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 후 불과 반세기 만에 쓰인 이 편지는 군관(軍官) 남편 나신걸이 고향의 아내 신창맹씨에게 보낸 애틋한 사연이었다.
흙 속에서 찾아낸 500년 전의 애틋한 언어 보물 나신걸 한글편지
2011년 5월 한 여성의 묘에서 500년 넘게 잠들어 있던 한글 편지 두 장이 발견되었다. 한글 창제 후 불과 반세기 만에 쓰인 이 편지는 군관(軍官) 남편 나신걸이 고향의 아내 신창 맹씨에게 보낸 애틋한 사연이었다. 흙 속에서 되살아난 이 보물은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한글 편지일 뿐만 아니라 15세기 조선의 농경 생활과 부부의 일상, 문자의 힘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귀중한 기록 유산이다.

00.한글편지 앞장 01.한글편지 뒷장
2011년 5월 3일 대전 유성구 금고동의 안정 나씨 묘역에서 낡은 종이 묶음이 발견되었다. 묘의 주인은 세조 때 무신 나연종(羅蓮宗, 1443~1488)의 며느리 신창 맹씨(新昌孟氏)였다. 그녀의 복식을 수습하던 중 머리 맡에서 한글로 쓴 편지 두 장이 나왔다. 생전에 남편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평생 간직했다가 사후에 함께 묻은 것으로 보인다.
이 한글 편지는 현재까지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편지로 인정받는다. 작성자인 남편 나신걸(羅臣傑, 1461~1524)의 생몰년으로도 시기를 짐작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근거는 편지 속 “영안도(永安道) 경성 군관으로 간다”라는 내용이다. 조선 성종 때 이시애의 난 때문에 1470년에 함경도를 영안도로 개칭하였고, 1498년에 다시 함경도로 환원되었다. 따라서 이 편지는 1470~1498년, 즉 15세기 후반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글 창제(1443)로부터 불과 반세기 후에 쓰인 것으로 그 자체로 귀중한 유산이다.
첫 번째 편지에는 가족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과 군관으로서 고뇌가 담겨 있다.
“안부를 그지없이 수없이 하네. 집에 가 어머님이랑 아기랑 다 반가이 보고 가고자 하다가 장수가 혼자 가시며 날 못 가게 하시니, 못 가서 못 다녀가네. 이런 민망하고 서러운 일이 어디에 있을꼬? 군관 자리에 자망(自望)한 후면 내 마음대로 말지 못하는 것일세.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을 구태여 가면 병조(兵曹)에서 회덕골로 사람을 보내 잡아다가 귀양 보낸다 하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꼬? 아니 가려 하다가 못하여 영안도(永安道) 경성(鏡城) 군관이 되어 가네.”
‘자망(自望)’은 문맥상 상급자의 명령으로 강제로 임명된 상황으로 보인다. 그는 고향 회덕에 잠시 들르길 원했으나 상급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군대를 무단으로 이탈하면 귀양을 갈 수 있기에 어쩔 수 없이 함경도로 떠나며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꼬, 울고 가네”라며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담히 써 내려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편지는 농사와 살림살이에 관한 구체적인 전달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전지는 다 소작 주고 농사짓지 마소. 봇논 모래 든 데에 가래질하여 소작 주고, 절대로 종의 말 듣고 농사짓지 마소.”
“다랑이 순마니 하는 논에 씨 열여섯 말, 이필손의 논에 씨 일곱 말….”
이는 당시 지주층이 토지를 소작 형태로 운영하던 현실을 보여준다. 논마다 붙은 이름, 씨앗의 분량, 소작인의 이름까지 세밀히 적은 구절은 15세기 조선 농촌의 삶을 고스란히 증언한다. 편지 뒷부분에는 아내에게 보내는 작은 선물과 함께 집에 가지 못하는 서러운 사연이 다시 이어진다.
"또 분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가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꼬, 울고 가네. 어머님과 아기를 모시고 다 잘 계시소. 내년 가을에 나오고자 하네."
‘분(粉)’과 ‘바늘’은 단순한 생활용품을 넘어 여성의 품격과 가정의 체면을 상징하는 귀한 물건이었다. 멀리 북녘 땅으로 떠나는 남편이 굳이 아내를 위해 분과 바늘을 사서 보냈다는 사실은 그가 아내의 마음을 세심히 헤아린 다정한 남편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편지는 500여 년 동안 흙 속에 묻혀 있다가 2011년 세상에 드러났다. 한지에 쓰여 있어 부식이 진행됐지만 상당 부분은 판독이 가능했다. 이 자료는 15세기 한글이 책(간본)이 아니라 실제 생활 속에서 어떻게 쓰였는지(필사)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2023년 당시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이 이 자료를 국가지정 보물로 승격시킨 이유다.
편지를 받은 신창맹씨 역시 한글을 완벽히 이해하고 사연을 수행했을 것이다. 이는 한글 창제 불과 수십 년 만에 여성 독자층 속으로 한글이 깊숙이 퍼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인 “날마다 편안하게 쓰게 함[便於日用]”이라는 세종의 정신이 이 한 통의 편지 속에서 실현된 셈이다. 신창맹씨가 남편의 편지를 죽어서까지 간직했다는 사실은 한글이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라 사랑과 기억,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매개체였음을 말해 준다. 출처 : 배영환(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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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