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의지, 목판에 새기다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판은 오직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고려의 백성 전체가 한마음 한뜻을 모은 결과물이다. 몽골과 처절한 전쟁 중에 부처님의 말씀을 새긴 세계 최대의 목판 인쇄 문화재이기도 하다.

민족의 의지, 목판에 새기다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판은 오직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고려의 백성 전체가 한마음 한뜻을 모은 결과물이다. 몽골과 처절한 전쟁 중에 부처님의 말씀을 새긴 세계 최대의 목판 인쇄 문화재이기도 하다. 수없는 침략을 당하면서도 해인사에서 800여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견뎌냈다는 것도 기적에 가깝다. 이는 불자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뜻을 모았던 덕분 아닐까.


01.국보(제52호)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내부 ⓒ문화재청



나라 지킴의 상징 ‘팔만대장경 경판’

경남 합천 해인사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팔만대장경 경판(經板)이 보관되어 있다. 경판은 인쇄하여 널리 보급할 목적으로 불교 경전을 새긴 목판이다. 그 수는 자그마치 81,258장에 이른다. 지금부터 800여 년 전, 고려 고종 때인 1,236년에서 1,251년까지 16년에 걸쳐 제작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고 ‘고려대장경판’으로도 부르며   8만 4,000의 번뇌를 상징하듯 경판 수가 8만 장이 넘어, 흔히 팔만대장경판이라고 한다. 경판의 크기는 길이 68cm     혹은 78cm가 대부분이며 폭이 약 24cm, 두께가 3cm 전후다. 경판 한 장의 무게는 평균 3.5㎏이지만 나무 종류에 따라 4.4kg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경판을 눕혀 쌓으면 높이 3,200m, 이으면 길이 150리, 전체 무게는 4톤 트럭 70대 분량인 280톤에 이른다. 경판은 한 면에 세로로 23행, 한 행에는 14개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 수는 면당 320여 자씩이고 앞뒤 양면에 새겨져 있으므로 경판 한 장에는 640여 자가 들어 있다. 따라서 팔만대장경판 전체의 글자 수는 약 5,200만 자나 된다. 이것은 한자에 능숙한 사람이 하루 8시간씩 30년을 읽어야 모두 읽을 수 있다고 한다. 500년 조선왕조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의 전체 글자 수가 5,400만 자 전후인 점과 비교해도 고려인의 엄청난 정성이 깃든 유물임을 알 수 있다.

02.국보(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반야바라밀다심경    03. 불설아미타경 ⓒ문화재청



다시 경판 새겨 몽골군 물리치자는 의지

1232년 몽골군의 2차 침입으로 이전에 새겨 뒀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의천의 교장(敎藏) 등이 무참히 불타버린다. 불교 국가인 고려의 정신적 지주인 대장경 소실은 되레 항전 의지를 크게 높였다.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저항키로 했다. 상식적으로 침략을 받으면 무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시켜 침략군을 물리칠 방도를 찾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최우를 비롯한 집권세력은 조금 엉뚱하게 다시 대장경을 새기기로 결정한다. 이유는 200여 년 전 초조대장경을 새기자 침략군이 물러갔던 경험이 있으므로, 이번에도 부처님의 힘을 빌려 외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사정은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잘 나타나 있다.

‘…처음 대장경을 새기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현종 2년(1011)에 거란군이 대거 침입하여 임금은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가셨으나 거란군은 송도에 머물면서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이에 임금과 신하가 합심하여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했더니 놀랍게도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갔나이다. 생각하건대 대장경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입니다. 임금과 신하가 합심하여 발원함 또한 마찬가지이니 어찌 그때에만 거란군이 물러가고 지금의 몽골군은 물러가지 않겠습니까? 다만 모든 부처님과 하늘의 보살피심이 한결같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마디로 대장경을 다시 새겨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을 내몰자는 것이다. 물론 이는 앞에 내세운 이유였고, 실제로는 정치적인 계략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역사학자 문경현 교수는 “최씨 무신정권의 안보와 강화 천도의 합리화, 정권의 수탈체계 유지와 사상세계의 장악, 민심의 수습과 일체감의 강조에 참목적이 있다”라고 했다. 아울러 온 백성의 마음을 한곳에 모을 커다란 이벤트가 필요했던 것이다. 지배계층의 속마음이 무엇이든 대장경판을 새기는 엄청난 작업은 고려 백성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이후 몽골과 전쟁을 벌이면서 대장경판을 만들어 가는 고난의 행군은 참여한 백성들의 몫이었다. 경판 제작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이름 없는 수많은 백성이 쏟아 부은 정성의 크기를 짐작해 본다.


04.경판 글씨 ⓒ해인사    05.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수다라장과 법보전 ⓒ해인사



어떻게 경판 새길 나무를 준비했나?

첫 단계는 나무를 선정하여 베어오는 일이다. 먼저 어떤 나무가 경판 새기기에 적합한지 고려해야 한다. 필자가 현미경으로 경판 나무의 세포 형태를 조사한 결과 자작나무라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산벚나무, 돌배나무, 거제수나무, 고로쇠나무, 후박나무 등이었다. 산벚나무가 64%로 가장 많고 다음이 15%의 돌배나무이다. 이 두 나무가 거의 80%에 이른다. 산벚나무는 이른 봄에 연분홍빛 꽃을 피우고 나무껍질은 진한 적갈색에 숨구멍이 가로로 나 있다. 몽골군 몰래 누구라도 쉽게 찾아 낼 수 있으며 재질이 좋고 우리나라 산에 흔한 나무다. 돌배나무도 먹는 과일이 달리는 나무이니 어디에 좋은 나무가 자라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무가 선정되면 한꺼번에 베어 통나무 상태로 하산한 후 한곳에 모아 판자 켜기 등 가공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 능률적이고 일괄작업을 하기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운반에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고 몽골군이 국토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한꺼번에 대규모 작업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방법은 소규모 작업이다. 믿음이 돈독한 불자(佛者)들은 산에 올라가 한두 그루씩 베어 현장에서 판자를 만들었다. 가지나 죽데기 등은 버리고 무게를 줄인 다음 판자만 지게로 지고 내려와 경판을 새기는 절이나 관청에다 시주하는 일부터 했을 것이다.

시주 받은 판자는 거의 생나무이므로 건조가 필요했다. 두꺼운 판자라 건조 과정에서 갈라지거나 비틀어지기 쉽다. 그래서 판자를 소금물에 삶고 찌는 과정을 거쳤다고 전해진다. 건조가 끝난 판자는 경판 길이로 잘라내고 두께에 맞게 깎아낸다. 자귀와 대패로 정해진 두께까지 조심스럽게 마무리하였을 것이다. 필자가 치수를 측정해 봤더니 놀랍게도 경판 한 장 내의 위치에 따른 두께의 차이는 편차가 1mm 이내였다. 우리 선조의 나무를 다루는 솜씨에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혼을 불어넣은 경판 새기기

다음 과정으로 대장경을 쓴 원본 종이를 받아다가 뒤집어 붙인다. 인쇄할 때 글자가 바로 찍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완전히 마르면 글씨가 잘 보이지 않으므로 들기름 등 식물성기름을 얇게 바르고 글자 새김에 들어간다. 한 글자 새길 때마다 합장하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쳤다고 하는데, 잠깐 딴 생각하다 글자 획 하나라도 날아가면 다시 새기거나 복잡한 과정을 거쳐 보수해야 한다. 새기는 과정은 분업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즉, 허드렛일을 하고 글씨가 쓰인 원본을 붙이는 보조원, 행과 행 사이의 넓은 공간을 파내는 초보 각수(刻手), 글자와 글자 사이를 깎아내는 반 숙련 각수, 마지막 세밀한 부분을 새기는 진짜 각수로 단계별로 나누어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달인의 경지에 이른 장인이 하루에 새길 수 있는 글자 수는 얼마나 될까? 서각(書刻) 전문가들은 대체로 40여 자라고한다. 전체 대장경판 글자 수 5,200여만 자를 하루에 새길 수 있는 평균 글자 수로 나누면, 동원된 장인의 총 인원이 약 130만 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로 경판을 새긴 기간이 12년이니 연간으로 따져 약 11만 명의 인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연도별 새긴 경판의 수가 일정하진 않으니 많은 해는 수십만 명의 장인이 동원됐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장인 수만 따져도 하루에 적게는 몇 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여기에 보조원과 미숙련 각수까지 포함하면 경판을 새기는 데 필요한 인원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팔만대장경판에 새겨진 글자의 모양을 보면 수많은 경판의 글씨체가 마치 한 사람이 새긴 것처럼 거의 동일하다. 글씨가 통일될 때까지 일정 기간 필체교정 교육을 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마무리로 일부 경판은 옻칠을 했다. 물론 옻칠은 경판을 오랫동안 보관하는 필수 과정은 아니다. 잘 건조되어 있는 목재 경판은 일부러 습기 많은 곳에 놓아두지 않는 이상 썩어서 손상될 염려가 거의 없어서이다.
출처/박상진(경북대 명예교수, <팔만대장경의 비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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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