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적, 신을 죽인 자, 저주받은 ‘유대인’
중세에는 유대인을 강제적으로 특정 장소에 모여 살도록 했다. 이 장소가 유대인의 군집 지역인 게토다
2500년 전부터 유대인은 유럽인과 역사를 공유했다. 그럼에도 유대인과 유럽인은 오랫동안 적대 관계 속에서 살았다. 유대인과 함께 사는 것이 금지된 시기는 1179년부터였다.
14세기부터 유럽에서는 유대인을 강제적으로 어떤 특정 장소에 모여 살게 법으로 정했다. 이 장소가 바로 유대인들의 군집 지역인 게토Gehtto다.
게토라는 말은 수상 도시인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유래하였다. 독일어로는 유덴가세Judengasse라고도 하는데 ‘유대인이 모여 사는 골목’이라는 뜻이다. 유대인은 성곽이나 시장 가까이에서 게토를 이루어 살았다.
유대인은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그리스도 교도들이 사는 땅에서는 살 수 없었다. 유대인은 게토 안에서만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만 자유를 보장받았다.
게토 밖으로 나오면 유대인은 특별한 옷이나 표징으로 자신이 유대인임을 표시해야 했다. 볼 일이 있을 때는 성내로 들어갔지만 머무는 시간을 엄격하게 지켜야 했다. 낮에 모든 용무를 마치고 밤 10시 안에 반드시 다시 게토로 돌아가야만 했다.
아예 게토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스도교 축제일이나 일요일은 성 안에서 유대인이 돌아다니면 절대 안 되는 날이었다.
게토에 사는 유대인의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늘어났다. 사료에 나오는 통계를 보면, 1463년 프랑크푸르트의 게토에는 110명, 1520년에 250명, 1580년에 1200명, 1610년에는 무려 2770명으로 늘어났다.
유럽인이 유대인에게 붙여준 명칭도 고약했다. ‘우물에 독약 넣은 이’ ‘인류의 적’ ‘신을 살해한 자’ ‘종교제식 살인자’ ‘고리 대금업자’ 등이다.
‘우물에 독약 넣은 이’라는 별칭은 14세기 중반에 페스트가 전 유럽을 강타했을 때 붙여졌다. 유럽인들은 그들이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에 유대인들이 몰래 독약을 넣어서 전염병이 창궐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터무니없는 오해로 인해 1349년 2월 2일부터 24일까지 독일 튀링엔 주에 살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맞아 죽었다는 자료가 남아있다.
이런 부정적인 이름이 유대인에게 붙여진 이유는 메시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민족이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 때문에 수많은 세월 동안 그리스도 교도들은 유대인을 일방적으로 모함하고 박해를 가했다.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펴다가 나중에는 마녀와 동등한 죄목으로 다루면서 무자비하게 죽였다.
역사학자 뤽에 의하면 13세기 말경 중세유럽에서 약 5000명가량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유럽에 페스트를 퍼뜨린 것으로 오해 받기도
종교개혁가인 루터조차도 1543년 『유대인들에 관하여 그리고 그들의 거짓말』 이라는 책을 썼다. 루터의 개혁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신교도의 개혁에만 머물렀다. 그 이상은 뛰어넘지 못했다. 그도 여전히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에 차별성을 두고 있었다.
1242년 파리에서는 스물네 개의 말 수레에 유대교 서적을 잔뜩 싣고 왔던 종교개혁가들이 하루 만에 유대교 서적을 불살라 버렸다. 유대인 출신의 유명한 학자 마이어 폰 로텐베르크는 분노하면서 반발했지만 결국 살해당했다.
그를 죽인 것은 분노한 군중이 아니라, 파리 대학의 학문과 지성을 갖춘 학자들이었다.
성서에 따르면 어차피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느님의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누가복음 9장22절 참조).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른 구원사업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누구 손에 죽든지 간에 예수는 일단 십자가를 짊어지고 한 번 죽어야 했다.
예수를 배반했던 유다도 마찬가지다. 유다가 예수를 배반해야만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힐 동기가 제공되는 것이다. 유다는 본인의 의지에 의해 예수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오히려 예수의 길을 도와준 것이다. 요즘 유럽에서는 유다에 대해 다른 해석을 시도하는 학자들이 많다.
유다는 배신자가 아니라 예수가 신神인 아버지의 뜻에 따른 지상과제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조력자라고 말이다.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다음 예를 들어보자. 어느 성당에서 예수가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장면을 극화한 어린이극을 올리기로 했다. 한 꼬마가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에 방을 얻으러 오면 ‘방이 없다’고 말해야 하는 여관집 주인 역을 맡았다.
그래야 요셉과 마리아는 여관방을 구하지 못하고, 성서대로 예수를 마구간에서 낳을 수 있다. 드디어 막이 오르고 그들이 방을 얻으러 왔다. 꼬마 여관 주인은 ‘요셉과 마리아’가 불쌍해서 동정심이 인 나머지 그들에게 ‘방이 있다’ 고 말해 버렸다.
그 결과가 어떠했겠는가? 연극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을 배신하고 죽였다는 이유로 유대인을 핍박한다면 이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종교적 싸움이라는 것이다. 종교개혁가인 위대한 루터조차도 같은 오류를 저질렀다.
모함인가 복수인가, 살인제식에 연루된 유대인들들
종교학적인 관점은 여기서 일단 접고 유대인의 살인 종교의식에 관한 자료를 보자. 핍박과 수모를 당했던 반작용 때문인지 유대인 역시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12세기의 기록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유대인의 종교의식이 나타난다. 이들은 예수를 모독하려는 의도로, 축성된 성체를 훔쳐서 종교제식에 사용하였다. 이런 행위를 들켜 고문을 받고 살해당한 사례도 있었다.
전설적인 살인제식에서 유대인이 그리스도교 어린이를 유괴하여 십자가에 박아놓고 그 아이의 피를 짜냈다는 기록도 있다. 아이 몸에서 짜낸 피는 유대인 종교축제와 의약용으로 사용했다. 인간의 피에 마술적인 힘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이들은 특히 기독교갓난아이와 어린아이를 유괴해서 비밀스러운 제식을 올렸다.
제식이 끝나고 죽은 아이를 먹기도 하고, 아이들의 피를 거룩한 안식일인 토요일에 마셨다는 기록도 있다. 믿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이다.
부활절이 다가올 즈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 교도를 유괴하여 예수처럼 신성 모독적인 방법으로 십자가에 달거나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피를 흘리게 해야만 언젠가 유대인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기괴한 이야기는 여러 자료를 통해 사실로 입증되었다. 15세기에 메르클린이라는 유대인이 법정에서 자백을 했는데 그는 그리스도 교도의 피를 뽑아서 약제용으로 사용했다.
간질병에 걸린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다는데 이 유대인 가족은 그 후 산채로 불에 태워지는 형벌을 받았다.
유대인의 살인의식에 관한 프랑크 마이어의 보고를 보면 1144년 영국, 1171년 프랑스, 1182년 스페인, 1235년 독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유대인의 제식에 희생되었던 사람의 이름도 아직까지 전해져온다. 1287년엔 베르너와 바카라흐, 1475년엔 시몬 트리엔트, 이 둘은 지금도 순교자로 숭배 받고 있다. 1391년 독일의 샤펜하우젠에서는 살인제식에 연루된 유대인 30명이 처형당했다.
프랑크 마이어는 유대인 종교의식이 얼마나 잔혹하게 진행되었는지를 1429년 라벤부르크에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 언급했다. 그때 비참하게 희생되었던 소년을 기리고 기념하는 경당이 지어졌는데
오늘날에도 그곳에는 순례객이 찾고 있다.
15세기에 유대인의 살인제식에서 희생되었던 안드레아스와 시몬이라는 두 어린아이는 전문가의 감정 끝에 사실이 밝혀져 복자 품에 올랐다.
123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부근 풀다에서도 살인제식의 혐의가 나타났다. 축제날인 성탄전야에 5명의 어린이들이 화재가 나서 불에 타 죽었다. 그 중 2명을 유대인이 미리 살해해서 약제용으로 쓰기 위해 피를 담아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사람들은 그 지역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짓이라고 단정했다. 우연히 그 지역에 있었던 십자군이 나서서 12월 28일 34명의 유대인을 색출해서 불에 태워 죽였다. 유대인의 살인제식 때문에 12세기말 프랑스에서도 재판이 진행되었다. 프랑스 법정은 유대인 남자 34명과 17명의 유대인 여자에게 개종을 강요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다면 자유를 허락해 주겠다는 유혹도 곁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개종을 거부했고 결국 화형을 당했다. 유사한 시기에 스페인에서도 80명의 유대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장작더미 위에서 태워 죽인 일이 발생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살인제식을 유럽인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유대인들에게 살인제식을 중지하라고 호소했지만 유대인들은 아랑곳없이 유럽 전역으로 이 제식을 확산해 나갔다고 중세의 기록은 전한다.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이 문제를 일으키자, 전면적인 유대인 학살이 11세기말에 시도되었다. 유대인에게 그리스도교로로 개종하든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든지 양자택일하라고 엄포를 놓았는데 대부분 유대인이 의연하게 죽음을 선택했다.
그들은 제 손으로 아이들을 먼저 죽이고 난 후 자결했다. 유대인 아이들이 그리스도 교도 손에 죽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1283년 마인츠에서는 10명의 유대인이 군중 폭도에 의해 린치를 당하고 죽었다. 뮌헨에서는 180명의 유대인이 죽임을 당했고, 독일어권 도시에 살았던 1만 7000여 명의 유대인이 쫓겨났다.
이들이 간 곳은 동유럽이었다. 폴란드로 간 유대인들은 성대한 환대를 받고 정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거기서도 1500년~1800년에 살인제식으로 인한 89건의 고발과 재판이 진행되었다. 여기서 250명 가량이 사형 당했다.
시간이 훨씬 흐른 1800년이 되어서도 유대인의 살인제식에 관한 의심은 근절되지 않았다. 1891년 한 도시에서 어린이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때 의심받았던 이는 푸줏간 일을 하던 유대인 아돌프 부쉬호프라는 사람이었다. 1892년 4월 고발당한 그는 160명의 증인들에게 둘러싸여 심문을 당했지만 완벽한 알리바이를 증명해 그 해 7월 풀려났다.
그렇지만 그가 법정을 나오기도 전에 군중들은 그가 살았던 집을 부수어 버렸다. 더 이상 푸줏간을 경영을 할 수 없었던 그는 끝내 다른 곳으로 떠나야만 했다.
18세기까지 서유럽에서 극심한 차별대우를 받았던 유대인들은 1800년에서 1914년까지 동유럽에서 또 다시 무서운 적대감의 표적이 되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유럽 전 지역에서 비방과 중상모략, 박해 그리고 결국은 추방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수세기 간 이어진 유대인에 대한 혐오가 20세기 인류사에는 또 하나의 비극적인 자취를 남겼다. 바로 나치다. 이 민족적이고 혈통적인 악감정이 생긴 근원은 종교와 종교 간의 반목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자기 민족이 선택한 종교만이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면서부터 생긴 무서운 혐오였다. 그 이면에는 실제 종교적인 문제뿐 아니라 서로간의 권력 확보를 위한 복선도 적지 않게 깔렸다.
그것은 곧 밥줄의 문제로 이어졌다. 중세유럽의 역사를 보라. 종교가 권력과 의기투합하여 저질렀던 죄악이 얼마나 많은지! (중세의 뒷골목 풍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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