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최초 격전지(오산, 죽미령)와 유엔군 초전기념비

유엔군 초전기념비는 유엔군이 6・25전쟁 당시 북한군을 상대로 벌인 최초의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기념비이다.

6·25전쟁의 최초 격전지(죽미령)와 유엔군 초전기념비

유엔군 초전기념비는 유엔군이 6・25전쟁 당시 북한군을 상대로 벌인 최초의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기념비이다. 6・25전쟁 발발 10일 만에 유엔군 선봉대인 미 제24사단 540명이 격전을 벌인 곳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매년 7월 5일이면 스미스부대 전몰장병 추도식이 거행된다.

미 제24사단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한반도에 긴급 투입되었다. 이들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로 유엔군 초전기념비가 건립된 지역은 1950년 7월 5일 오산에서 펼친 지역작전으로 미군이 북한군과 대결한 최초의 전투이다.

미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6월 29일 비행기를 타고 수원에 도착 영등포에서 전선을 시찰하고 동경으로 복귀하여 ‘지상군의 한반도 투입’을 본국에 건의하여 6월 30일 승인을 받음으로써 미 지상군이 개입하게 되었다.

본국 정부의 파병승인을 받은 맥아더는 일본 규슈(九州) 주둔 제8군 예하의 제24사단을 지명하였고 선발대인 1개 보병대대는 부산으로 공중이동하고 사단주력은 해상이동을 하였다. 제21연대 제1대대 스미스(Charles B. Smith) 대대장이 지휘하는 2개 중대 병력인 선발대는 7월 1일 부산에 도착하였고, 7월 5일 03:00경 제52포병대대와 함께 오산 북방 5km의 죽미령 진지를 점령하였다.

스미스 부대가 죽미령을 점령하고 있을 때, 오산 남쪽 2km의 갈곶리에는 국군 제17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북한군의 전차 30여대를 앞세워 남진하였고, 스미스 부대는 75mm 무반동총(2정), 105mm 곡사포(6문), 2.36인치 로켓(6문), 4.2인치 박격포(2문) 등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탱크를 이 같은 무기로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05mm 야포의 공격으로도 탱크를 파괴할 수 없었다. 물론 당시 적전차 대열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대전차 지뢰가 당시에는 없었고, 당일 비로 인해 항공기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스미스부대가 무너지고 인근에 배치된 17연대도 치열한 격전에도 불구하고 적의 탱크를 막아내지 못하고 오산지역에서 철수하였다.

540명의 스미스부대원 중 181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북한군은 전사 42명, 부상 85명, 전차 4대가 격파되는 손실을 입었다.

스미스부대의 참전은 전투의 승패에 관계없이 북한군에게 미군이 참전했다는 것을 알리는 데 더 큰 의의가 있었다. 당초 북한군은 미군이 참전 혹은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마무리하는 계획 하에 남침을 감행하였는데 전쟁 개시 10여일 만에 미군의 참전 사실을 알고하고 놀랐다고 한다. 북한군 제2군단 작전참모인 이학구 총좌는 귀순 후 “7월 초에 미군이 전쟁에 개입할 줄은 몰랐으며, 그 사실을 안 공산군은 크게 놀랐다”고 증언하였다.

6・25전쟁 발발 10일만에 유엔군 선봉대인 미 제24사단 540명이 격전을 벌인 곳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매년 7월 5일이면 스미스부대 전몰장병 추도식이 거행된다.




스미스 중령은 1939년 WestPoint를 졸업하고, 태평양전쟁에 참전했으며, 한국전쟁때도 2년간 참전해 북진에 합류하면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으며, 26년간의 군복무후 1965년 육군준장으로 전역했다.

한국방문은
1957년 "죽미령전사장병 추도식" 참석차,
1987년 "유엔군 초전 기념식"에 노병으로 참석한바 있으며
미국 애리조나주 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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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