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련종에서 주장하는 일련 대성인의 역사

일련종의 역사 (日蓮宗의 歷史)

 
一. 일련종이란

 

현재 우리들이 소속되어 있는 종파(宗派)는 일련종입니다. 

일련종은 일련대성인(日蓮大聖人)이 1253년 4월 28일 청징산 산정에서 제목(題目)을 봉창한 때를 입교

개종(立敎開宗)이라고 하며, 이후 750여년이 흘렀습니다.

현재 전 세계에 사원 수 약 5,000(寺), 승려 수 약 8,000(僧), 신도 수 약 380만명(信徒)이라고 집계

되고 있습니다. 

2002년에는 입교개종 750년 경축 법요가 있었습니다만, 하나의 종파가 이처럼 길게 지속된다는 것은,

사실상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늘의 별의 수 만큼 탄생한 종교.  지역, 문화, 시대등의 여러가지 가혹한 조건을 견디고 살아 남아

세계로 퍼져가는 종교는 무섭다 라고도 합니다.

이런 많지 않은 종교 가운데의 하나가 바로 일련종 입니다.

 

일련대성인 스스로 새로운 종파를 건립하고, 일련종이란 이름을 붙인것이 아닙니다. 

종조 일련대성인 입멸 이후는 법화경 지상주의  법화종, 천태종과 구별하기 위한 의미로 일련 법화종,

또는 일련종으로 통칭하였습니다.  현재의 일련종이란 명칭이 확정된 것은, 다음에 설명하겠습니다만,

1876년이 되어서의 일 입니다.

이 후 부터는 일련대성인이 입멸하실 즈음의 일련종의 역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二. 종조 입멸과 본제자 (宗祖 御入滅과 本弟子)

 

종조가 입멸하신 것은 1282년 10월 13일 오전 8시 경의 일입니다.

입멸하시기 수일 전에 본제자 6명을 지명하셨습니다.

 

이 6명이란         일소스님(日昭上人-닛쇼),  일랑스님(日朗上人-니찌로),

                   일흥스님(日興上人-닛코),  일향스님(日向上人-니찌코),

                   일정스님(日頂上人-닛쬬),  일지스님(日持上人-니찌지)입니다.

 

왜, 본제자 여섯명을 지명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우수한 제자가 많고,

각 지의 교선이 넓혀지고 있는 상황도 고려하여,

집단지도체제라고 할수 있는 본제자 제도가 되었다라고 합니다.

 

이 본제자의 제일 처음 한 일은 종조의 장례였습니다. 

종조의 장례순서에 대해서는 일흥스님(日興上人-닛코)이 자세히 기록을 하여 두었습니다. 

본제자 지명에 대해서도 「종조어천화기록(宗祖御遷化記錄)」에 쓰여 있습니다. 

 이 「종조어천화기록(宗祖御遷化記錄)」 의 내용에 본제자는 순서 차제가 없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三. 미노부 윤번제 (身延 輪番制)

 

일련대성인의 묘소가 건립되고, 백개일기(百箇日忌)가 운영된 1283년 1월 구원사 윤번제가

정해졌습니다. 

이것은 종조의 묘소를 매달 교대로 시중을 드는 것을 말합니다.

 

왜, 윤번제가 생긴 것인가,

그것은 일련대성인은 여러가지 박해를 겪었습니다만, 돌아가신 후 묘지 훼손의 의미로 볼때 박해에

해당하는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이런점으로 윤번제를 만들어 종조의 묘소를 지킬 필요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윤번이 구체적으로 어떤것을 하였다라는 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종조의

묘소를 지키는 일이었다라고 생각 되어집니다.  물론, 묘소의 주변정리와 헌화, 경전을 읽어 공양

을 하였을 것입니다. 
 
또 미노부산 구원사라는 절의 유지, 운영하는 것도 당연하였을 것입니다.

 

윤번제는 현재도 새로운 형태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승려만이 아닌, 일반신도도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련대성인의 신앙을 하는 사람은 일생에 한 번은 반듯이 종조의 묘소에 봉사를

해야 하겠습니다.

 
한편, 이 윤번제는 유감스럽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후 부터는 육노승(六老僧-여섯본제자)이 어떻게 포교활동을 전개하고 그것이 어떻게 현재에

이어졌는가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四. 일소스님(日昭上人-닛쇼스님:1221-1323)

 

일련대성인 입멸후,

교단이 중심적 인물인 일소스님(日昭上人)은 당시 정치의 중심지였던 가마쿠라(鎌倉)에 거처를

마련하고 포교에 노력하였습니다.

일소스님(日昭上人)의 내력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일련대성인보다 한살 위로 1221년생이라고 합니다. 

1253년 송엽곡(松葉谷-마츠바가야)으로 일련대성인을 찾아와 제자가 되었고,

변아사리일소(弁阿思利日昭)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습니다.

아사리(阿思梨)라는 호칭은 스승이 될 만한 고승, 교수(敎授)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련성인으로부터 지도자로써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 입니다.

가마쿠라(鎌倉)에서 교단의 지도적 입장 이었습니다. 

일소스님(日昭上人)의 활동중심인 절(寺)은 법화사(法華寺)이며, 소재지인 빈토(浜土-하마토)라는

이름에서 빈문류(浜門流-하마몬류)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五. 일랑스님(日朗上人-니찌로우쇼닝:1241-1323)


언제 일련대성인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대국아사리일랑(大國阿?梨日朗)이라고 하는 이름을 받았고, 본제자로도 지명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신뢰가 두터운 제자 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일소(日昭)스님은 백부(伯父)가 되고, 일상(日像)스님과는 의붓동생(異父弟),

지상종중(池上宗仲-이케가마무네나카)씨와는 종형제(宗兄弟,사촌)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행동거점은, 겸창(鎌倉-가마쿠라)의 비기능본(比企能本)의 저택자취(屋敷跡)라고 불리는 묘본사

(妙本寺), 일련대성인이 돌아가신 장소인 지상종중(池上宗仲-이케가마무네나카)씨의 자취에 본문사

(本門寺)등을 건립하였고, 또 평하(平賀-히라가)의 본토사(本土寺)를 중심으로 교선을 넓혔습니다.

일랑문류(日朗門流-니치로몬류)라고 부릅니다. 


六. 일흥스님(日興上人-닛코쇼닝:1246-1333)

 

일흥스님(日興上人-닛코쇼닝)은 1257년경 일련대성인이 입정안국론의 집필을 위해 암본 실상사

(岩本實相寺)에서 연구하고 있을때 제자로 받아들여졌다고 전해집니다.  백련아사리일흥(白蓮阿思梨

日興)이라고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상당히 성실한 승려였습니다.  일련대성인이 입멸하실때 윤번봉사

에도 힘쓰셨습니다.

덧붙여 말하면,

일부 문류(門流)에서는 일련성인의 지명(指名)에 의해 1283년경 부터 일흥스님은 미노부총관주

(身延總貫首)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그 당시도 지금도 미노부에는 총관주(總貫首)라는

지위는 없습니다.  미노부산(身延山)의 주지(住職)는 별당(別?)으로 불리고, 현재에는 법주(法主)

라고 말합니다. 

일흥스님의 신뢰가 두터운 제자의 서물(書物)에도 미노부에 장기간 상주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런 부분들의 것에서부터도 일흥스님이 일련성인의 지명에 의해 미노부의  주지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1288년 12월 미노부를 떠나,

1290년에 대석사(大石寺)를 창건하고, 1298년에는 바로 근처에 중수(重須)에 북산본문사

(北山本門寺-키타야마혼몬지)를 건립, 1333년 2월 8일 돌아가실때 까지 36년에 걸쳐, 북산 본문사

(北山本門寺-키타야마혼몬지)에서 포교와 제자의 육성에 정열을 쏟았습니다. 

일흥스님이 돌아가시고, 그 제자들의 계통(系統)을 부사문류(富士門流-후지몬류)라고 말합니다.


七. 일향스님(日向上人-니찌코우쇼닝:1253-1314)

 

일향스님은, 1264년에 일련성인이 고향의 안방(安房-아와)에 돌아가 모친의 병간호를 할 때에

13세의 나이로 제자로 들여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련성인의 단신도(檀信徒) 교화(敎化)의

방법은 편지에 의한 것이 많습니다만,

당시는 우편제도 등이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편지를 전달하고, 답장을 받아오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러한 역할을 주로 맡은 분이 일향스님입니다. 

현재에도 남아있는 일련대성인의 편지중에는,

이 편지를 가지고 간 일향(日向)에게 자세히 들어주십시오등의 말씀이 잘 쓰여있습니다. 

스승 도선방(道善房-도젠보)이 돌아가셨을 때 일련성인은 『보은초(報恩抄)』를 쓰셨습니다만,

그것을 지니고 추선(追善)을 위해 묘지앞에서 낭독을 한 대역을 하신 분도 일향스님이셨습니다. 

본제자 6명 가운데 좌도아사리일향(佐渡阿?梨日向)이라고 지명되어있습니다.

일련대성인입멸후에는, 고향의 무원(茂原-모바라)에서 포교에 전념하셨습니다만,

1287년경 일흥스님과 함께 종조의 묘지를 지키기 위해 미노부에 들어가셨습니다. 

일향스님은 굉장히 온화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분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313년까지 26년간에 걸쳐 별당(別堂) 즉, 주지(住職)로 미노부 구원사의 발전에 힘쓰셨습니다. 

익년 고향의 무원(茂原-모바라)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일향스님(日向上人-니찌코우상인)과 관계된 문류를 신연문류(身延門流-미노부몬류)라고 말합니다.

 

八. 일정스님(日頂上人-닛쬬우쇼닝:1252-1317), 일지스님(日持上人-니찌지스님:1250-?)


일정스님(日頂上人)은, 靜岡縣 重須 (시즈오카현 오모스)에서 태어나, 후에 일련성인의 유력

단월(檀越)의

富木常忍(도키죠닌)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당시의 천태종(天台宗)이었던 진간홍법사(眞間弘

法寺)에서 출가(出家)하였고, 일련성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굉장한 자질(資質)을 타고나, 일련성인도 무척 칭찬을 하셨다고 합니다. 육노승(六老僧)의 한

사람으로 지명(指名)되고,윤여아자리일정(尹予阿自梨日頂)이라고 불렸습니다.  

富木常忍(도키죠닌)이 개종(改宗)시킨 홍법사(弘法寺)에서 포교에 힘쓰셨습니다. 

어떤 연유인지 富木常忍(도키죠닌)과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고, 1293년에 홍법사를 떠나 고향의

重須(오모스)에 돌아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후에는 북산본문사(北山本門寺)의 학두(學頭)로 생을 마쳤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지스님(日持上人)은, 같은 靜岡(시즈오카) 출생이지만, 15세 즈음에 득도(得度)하여 암본실상사

(岩本實相寺)에 들어가, 일흥스님(日興上人)의 교화(敎化)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일흥스님(日興

上人)에게 이끌려 21세에 1270년에 일련대성인의 제자가 되었고, 연화아사리일지(蓮華阿思梨日持)

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일지스님(日持上人)은 일련대성인의 제 7회기(第七回忌)에 다른 한사람과 함께 원주(願主)가 되어

종조상(宗祖像)을 조립(造立)하였습니다. 이 상(像)이 일련성인의 가장 오래된 상으로, 중요문화

재로 지정 되었고, 지상본문사(池上本門寺)에 격호(格護)되어 있습니다.

일지스님(日持上人)에 관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국제포교(國際布敎)입니다. 일련성인의 제13회기를

한달 빠르게 1294년 9월 13일에 지내고, 명일(命日)인 10월 13일에는 구원산에 올라 예배를 한후

종조(宗祖)에게 이별을 고하고, 제자들과의 동행을 뒤로하고 단신(單身)으로 다음해인 1295년

1월 1일에 靜岡(시즈오카)를 출발하여 국제포교의 여정에 올랐습니다.  46세때의 일입니다.

그 후의 일지스님(日持上人)의 족적은 잘 알수 없습니다만, 북쪽을 향해 출발하여,

북해도(北海道)를 통해 중국대륙(中國大陸)에 들어가게 된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일련종 최초라는 것 뿐만 아닌, 일본최초의 국제포교였던 것입니다. 

이후 일련종에서는, 靜岡(시즈오카)를 출발한 날을 명일(命日)로 삼아 일지스님(日持上人)의

공양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들이 하와이, 북미, 남미등의 해외 포교와 수행이 가능하게 된 것도 일지스님(上人)

이 첫 발을 내딛은 덕분입니다. 

일지스님(日持上人)의 연(緣)이 있는 절은 연영사(蓮永寺)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정스님(日頂上人)과 일지스님(日持上人)의 공통된 점은, 다른 본제자(本弟子)들과

다른 독자의 문류(門流)를

형성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후에 富木常忍(도키죠닌)이 독자의 문류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九. 부목상인(富木常忍-도끼죠닝:1214-1299)

 

富木常忍(도끼죠닝)은 가장 오래된 일련대성인의 신도(信徒)였습니다. 

千葉氏(치바씨)의 사무관으로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현존하는 일련대성인의 서장(書狀)은 31통을 헤아리고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富木常忍(도끼죠닝)의 가장 큰 공적(功績)은, 이런 대성인의 서장등등의 가르침을

소중히 수집(收集)하고, 후세(後世)에도

보존(保存)하도록 엄명(嚴命)을 내린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지금의 우리들은 많은 일련대성

인의 유문(遺文)을 배견(拜見)할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대단히 귀중한

일이었습니다.

富木常忍(도끼죠닝)은 일련대성인 입멸후(入滅後)에, 스스로 상수원일상(常修院日常)이라

칭하고, 주거(住居)를 사원으로 하여 포교활동에도 전념하였습니다. 

일상스님(日常上人:니찌죠쇼닌=富木常忍:도끼죠닝)이 돌아가신 후에도, 많은 인재(人材)를

배출(輩出)하고 중산문류(中山門流-나까야마몬류)로 발전하였습니다. 

중심 사원은 중산 법화경사(中山 法華經寺-나까야마호케쿄지)로,

기도수법(祈禱修法)의 영지(靈地)로 유명합니다.   


근대(近代)까지의 전개(展開)


일본의 역사를 짚어보면,

일련대성인이 태어난 근대(近代)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무가정권(武家政權)이 성립하여

무사(武士)가 실권(實權)을 거머 줜 시대(時代)였습니다.  도중에 정권교대(政權交代)가 일어나

혼란(混亂)이 생기기도 했습니다만, 무사(武士)의 시대는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가마쿠라(鎌倉) 막부(幕府)후, 정권(政權)을 손에 넣은 무로마찌(室町) 막부(幕府)는 15세기말부터

약화되어 약 백년에 걸친 전란(戰亂)의 시대에 돌입하게 됩니다.

이 혼란을 수습하고 전국 통일을 하여 최종적으로 실권(實權)을 장악한 것이 도쿠가와이에야스

(德川家康)로, 이때부터 약 300년에 걸쳐 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이때까지 비교적 자유롭게 포교(布敎)가 가능하였던 불교계는 도쿠가와 막부의 아래 정치체제(政治

體制)에 편입되어져 완전히 관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크리스트교의 포교를 금지하기 위한

것등을 목적으로 하였고, 모든 민중(民衆)이 사원(寺院)의 단가(檀家)로 등록 하는 것을  의무화

하였던 것입니다. 

즉, 사원(寺院)은 관청(官?:役所)과 같은 역활을 떠 맡게 된 것입니다.

관청(官?:役所)과 같은 사원(寺院)이 늘었다가 줄었다가 하는 것은 막부(幕府)로서는 관리상 부적절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새로운 사원을 세우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 법률이 발포될 것을 알게 된

불교측은, 관리받을 수 있는 관청이 필요한 주민들의 협력을 받아 급하게 많은 사원을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일본 대부분의  사원은, 17세기 초 바로 이 시기에 건립된 것입니다. 

이 처럼 막부(幕府)의 체제(?制)에 편입된 불교계는, 어떤 의미로 안정은 되었을지 모르나,

포교(布敎)의 성과를 올리는 것은 곤란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련종의 역사 (日蓮宗의 歷史)


일련종(日蓮宗)의 성립(成立)


앞에 말한것과 같이 일련성인의 제자들은 다섯개의 문류를 형성하고 절차탁마(切?琢磨)하여

포교에 힘썼습니다.

각각의 문류(門流)중에는 분파독립(分派獨立)하는일이 있거나, 또는 문류동사(門流同士)가

교류(交流)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로 완전히 다른 종파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포교(布敎)뿐만이 아니라, 가르침에 관하여 연구(硏究)와 논쟁(論爭)도 중세 이후

활발하게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한가지의 예(例)가 본적승렬논쟁(本迹勝劣論爭)입니다. 


이것은, 법화경(法華經)의

전반(前半)14장(章)인 적문(迹門)과 후반(後半)14장인 본문(本門)을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것 입니다.

법화경(法華經)을 하나의 경전으로 전부를 중요하게 신앙(信仰)하는 것을

일치파(一致派)라고 하고, 적문과 본문에는 중요성이 다름이 있는것을 구별하는 것을

승렬파(勝劣派)라고 하였습니다. 

커다란 논쟁이 되어, 문류에서 분파독립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만,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합쳐도 승렬파(勝劣派)는 꽤 소수파 였습니다. 


불교사원을 지배체제에 완전히 편입시킨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가 1868년에 도괴 (倒壞하고,

메이지시대(明治時代)가 시작 되었습니다.

메이지막부(明治幕府)는  

신도(神道)를 국가종교(國家宗敎)로 채용(採用)하기 위해 불교탄압(佛敎彈壓)을

시작 하였습니다. 

그 시작이 불교 각 종파의 통합(統合)이었습니다. 

1872년에 일련성인을 종조(宗祖)로 신앙(信仰)하는 교단(敎團)은,

문류(門流)나 승렬(勝劣), 일지(一致)등의 교의(敎義)와는  관계없이 모두

일련종(日蓮宗)으로 통합시켰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통일된 종명(宗名)은 이때까지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종명(宗名)을 통일(統一)시켰다 하더라도

교의(敎義)나 조직내부(組織內部)까지 통일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종단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메이지막부(明治幕府)는 이런 점을 곧 알게 되었고, 각 파 별로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1874년 일부가 일련종승렬파(日蓮宗勝劣派)로 독립하고,

남은 다수의 파(派)는 , 일련종일지파(日蓮宗一致派)라고 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지파라는 이름으로는 어느쪽이 원류(原流)인지 본류(本流)인지 모르게 되는

등의 문제가 생기게 되었고,

이런 연유로  막부(幕府)에 개명(改名)을 신청하여 1876년에 일련종이라는 명칭으로 되돌아

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엄밀한 의미로 현재의 일련종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노부 구원사를 총본산으로 정하고, 대본산본산말사(大本山本山末寺)의 조직이

굳어져 가게 되었습니다. 

한편? 승렬파 쪽은 흥문파(興門派), 묘만사파(妙滿寺派), 본성사파(本成寺派), 팔품파(八品派),

본륭사파(本隆寺派)의 다섯으로 분파 독립하였습니다.

묘만사파(妙滿寺派)는, 본문종(本門宗(興門派))과 함께 1941년에 일련종에 합동되었으나,

1947년에 다시 독립하여, 현재는 현본법화종(顯本法華宗)이 되었습니다.

·본성사파(本成寺派)는, 팔품파(八品派)와 본륭사파(本隆寺派)와 함께 한때 합류하였습니다만,

현재 법화종진문류(法華宗陣門流)가 되었습니다.

팔품파(八品派)는, 다른 두 파와 합류했다 다시 독립하여, 법화종본문류(法華宗本門流)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본문법화종(本門法華宗)이 다시 분파하였습니다.

본륭사파(本隆寺派)는, 다른 두 파와 합류하였다가 후에 독립하여 법화종진문류(法華宗眞門流)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흥문파(興門派-후지파)입니다만,

1899년에 일련본문종(日蓮本門宗)이 되었고, 다음 해 1900년에는 일련종후지파(日蓮宗富士派)가

분파하였습니다.

이 후지파(富士派)는 1912년에는 일련정종(日蓮正宗)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련정종이 된 곳은 대석사(大石寺), 하조묘련사(下?妙蓮寺)의 계통뿐이고,

이 외의 다른 사원은 현재의 일련종에 1941년에 합동(合同)하였습니다. 

북산본문사(北山本門寺), 소천구원사(小川久遠寺), 이두실성사(伊豆實成寺)의 계통은

현재에도 여전히 일련종 사원입니다.

그러나, 보전묘본사(保田妙本寺)는 1957년에 일련정종으로 이동하였다가, 1995년 독립.

서산본문사(西山本門寺)는 1957년에 단립(單立)하였습니다. 

교토요법사(京都要法寺)도 1950년에 일련본종(日蓮本宗)으로 분파하였습니다.


기사출처 : 일련종의 역사       작성 : 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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