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탈해이사금

탈해왕릉은 1969년 8월 27일에 사적 제174호로 지정되었으며, 백률사가 있는 소금강산의 남록 낮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 탈해이사금 (경주 탈해이사금)

소금강산 남쪽 자락 양지바른 곳에는 탈해왕릉(신라 4대 왕)이 있다.
탈해왕릉은 1969년 8월 27일에 사적 제174호로 지정되었으며, 백률사가 있는 소금강산의 남록 낮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왕릉은 20세기 초에 석씨 일족이 석탈해의 능으로 비정함으로써 현재까지 탈해왕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해묵은 아름드리 송림에 포근하게 안겨져 있어 도심과 매우 가깝지만 평온하게 보인다. 주로 등산객들이 줄지어 오르내리지만, 이 왕릉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이 적은 편이다. 아마 석씨라면 모르겠지만. 그러나 우리나라에 昔氏(석씨)는 11,000여 명 정도다. 누구라도 관심을 가지고 다시 한번 돌아보면 좋을 것 같다.





탈해는 그의 탄생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남해왕 때에 가락국 바다 가운데 이상한 배가 와서 닿았다. 수로왕과 백성들이 함께 북을 치며 맞이하려고 했는데 그 배는 이내 떠나고 말았다. 그 뒤 계림의 동쪽인 아진포로 들어왔다. 마침 아진의선이라는 노파가 배를 맞이했다. 그 노파는 혁거세왕에게 물고기를 바치는 海尺(해척, 바닷가에서 고기 잡는 일)이라는 일을 했다. 노파가 배를 끌어당기자 갑자기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들었다. 그 배 안에는 커다란 궤짝이 있었는데 이것이 길한 것인지 흉한 일인지 몰라서 배를 한쪽으로 숨겨놓고 하늘을 향해 빌었다. 드디어 궤짝을 열어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칠보가 가득하였다. 그 아이는 용성국에서 왔다고 한다. 용성국의 함달파왕과 왕비 사이에 아이가 없어 기도를 올렸다. 그래서 7년만에 낳았는데 커다란 알이었다.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분명 좋은 일이 아니라 여기고 배에 실어서 바다로 띄운 것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까치(鵲작)로 해서 그 궤짝를 열게 되었기 때문에 鵲(작)이라는 글자에 烏자를 떼고 昔(석)氏로 성을 삼았다. 또한 궤짝을 열고 알을 벗기고 나왔다 해서 이름을 탈해로 하였다.

어느 날 탈해는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 위에 올라가 돌집을 짓고 7일 동안 기도를 했다. 서라벌을 내려 보다가 초사흘달 모양으로 생긴 곳에 살만한 곳을 찾았다. 거기에는 이미 표공이 사는 곳인데 탈해는 담 밑에 숫돌과 숯을 묻어 두었다. 며칠 후 찾아가서 우리 조상들이 살던 집이라고 호공과 시비가 벌어졌다. 탈해는 조상들이 대장장이였는데 그 증거가 바로 숫돌과 숯이라고 해서 그 집을 차지하였다. 그 뒤로 탈해에게 많은 도움을 준 호공에게 재상의 자리를 주었다.

하루는 동악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종을 시켜 물을 떠오게 했다. 그 종은 오는 도중에 목이 너무 말라 먼저 마시려고 바가지를 입에 대자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종은 맹세를 했다. 그리고는 바가지가 입에서 떨어졌다. 그 우물을 요내정이라고 부른다.

남해왕은 탈해를 지혜롭다해서 맏사위로 삼았다. 유리왕이 죽자 그의 매제인 탈해가 왕위에 올랐다. 탈해의 후손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9대 벌휴왕의 아버지 구추가 탈해와 후비의 소생이다.
그는 재위 23년만에 죽고 蔬川丘(소천구)에 장사지냈다. 훗날 뼈를 부수어 소상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 두골 둘레가 3척2촌, 신골이 9척7촌이고 치아가 서로 엉기어 하나처럼 보이고 뼈마디는 모두 연결이 되어 있었다. 이른바 천하에 둘도 없는 力士의 골격이었다. 소상은 다시 신의 계시로 동악에 안치하고 동악신이 되었다.

왕릉은 원형 토분으로 전면은 평지이나 후면은 약간 높다. 신라 초기의 왕릉 답게 형식 자체는 특이한 점이 없는 일반적인 형식이다. 봉분 이외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으며 봉토 아래에 호석도 외견상으로는 알 수가 없다. 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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