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와 고사의 차이는 뭘까?

지금이야 결혼을 낮에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본래 혼사는 해질녘에 했다. 결혼(結婚)이라는 단어에서 ‘혼인할 혼(婚)’자는 ‘어두울 혼(昏)’자와 통하는 글자다. 예전에는 결혼을 해질녘에 했고, 이는 해와 달이라는 음양의 교차를 통해 남녀 간의 결합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또 결혼과 관련해서 조선중기 성리학이 일반화하면서 나타난 변화 중에 친영(親迎)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신랑이 처가에 가서 신부를 맞아 와 며느리가 시집살이를 하는 방식이다. 여기에서 유래된 말이 바로 ‘시집간다, 시집온다’는 말이다. 친영이 성리학에 의해서 조선중기에 확립된 제도라는 말은 그 이전에는 결혼방식이 달랐음을 의미한다. 이는 현재 ‘장가간다, 장가든다’는 말로 남아 있는데, 다름 아닌 남편의 처가살이다.

실제로 율곡의 부친인 이원수는 신사임당(1504∼1551)의 집인 오죽헌으로 가서 살았지만, 비슷한 시기 허균의 누나인 허난설헌(1563∼1589)은 김성립의 집에서 시집살이를 해야만 했다. 즉 우리 속담에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 한다’는 것은, 사실 우리의 뿌리 깊은 전통이 아닌 조선후기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성리학 이전의 전통과 이후의 차이에는 제사와 고사도 있다. 제사는 맨이즘(manism)에 입각한 성리학의 대표적 조상숭배의식이다. 제사의 주제자 즉 제주(祭主)는 그 집안을 대표하는 남성 가장이며, 이는 자시(23∼1시)에 치러지는 밤의 문화이다. 이에 반해서 고사는 낮에 진행되며, 고사의 주제자는 남성이 아닌 그 집안을 대표하는 여성이다. 즉 여기에는 밤과 낮,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조선 중기에 성리학적인 남성 중심의 친영이 일반화했다는 점에서, 여성주의를 내포하는 고사가 제사에 선행하는 우리의 전통문화라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즉 우리문화에는 여성에서 남성으로의 변화가 존재하며, 그 변화의 핵심에는 성리학의 가부장적 중국문화가 있다는 말이다.

제사와 고사의 차이점 중 하나에는 떡도 있다. 제사에는 백설기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때에는 콩이나 건포도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 백설기는 흰색을 통해서 길상(吉祥)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사용 떡으로 고안됐다. 그러므로 맛을 고려해 콩 등이 사용되는 것은 맞지 않다.

고사에 사용되는 것은 주지하다시피 팥시루떡이다. 팥의 붉은 색은 태양과 불을 상징한다. 때문에 모든 삿된 것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의미로 이해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벽사의 기운이 팥의 붉은 색에 있는 것이지, 팥이라는 재료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같은 붉은 계열의 고추나 황토 역시 벽사에 사용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사는 팥떡으로 모든 삿됨을 정화한다. 그리고 2차적으로는 이 떡을 주변과 나눔으로써 자칫 새로운 변화에 뒤따를 수 있는 불협화음(厄)을 차단하게 된다.

또 고사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돼지머리가 올라간다는 점이다. 이때 돼지는 ‘살인미소’를 발산하는 얼짱 돼지여야만 한다. 때문에 돼지머리는 사후에 잔털을 제거하는 미용을 받고, 성형보정을 통해 스마일 왕자와 같은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런데 왜 하필 돼지머릴까? 거대한 짐승의 잘린 머리란, 너무 섬뜩하지 않은가? 사실 돼지머리를 올리는 것은 고사 상에서 돼지의 귀와 코에 지폐를 말아서 꽂고, 입에 돈을 물리는 것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난다. 즉 돼지머리는 돈을 부르는 상징이다.

돼지를 한자로 돈(豚)이라고 한다. 그래서 돈까스나 한우에 견준 한돈이라는 말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돈이라는 동일한 발음을 통한 언어유희가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자료출처 : 자현 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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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