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승려 이회광의 야욕과 몰락

그리 잘 알려진 일은 아니지만 오래 전에 하마터면 팔만대장경 경판이 몽땅 일본으로 옮겨질 뻔한 적이 있었다.

친일승려 이회광의 야욕과 몰락

덕수궁 선원전, 해인사 포교당 되다

그리 잘 알려진 일은 아니지만 오래 전에 하마터면 팔만대장경 경판이 몽땅 일본으로 옮겨질 뻔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대장경을 간행하겠다고 해인사 주지승과 일본인 사토 로쿠세키(佐藤六石)가 공모해서 추진했던 이 일이야 결국 당국의 사전저지로 무산되고 말았지만, 어쨌거나 팔만대장경 밀반출 미수사건은 1910년 3월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자칫 이 땅에서 팔만대장경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떠올린다면 누구라도 그저 섬뜩한 느낌을 지우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어찌된 일인가 했더니 그토록 험한 꼴을 당할 위기의 이면에는 친일승려로 널리 알려진 이회광(李晦光; 1862-1933)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 1918년 어느 날, 우연찮게 친일승려 3인방이 나란히 섰다.
왼쪽이 용주사 주지 강대련(姜大蓮), 가운데가 통도사 주지 김구하(金九河), 오른쪽이 문제의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다.

일찍이 1908년에 불교교단 원종(圓宗)을 성립한 이래 1910년에 일본 조동종(曹洞宗)과의 예속적 연합을 추진하였고, 사찰령(寺刹令)의 제정 이후에도 계속하여 30본산 연합체제를 주도하면서 1920년에는 역시 일본 임제종(臨濟宗)과의 병합을 추진하는 등 일관되게 친일의 길을 걸었던 이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나름의 권세를 한껏 누렸을 것 같은 그의 행적을 죽 따라가 보면 어째 말로(末路)가 전혀 평탄하지 못했던 사실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이 친일행위에 대한 당연한 업보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동아일보> 1924년 8월 18일자에는 '이회광(李晦光)의 과실(過失)로 해인사의 대치욕(大恥辱), 돈 십원에 가장 집물을 경매, 부처님만 무사하게 되었다'는 제목의 기사 하나가 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 <매일신보> 1926년 5월 22일자 기사. 이때까지도 이른바 '이회광 사건'과 관련된 법률적 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시내 정동(貞洞)에 있는 합천 해인사 중앙포교소에서는 광화문 금융조합에서 육천 원을 차용하였던 바 그 기한이 지났으되 변리도 물지 않으므로 광화문 금융조합에서는 약 한 달 전에 그 포교소 안에 있던 가장 집물을 차압하여 두었던 바 드디어 재작 16일 오전에 경매하여 버리고 말았다.

경매 당한 물건은 풍금과 난로 등 기타 약 백 구십여 원어치이며 부처님만은 겨우 무사하였다는데 기만(幾萬)의 재산을 가진 대본산 해인사로 이와 같이 몇 십원을 변통치 못하여 변리도 못물다가 내종에 차압을 당한 것은 현주지 이회광씨와 본사와의 갈등이 심한 까닭이라더라."

이게 과연 무슨 뜬금 없는 소리일까? 알고 봤더니 사건의 개요는 대충 이러했다. 해인사 주지 이회광이 정동 일대의 광활한 부지를 인수하여 그곳에다 '해인사중앙포교소(海印寺中央布敎所)'라는 이름으로 사찰을 건립한 것이 1920년 봄 무렵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해인사에서 직접 불상을 모셔오기까지 했는데, 정작 그 관리와 운영은 아주 엉망이었던 모양이었다.

분명히 포교소 건립과 관련된 자금은 그 자신이 주지로 있는 해인사 측에서 나왔을 테지만, 정작 해인사의 명의로 확보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자기 개인명의로 해둔 데다 그 마저도 식산은행이나 한성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에 여기저기 저당을 잡혀 추가자금을 변통했던 지라 그럭저럭 수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빚이 잔뜩 누적되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회광 개인의 영광과 권세를 위해 애꿎은 해인사의 재산을 순식간에 다 부려먹은 꼴이 된 셈이다.

▲ 1920년 12월 25일에는 해인사에서 직접 불상을 모셔와 총독부 관리의 참석 하에 화려한 봉불식(奉佛式)을 거행하였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 일로 인하여 이회광은 해인사 주지로서의 권능을 완전히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1924년 9월 11일에는 조선총독부가 김만응(金萬應)을 해인사 후임주지로 인가함에 따라 그는 스스로 친일승려의 자격(?)조차도 상실하는 처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확인된다. 일관되게 친일행적을 보여왔던 그를 구태여 내칠 까닭이 뭐 있겠냐 싶지만, 그는 이미 구제불능의 '사고뭉치'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수년 전부터 일본 임제종 묘심사(妙心寺)를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조선불교에 관한 모든 권한과 결정권이 조선총독에게 귀속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연히 일본 본국의 고관들을 들쑤시고 다닌다고 하여 총독부 당국의 눈밖에도 벗어난 상태였다. 그러므로 총독부로서도 그의 과오를 감싸줄 리는 만무했을 터였다. 친일승려 이회광의 몰락은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 <매일신보> 1920년 12월 22일자 기사. 여기에는 분명히 "영성문 대궐 구적 (즉 덕수궁 선원전 구역) 칠천 팔백 평의 넓은 터에 해인사 포교당이 건설되었다"는 구절이 들어있는 것이 보인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이회광이 1920년에 건립했던 불교포교소가 바로 '정동(貞洞)'이라고 했다. 승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된 것이 1895년이고 보면, 불과 25년 사이에 시내 한복판에 번듯한 사찰을 세웠으니 그것이 제나름의 큰 공적이라면 공적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어쨌거나 이 대목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포교소라고 말하는 것이 있었던 곳이 다름 아닌 '덕수궁 선원전(德壽宮 璿源殿)' 구역이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흔히 '영성문 대궐(永成門 大闕)'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던 덕수궁 선원전 구역이 해체되기 시작한 것은 1919년에 고종 임금이 승하한 때부터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겠다. 그 중에 일부는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가 되었고 또 일부는 '덕수공립보통학교'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쪽이야 지금도 학교부지는 그럭저럭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대략 그 영역과 이후의 내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당최 그 윤곽을 그려내기가 어려운 곳이 하나 남아 있었으니 원래 선원전(璿源殿)과 사성당(思成堂)이 자리했던 정동 1-24번지 일대 (즉 지금의 미국대사관 부대사 관저지역)였다.

이 자리에 대해서는 약간 세월이 흐른 다음 1934년 12월 24일에 이르러 조선저축은행이 이 터를 인수하여 중역사택을 짓는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한데, 그렇더라도 적어도 1920년 이후의 10여 년간의 연혁은 전혀 알려진 바 없었던 지역이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역사의 공백기에는 친일승려 이회광이 건립했던 사찰이 있었던 것이다.

▲ 1920년 무렵에 촬영된 덕수궁 일대의 원경이다. 아래의 파란색은 '대한문'이고, 위의 파란색은 '영성문'을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붉은색이 고종 승하와 더불어 해체되기 시작한 선원전 구역 즉 지금의 미국대사관 부대사관저 일대이다. 그 어디메에 '해인사 불교포교소'가 들어섰던 것이다.



"서대문통에 고색이 창연하게 서 있던 '영성문'이 헐리기는 작년 여름의 일이다. 지금은 그 영성문 자리로부터 남편으로 정동까지 탄탄한 신작로가 새로이 뚫려있다. 이 신작로의 왼편 대궐자리에는 지금에 절이 되어 '선원전'의 뒤편자리에는 금칠한 부처님이 들어앉았다. 일시 정치풍운의 중심으로 동양의 주목을 모으는 '수옥헌'은 외국사람들의 구락부된 지가 이미 오래지마는 외국사신접견의 정전으로 지었던 '돈덕전'은 문호가 첩첩이 닫힌대로... 운운."

이것은 <동아일보> 1921년 7월 25일에 수록된 기사의 한 토막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궐 자리의 절'이란 것이 바로 '해인사 중앙포교소'였다. 그러니까 선원전 구역을 헐어냈던 1920년부터 이른바 '이회광 파문'으로 불거진 사태의 수습을 위해 '정리위원회'가 구성된 1925년 무렵에 이르기까지는 불교사찰이 버젓이 선원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사실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옳겠다.

그런데 이회광은 왜 하필이면 덕수궁 선원전 자리에다 절을 지으려고 했던 것일까? 여기에도 그냥 흘려듣기 어려운 숨은 뜻이 들어 있었다. 나중에야 결국 일개 '해인사'의 포교당으로 귀결되고 말았지만, 애당초 이회광은 이곳에다 일본 임제종에 부속된 '임제종태고파(臨濟宗太古派)'가 자신의 계획대로 성립하는 경우에 그 종무원(宗務院)을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빈민을 위한 시약원(施藥院)도 만들고 또 불교청년회 중앙회관도 만들 계획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조선불교의 본산을 구축하겠다는, 그것도 도성 한복판의 광활한 자리에다 절을 지어 올리겠다는 야심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가 무리하게 육, 칠천 평에 가까운 선원전 구역을 사들이려고 했던 까닭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나중에 스스로의 몰락을 자초하는 결과를 불러오는 직접적인 단초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덕수궁 선원전 구역의 해체 이후 굴절된 역사의 단면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다시 세월이 흘러 이곳은 해방 이후 미국대사관 권역으로 편입되고 말았으니 그 곤혹스러운 내력은 더욱 가중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그나저나 여기가 한때나마 어느 친일승려의 야망과 좌절이 잔뜩 배어든 곳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이제 몇이나 남았을까?


"풍전의 등화 같은 해인(海印) 고찰의 운명"
친일승려 이회광의 말년행적은 이러했다


<조선일보> 1924년 10월 29일자에 '풍전의 등화 같은 해인(海印) 고찰의 운명, 이회광의 포교소 설치 이래로 그럭저럭 진 빚이 삼십여 만 원, 부속기관도 전부 폐지' 제하의 기사가 들어 있다. 여기에는 친일승려 이회광의 말년 행적이 어떠했는지가 잘 정리되어 있다. 그 전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합천 해인사의 보물 전부를 광화문금융조합(光化門金融組合)에게 차압(差押)을 당하였다 함은 이미 작지에 보도하였거니와 이제 그 해인사의 자세한 내용을 듣건대 속담에 '십년 공부 남무아미타불'이라더니 참으로 천여 년 동안 쌓고 쌓은 탑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과연 애처롭게도 되어 있다.

그 절에서는 대정 9년(1920년) 경 당시 주지 이회광(李晦光) 시대에 경성에다 불교중앙포교소(佛敎中央布敎所)를 두기로 하고 정동(貞洞) 일번지의 건물을 육천 원에 매수하여 가지고 포교사업을 계속하던 바 그 포교소 구내에 잇는 제중원(濟衆院)으로 말하면 그 절의 경영이 아니오,

다만 이회광 씨와 그 원장 장일(張一) 씨와의 사사 경영인데 지금 그 건물 소유권을 보면 그 포교소는 이회광 개인의 명의로 있고 제중원은 더욱이 중도 아닌 장일의 명의로 있는 바 본래 절 돈으로 산 개인명의로 권리를 넘겨 놓은 것은 잘못이며 또는 그 기지(基地) 육천 평에 대하여는 지난 12년(1923년) 이왕가(李王家)와 2월에 십 삼만 팔천 원에 매수하기로 계약하고 매년 일만 삼천 팔백 원씩 납부하기로 한 바

그것은 사내의 경비 곤란으로 인하여 작금 양년(兩年)에 한 푼도 납부치 못하였으며 장차도 도저히 어렵게 되겠음으로 그 장소를 그대로 포교소로 사용할 수는 없겠으며 포교소의 존폐 문제는 본사에서 결정되기 전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기지에 대해여는 결국 이왕가와 해약하는 수밖에 없다는데 해약케 되면 계약에 의하여 매월 백 원의 위약금만 물어주면 그만이고

그 건물 중 포교소는 이회광 씨의 명의로 한성은행 남대문지점(漢城銀行 南大門支店)에 삼천 오백 원에 저당되어 있고 그 제중원은 장일 씨가 금년 2월에 영동역전(永同驛前) 모에게 이천 오백 원에 저당하였는 바 이것만 이곳이 포교소의 건물과 기지에 대한 목잡한 문제이며 이 포교소 설치 이래에 그 영행이 직접 해인사에 미쳐 마침내 해인사 자체의 존폐 문제가 박절해 왔다.

그 동안 소비한 금액이 절의 동산 소모가 십 사만 원이며, '해인사 주지 이회광'의 명의로 현금 돌아다니는 수형(手形)이 구만 원이니 십만 원이니 하여 자못 요령을 얻을 수가 없으며 그외 그때 사무원으로 있던 진창수가 이회광의 명의로 시내 수창동(需昌洞) 일백 칠십 번지 천일청(千一淸)의 재산을 사기횡령한 것이 육만 이천여 원이라.

이것을 통계하면 근 삼십만 원의 거액의 금전이 경성중앙포교소를 중심으로 하고 일어난 소비액이다. 그 가운데 현재 채무로 되어 있는 것이 이회광의 유행 수형까지 합산하면 십 오만 원 이상이나 되는데 현재 해인사의 재산이라고는 남은 것이 다만 산림(山林)분인 바 그 산림은 직경 사십 리에 평가 사 오만 원밖에 되지 않는다 하니

무엇으로써 이 채무를 보상하고 사내의 일을 정리할까 하여 사내승려 이백여 명은 좌불안석으로 매우 초조한 상태에 있으며 또는 일백 오십여 명이나 수용하는 사내학교는 부득이 지난 4월부터 문을 닫았다 하니 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 불교계의 기초인 해인사의 운명이 장차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을 아무래도 정리해 보겠다는 정신에서 지난 9월 11일에 새로 주지의 자리를 김만응 씨가 차지하게 되어 여러 가지 교섭차로 일전 상경하였다가 차압의 급보를 듣고 재작 27일밤 차로 귀사하고 작 28일 밤차로는 농사 권업(勸業) 주임으로 있는 백성원(白聖元) 씨도 귀사하였으며 포교소에는 김구봉(金九奉) 씨가 혼자 남아 있어 본사의 결정을 기다린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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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