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신문으로 보는 개항 이후 음식 이야기 7

일제 강점기 예술인들이 모인 다방

근대 신문으로 보는 개항 이후  음식 이야기 7

일제강점기 예술인들이 모인 다방

우리나라에서 다방은 고려 시대부터 있었는데 국가 기관으로 외국 사신을 접대 하는 등의 일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 1910년대에도 다방은 국가 기관의 성격이 강했다. 1920년대부터 다방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는 서울에 많은 다방이 생겼다. 조선인을 상대로 하는 다방은 예술가들이 많이 개업했고, 그런만큼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낙랑팔라는 화가 이순석의 아틀리에를 겸한 다방이었고, 시인 이상도 제비등 여러 다방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다방은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고, 해방 후 1960년대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이익을 추구하게 되었다.

다방은 여러 가지 차, 커피 또는 음료수를 파는 장소이다. 다방이 등장하게 된 것은 차가 상용 되었기 때문인데, 대체로 동양 3국에서는 8∼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차를 마셨다. 고려 시대에 다방(茶房)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고려 시대의 다방은 차와 술·과일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국가 기관이었다. 조선 시대는 이것이 이조(吏曹)에 속하는 일이었고, 차례(茶禮)라는 명목으로 외국 사신들의 접대를 맡았다. 조선 시대에 민간에서는 손님 접대용으로 차보다 술을 많이 사용한 까닭에 다방 대신 술집이 발달하였다.

개항하면서 커피와 홍차 등이 보급되고 이러한 양차를 파는 곳이 근대 다방의 시초가 되었다. 한국에서 최초의 근대적 다방은 인천의 대불호텔에 부속 된 다방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울에서 최초의 다방은 1902년 독일계 러시아인 손탁(孫澤, Antoinette Sontag)이 정동에 지은 손탁호텔의 다방이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는 1910년 이후 이윤을 목적으로 일본인들이 다방 즉 끽다점(喫茶店)을 여는데 1913년 남대문역에  남대문역 다방이 문을 열었다. 1923년을 전후하여 근대적 의미의 다방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명동의  후타미(二見)와 충무로의 금강산이라는 일본인 소유의 다방이 최초다. 특히 후타미는 식당과 겸업이 아닌 다방을 전업으로 하는 근대적 다방의 원조였다.

조선인들도 다방을 개업했다. 1927년 이경손(李慶孫)이 관훈동 입구에 카카듀라는 다방을 개업했다. 이경손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감독으로 춘희, 장한몽 등의 영화를 제작했다. 1928년에는 배우 복혜숙이 종로 2정목에  삐너스를 개업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던 날, 종로 2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회관 근처에 멕시코다방이 개업했는데, 주인은 배우 김용규(金龍圭)와 심영(沈影)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종로의 멕시코와 뽄 아미, 대한문 부근에 낙랑팔라가 개업했다. 1930년대 다방 즉 끽다점은 그 수도 많았고, 장치나 음악도 고급화 되었다.

다방의 발전에 대해 『동아일보』1936.03.24. 「춘일수상(1) 홍차 한잔의 윤리」라는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36년 3월 24일 춘일수상(1)  홍차한잔의 윤리 (사진출처:동아일보)

"서울 올 때마다 눈에 띄이는 것은 다방의 발전이다. 그 양적 발전뿐만 아니라 장치나 음악도 여간 고급화되지 않았다. 6-7년 전만 해도 서울에 순끽다점으로 변변한 것이 없어 동경서 끽다취미가 있던 학생의 불만이 되었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급속도의 발전이다. 다방에서 나의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초저녁부터 가득 차있는 젊은 손님들이다.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면서 세상을 잊고 있지 않은가."

1930년대 다방에 손님들이 몰린 것은 식민지 청년들이 세상을 잊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의 대표적은 다방 낙랑팔라는 화가 이순석의 아틀리에를 겸한 끽다점이었는데, 차와 과일을 팔았고 연주회와 문학행사를 개최했다. 이에 대한 기사가 있다.

"대한문 앞흐로 고색창연한 녯 궁궐을 끼고 조선호텔 잇는 곳으로 오다가 장곡천정 초입에 양제 2층의 소쇄한 집 한 채가 잇다. (…) 이것이 「낙랑(樂浪)팔라」다. 서울 안에 잇는 화가, 음악가, 문인들이 가장 만히 모히고 그리고 명곡연주회도 매주 두어번 열니고 문호 「꾀-테」의 밤 가튼 회합도 각금 열니는 곳이다. 이 집에서는 맛난 틔(茶)와 「케-크」 「푸릇」 등을 판다. (…) 씨가 이 낙랑팔라를 시작한 것이 2년전[1931년-인용자]이엇다. 그때는 종로에 「멕시코」와 「뽄 아미」가 잇서 인테리 청년을 흡수하든 때이다."
(「동경미술교출신(東京美術校出身) 이순석(李舜石) 씨의 끽다점(喫茶店) 낙랑(樂浪)팔라」, 『삼천리』, 1933.10)


낙랑팔라를 포함한 끽다점에 대한 평판기가 1934년 5월 삼천리 잡지에서 게재되었다. (끽다점비평기, 삼천리 6-5, 1934.5) 이에 의하면 크림 맛이 좋은 것으로 유명했던 낙랑팔라에서는 금요일마다 삑타-의 신곡 연주가 잇고 가끔 조그마한 전람회도 열렸다. 페치카로 보이는 난로 앞에서 러시아나 불가리아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극작가 유치진이 관계 했던 ‘뿌라탄’은 지금의 정동 부근에 있었는데 양유(羊乳)가 마실 만하고 음악은 주로 서양음악을 틀었다. 극예술연구회 멤버나 총독부에 근무하는 샐러리맨들이 자주 찾았다. 신문기자와 은행회사원들이 가장 많이 출입하는 ‘뽄 아미’에서는 화가 구본웅의 전시회가 열린 바 있다. 여급과 기생이 가장 많이 출입하기로 유명한 멕시코에는 무용가 최승희의 포스터가 걸려있고 음악도 다른 데는 양곡 전문이나 여기는 일본소리도, 조선민요도 새로 나오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있었고 소다수가 유명했다.

「날개」의 작가 이상이 운영한 ‘제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총독부에 건축기사로도 오래 다닌 고등공업출신의 김해경 씨가 경영하는 것으로 종로서 서대문 가노라면 10여 집 가서 우편(右便) 페-부멘트 옆에 나일강변의 여객선같이 운치 잇게 빗겨 선 집이다. 더구나 전면 벽은 전부 유리로 깔엇는 것이 이색이다. 이러케 종로대가(鍾路大家)를 엽헤 끼고 안젓느니 만치 이 집의 인삼차나 마시면서 바깥을 내이다 보느라면 유리창 너머 페이부멘트 우로 여성들의 구두빨이 지나가는 것이 아름다운 그림을 바라보듯 사람을 황홀케 한다. 육색 스톡킹으로 싼 가늘고 긴 각선미의 신여성의 다리, 다리, 다리. 이 집에는 화가, 신문기자 그리고 동경, 대판으로 유학하고 도라와서 할 일 업서  양차(洋茶)나 마시며 소일하는 유한청년들이 만히 다닌다. 봄은 안 와도 언제나 봄 긔분 잇서야 할 제비. 여러 끽다점 중에 가장 이땅 정조(情調)를 잘 나타낸 「제비」란 일홈이 나의 마음을 몹시 끄은다,"   (「끽다점비평기(喫茶店評判記)」, 『삼천리』 6-5, 1934.5)

1930년대의 다방은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설탕, 커피 등의 수입이 막히면서 쇠퇴 일로를 걸었다. 다방이 다시 부활한 것은 6·25전쟁 후였는데 1950년대 서울의 다방은 가난하지만 순수하고 기개 높은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다. 인제 박인환문학관에서 1950년대 다방 중 일부를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1960년대부터 다방은 마담과 레지·카운터·주방장 등을 데리고 경영하며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형태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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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