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세연정

고산 윤선도의 유토피아

완도읍에서 서남쪽으로 12km쯤 떨어진 보길도 세연정은  완도 화흥포항에서 배를타고 약 40분정도가면  전복의 고장인 노화도에 도착한다, 자동차로 10여분 정도 보길대교를 넘어가면  상록수가 우거지고 물이 맑아 자연 경관만으로도 아름다운 곳,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유적으로  알려진 세연정이 나온다.


그의 나이 51세 때인 인조15년(1637)에 왕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으리라 하고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상록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섬에 터를 잡았는데 바로 보길도이다.


세연정에서 보는 인공정원의 풍경과 동천석실에서 내려다보는 전망, 어부사시사의 현장인 예송리 해안에서 보는 바다 풍경들이 대단히 아름다운 빼어난 섬이다. 동양의 자연관과 성리학의 사상이 이곳 보길도에 깊이 서려있다.



              세연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곳이란 뜻(세연정 기념관)


                                                                                        세연정

                                                                                            동천석실 


                                                                                               낙서재  


                                                                             예송리 공룡알 해안


                                                                            어부사시사 원본 (세연정 기념관)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 섬의 주봉인 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공부하고 독서 하면서 즐거움을 얻고 은둔하고자 하던 선비의 생활공간이었다.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세워 ‘곡수당’이라 하고, 곡수당 지역은 초당, 석가산, 평대, 연지, 다리, 화계, 월하탄이 조성되어 고산이 휴식하던 장소이다. 곡수당 옆에는 서재가 건립되어 고산의 아들들과 제자들이 살던 곳이다.

낙서재 건너편 험한 바위산 경승지에 집을 지어 ‘동천석실’이라 이름하고, 쳔여평 공간에 석담, 석천, 석폭, 석대 및 희황교와 한 칸짜리 목조건물인 이곳에서 책 읽고 사색하며 신선처럼 소요하던 은자의 처소였다.

세연정은 3천여 평의 계원으로 부용동 입구에 있다. 세연정을 중심으로 조우에 연못 (205여 평)과 계담(600여 평)과 판석재방과 동대, 서대, 옥소대, 칠암, 비홍교와 동백나무, 대나무,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서 아름답다. 또 고산의 유적으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행사인 유상공수를 행하던 낭음계, 용이 승천하는 승용대, 연정이 있었던 조산과 여름에도 한기를 느낀다는 하한대, 고향을 그리워하며 임금이 계신 궁궐을 바라보던 혁희대, 석전, 미산 등 경승의 산봉우리마다 고산은 상징적 이름을 붙였다. 부용동 유적은 고산의 기발한 착상과 절묘한 자연과의 조화성으로 구성된 조선 3대 별서정원 유적이다. 이 정자와 대가 모두 25여 개소에 이른다. 이곳에서 오우가, 산중신곡 등 많은 가사와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비롯하여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를 남겼다. 세연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곳이란 뜻으로 고산연보에서는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 했을때 지은 정자라 하고 있다.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 동쪽에 호광루, 서쪽에 동하각, 남쪽에 낙기란 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또 서쪽에는 칠암헌이라는 편액을 따로 걸었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해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한 윤선도의 뛰어난 안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보길도 윤선도 원림으로 2008,01,08일에 명승 제34호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고산 윤선도는 선조 20년(1587)에 나서 광해군, 인조, 효종을 거쳐 현종 12년(1671)에 사망을 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유례가 없었던 변란 시대를 거치며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심화되고 서인들이 득세하던 시기였었다. 그의 집안은 누대에 걸쳐 벼슬을 한 명문가로 재산도 풍족 했었던 남인 집안이었다. 항상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고 따지고 들어 때로 도량이 좁다는 평을 들을 만큼 꼬장꼬장한 성격 때문에 그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고 두 차례에 걸친 귀양살이로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은둔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집안의 재력을 바탕으로 오히려 화려하다고 할만한 은둔생활을 하면서 유명한 오우가, 산중신곡, 산중속신곡, 어부사시사, 몽천요 등을 이곳에서 남겨 우리나라 단가 문학의 거성으로 인정을 받는다. 윤선도는 학자로서 당쟁에서는 남인들의 중심인물로 당시의 세력가 우암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들과 다투다 져서 73세에 다시 유배를 떠나 8년 후에야 풀렸다. 송강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 시대의 3대 가인으로 두 사람과 달리 가사는 빼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를 남기고 한자가 아닌 우리말로 창의적으로 쉽게 풀어 표현하여  고산 윤선도의 단가와 시조가 더욱 빛을 발한다.

아름다운 풍경과 자연의 조화로 빚어진 이곳 세연정에서 배를 타고 노를 저으며 어부사시사를 불렀던 윤선도를 생각해 본다. 세상사의 힘든 일은 다 잊고 자연을 음미하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동풍이 건듯 부니 물결이 곱게 일렁이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동호를 돌아보며 서호로 가자꾸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다가온다”

고산 윤선도는 51세때(1637년) 이곳 보길도에 들어와 85세(1671년에) 까지 보길도를 7차례나 들어오고 나가는 13년 동안, 두 차례 귀양을 가고 벼슬도 하며, 서울로 가거나 해남의 금쇄동 등 다른 곳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이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삶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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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