

그런데 일본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조선인은 과소평가했다...  그들은 유교 교육기관에 위탁해 외교관과 영사들에게 주로 영국과 미국에 대해 가르쳤다.  이들이 모든 반일본적 인물이 되었다...  외교와 사회분야에서 일본은 전 세계를 마치 어린애인 양 취급했다.  일본인은 한 껏 미화하고 조선인은 무능력한 인종으로 세뇌시켰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일본 문명이 세계 제일이라고 믿게 됐다...  조선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그저 노동력 착취 대상인 열등인간으로 대했다.

 

그러다 일본은 조선을 전시장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공들인 건축물이 들어서고 철도가 부설되고,  국가 경제력을 무시한 채 지탱해 나갔다. 그러한 발전은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이용할 수 없는 것들로, 오직 일본인만이 접근 가능하거나 외국인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인이 생각도 하고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도 잊었다.  미성년들은 때리고, 성인들은 엄벌하고 감옥에 보내 몰아세움으로써,  황국신민이 되는 충성을 강요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은 일본이 반역자들을 키워왔음을 자각하게 된 계기였다.  이에 조선문화를 깡그리 섬멸했으며 일본어를 선뜻 배우려들지 않는 조선인들을 족쳤다...

 

”매켄지는 일본 순사가 어떤 집이든 멋대로 수색하고 누구든 재판 없이도 벌주는 것을 썼다.  일본인들은 사람 몸이 견뎌낼 수 있는 물리적 고통의 한계는 ‘하루에 태형 30대(대나무 두 개를 묶어서)씩 사흘 연속 90대가 한도’이고 그 이상은 고통이 극에 달해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계산을 해냈다.  1916년의 공식 보고서에는 8만2121명이 그런 체형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그 후에는 이런 보고서가 출판되지 않았다.  같은 해에 3만2830명이 감옥에 갇혔다.

 

일본이 이른반 불법적인 '불온사상' 으로 여긴 사례 중에는 영국 선교사 게일이 한글로 번역한 키플링의 코끼리 이야기도 있었다.  "코끼리는 두 번째 주인을 따르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는데  일본 당국은 이것이 조선의 아이들에게 두 번째 주인인 천황을 받들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으로 여겼다.

 

은행은 조선인의 토지를 강탈하는 도구였다.  조선은행은 모든 종류의 통화를 관장하면서 조선인의 토지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다.  세금을 내려면 현금을 마련해야 하니 할 수 없이 땅을 파는 조선인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은 자들에게 이전 가격의 20퍼센트 밖에 안 되는 헐값으로 땅을 넘겼다.  이렇게 땅의 원경작자들을 축출하는 것으로 일본은  ‘농업을 개량’했다.

 

난징 대학살도 일본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모양이다.  아마도 일본은 후손에게 일본인들이 갸륵한 이타심을 발휘해 황인종의 문제와 한국사회 저변을 발전시킬 소명을 떠안았던 것이라고 가르치려나 보다.

 

몇 년 동안 나는 칼럼을 통해 일본의 미술사가들이 이미 동아시아의 예술사를 자기네 뜻대로 다시 썼으며,  그에 따라 한국인이 만든 예술품 다수가 일본 예술의 범주에 편입돼버렸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예술사가인 전문가로서 내 이러한 주장은 한국신문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신문은 그보다 더 범위가 넓은 역사, 특히 정치적 관점에서 일본 교과서에 드러난 새로운 왜곡의 문제점을 연일 톱기사로 다뤘다.  이처럼 의도적이든 아니면 예술사적 지적이랏니 무시하든 근본은 같다.  정치는 신문에 1면에 실리고 문화는 4면에 실리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일본이 한국에 가한 잘못 중에서도 최악의 것은 한국문화를 말살해서 한국인이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자신을 비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수년동안 나는 이 칼럼이 한국인 독자들에게 과거 한국의 예술과 문화적 영광으로 자부심을 되찾게 하고 영미의 독자들에게는 과거에 이룩된 수많은 아름다움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되도록 애써왔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중국정치사 전공 사이러스 피크 박사는 제2차 대전 후 패전국 일본의 헌법을 다시 쓰고 전쟁금지 조항을 삽입시켰다.  그러나 역사가로서 내가 기억하는 것은 더욱 긴 기간의 흐름이다.

 

나는 1930년부터 일본어와 그 문화, 역사를 연구해왔기에 일본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안다.  나는 1930년 이래 일본예술사를 진작시킨 공로로 히로히토 천황의 동생 다카마쓰공이 주는 메달과 명예를 받았다.  그러나 시코쿠섬이 해군기지인 것을 모르고 카메라를 지니고 그곳에 갔다가 가택연금되면서 동전의 다른 면도 잘 알게 됐다.

 

나는 시코쿠섬을 멀리 떨어진 연인들의 소풍 장소 정도로 알다가 백인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그 섬에 발 디딘 나를 그들이 매우 수상쩍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일본 헌병은 내가 밥 먹을 때도 옆자리에 앉아 감시하고 심지어는 화장실 갈 때도 따라왔다.  프라이버시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일본인을 아주 고위층부터 하류층까지 다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신뢰하지는 않는다.  역사를 다시 쓴 일본은 그 본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

 

출처: 《부여기마족과 왜倭》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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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