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카터 코벨(Jon Carter Vovell) 칼럼

존 카터 코벨(Jon Carter Vovell: 1910~1996)과 앨런 코벨미국 태생의 동양미술 사학자.

 

 서구학자로는 처음으로 1941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일본미술

 사 박사학위를 받고 1959~1978년까지 리버사이드에 있는 캘리포

 니아 주립대학, 하와이주립대학에서 동양미술사를 가르쳤다.

 

그녀는 일본미술사를 파고들면 들수록 한국의 영향이 절대적이란 것을 깨닫게 되면서 하와이대학을 정년퇴임하고 1978년 65세에 한국에 와서 1987년 75세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한일고대사, 한국미술, 불교, 도자기에 대한 1천여 편이 넘는 칼럼을 썼고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부여기마족과 왜>,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등 5권의 한국문학 관련 영문저작을 냈다.

 

그녀는 "1930년대 내가 처음으로 일본 나라(奈良)와 교토에서 구다라(백제) 관음 등 불상과 법륭사 건축, 회화가 포함된 아스카 불교미술을 보았을 때 그중 20%는 한국에서 직접 들어왔거나 한국의 강력한 영향을 입은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일본미술사와 함께 한국미술사를 가르치면서 일본 아스카예술에 미친 한국의 영향은 95%까지 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녀가 1981년 12월 16일 '코리아타임지'에 쓴 글 -- "내가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사는 가짜였다"

 

아들 앨런 코벨도 도중에 어머니와 합류하여 같이 한국문화를 연구하는 팀이 되어 <한국 샤머니즘의 연구> 등 책을 냈다. 

 

소개할 글은 1982~1983년 존 카터 코벨과 아들 앨런 코벨이 대한민국과 일본의 역사적 진실에 대해 쓴 칼럼을 요약한 것인데 오늘은 존 카터 코벨 박사의 첫번째 칼럼입니다.

 

역사왜곡은 712년부터 이어졌다.

 

일본인이 쓴 글에는 한일관계를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아주 많은데, 한국인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히틀러는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잘 믿는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이 진실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첫 번째 왜곡은 1300여 년 전 씌어진 첫 일본 역사책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라(奈良)의 왜(倭) 지배자들은 일단의 학자들에게 사서 편찬을 의뢰했다. 편찬 목적은 당대의 일왕(日王)들이 정통성을 가진 지배자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역사가들은 369년 가야 부여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문화적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렸다. 히틀러가 말한 것처럼, 거짓말은 클수록 사람들을 속이기가 쉬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 사가(史家)들은 역사를 뒤집고 가야에서 온 부여족이 왜를 정복한 게 아니라,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고 썼다. '일본에서 와서 가야와 신라를 정복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신공(神功)왕후는 사실은 선단(船團)을 이끌고 왜를 침략해 정벌한 강인한 의지의 한국왕녀였다.  369년의 오진(應神)왕부터 게이타이(繼體)왕 이전까지(또는 일본역사에 등장하는 15대 천황부터 25대까지)는 전혀 일본인이 아닌, 순수 한국인 혈통의 왜왕이었다.

 

일본 건국자로 알려진 초대 일왕 진무(神武)는 4세기 부여인들이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해의 여신인 천조대신(天照大臣)은 무당이며, 그녀의 오빠 스사노오노 미코도(素尊)는 신라인이다. 그러나 8세기 역사가들은 이 두 인물에게 일본옷을 입혔다.  20세기에 와서 이들의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역사가들은 사람들을 속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나이 든 부모를 버리는 불효자식 이야기가 있다.  일본인들은 두 세대 전 한국인들에게 한국문화는 열등한 것이라 며 일본말과 일본 이름, 일본식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강권했다. 한국의 수많은 서책이 불에 타 없어지고 예술 활동도 금지됐다.  숱한 보물이 나라 밖으로 실려 나갔다. 석굴암을 해체해 돌 하나하나를 일본으로 옮기려고까지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은 거짓말과 날조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문화적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그러나 진실은 일본이 초기 역사부터 8세기에 이르도록 한국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자란 어린아이였다는 것이다. 정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제 한일강제합방이 ‘한국을 위한 선택’이었으며, ‘한국인들이 원한 일’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역사를 재구성하려 한다.

 

일본이 일으킨 지금의(1982년) 교과서 파동은 첫 단계에 불과하다.  다음 단계는 일본 헌법의 전쟁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셋째 단계에 가서는 천황가를 ‘성스러운 권력체’로 되살린다는 게 일본의 속셈이다.

 

이것이 실현 가능할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집권여당이 된 자민당은 그 이름과는 동떨어지게 보수성과 상업성을 추구하는 정당으로 군림했다. 이제 자민당은 상징적인 존재인 일왕을 실제적인 국가원수로 키우고 싶어한다.

 

자민당 내 헌법조사위원회는 현행 헌법에 대한 다양한 개정안을 마련해놓고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왜곡을 서슴지 않고 헌법에서 전쟁금지조항이 삭제된다는 것은, 1920년대 전후에 그러했듯이 군부 세력의 득세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로 현행 일본헌법 제4조를 삭제하려는 시도는 정세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결정적으로 말해준다.  현행 일본헌법 4조는 ‘천황은 국가적 문제에 결정권이 없다’는 것이다.

 

'신성한 日王’의 부활?

 

1920~30년대에 ‘신성 천황’ 개념은 일본 군부가 녹슨 칼 휘두르듯 내세우던 구호였다. 천황을 손아귀에 넣고 조종하던 군부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현인신(現人神) 천황’의 이름으로 각종 군사조직을 강화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지금(1982년) 그런 것처럼, 교과서 내용을 왜곡했다. 한국과 일본의 건국신화의 시대적 배경은 모두 청동기 문화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신화내용이 엇비슷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건국신화는 일본보다 더 일찍 생겨났다.  한국인들이 석기시대 일본으로 이주해 가면서 우수한 무기와 건국신화도 따라서 이동했다.  이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통된 현상으로, 앞선 문화와 앞선 기술의 무기를 가진 민족은 늘 그보다 못한 민족을 정복했다.

 

역사왜곡 또한 인간이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로 수많은 나라에서 행해진 일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보다 정직한 미술사를 선호한다.

 

중국 역사가들이 남긴 전형에서 보듯, 새 왕조를 연 개국공신들은 언제나 전 왕조를 비난했다.  공산주의 국가는 역사를 아예 사상의 선전도구로 활용했는데, 옛 소련이나 북한이 책을 정직하게 기술하길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에 비해 일본과 서독은 민주국가를 표방한다. 민주국가라는 일본이 한일강제합방이나 난징 대학살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한다면 독일이 히틀러를 영웅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일본의 왕에게 아무 권력도 없던 중세에는 역사가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됐다.  그러나 일본 군부가 아시아를 침탈하는 팽창정책에 천황이 이용되면서, 일본의 교과서는 선전도구가 되고 말았다. 최근 자민당은 일왕을 상징적 존재 이상으로 만들려 노력하고 있어 그 실현은 시간문제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일본인들은 이를 ‘국내 문제’라 할 것이다. 어떤 면에선 그렇다.  불행하게도, 수백만명이 그것이 일본 내 문제가 아닌 세계의 문제’임을 알고도 말할 수 없게 됐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한때 아시아 8개국에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고 여타 국가에도 말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친 ‘세계의 문제’였다.

 

악명 떨치던 일본 경찰

 

일본이 상대적으로 빈곤국가이던 1920년대에도 군국주의의 대두는 그처럼 심각한 것이었다. 이제 일본은 세계 제2의 부국이며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국가로 성장했다.  따라서 군국주의는 백배 더 가공할 사태를 불러올 것이다. 

 

한때 한국인들은 누구나 일본 경찰을 두려워했다.  한낱 동네 경찰이라 해도 일본에서조차 1930년대의 양식 있는 시민에게는 막강한 군부세력의 말단조직원으로 진정 두려운 존재였다.

 

일본에 머물 때의 일이다.  나는 여행길에 배의 상갑판에 올라가 있었다. 그때 “천황의 초상화를 싣고 가는 배의 상갑판에 올라간 것은 불경죄에 해당하니 당장 내려오라”고 해서 억지로 내려서야 했다.  또 말이 날뛰는 바람에 위험에 처한 일왕비에게 뛰어들어 목숨을 구해준 어느 남자는 ‘신성한’ 왕비의 비단옷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손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흔히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일본은 정말 ‘신성(神性)’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중인가.  히로히토 천황이 취미인 물고기 표본에 심취하는 팔순의 멋진 노인으로 남아 있기를 나는 바란다.

출처: 신동아 2005년 5월호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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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