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간다

우리 음식 문화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숟가락이다.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간다

우리는 식사 처음부터 끝까지 숟가락을 사용하는 전통을 지녔다. 숟가락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밥과 함께 국을 주식으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에다 밥을 말고 물에다가 밥을 말아 먹기도 한다. 아예 젓가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국밥 같은 음식도 있다. 숟가락을 들고 놓는 행위를 삶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 음식 문화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숟가락이다.


01.청자음각운룡문숟가락 ⓒ국립중앙박물관

숟가락은 음식물을 뜨는 술과 손잡이로 이루어져 있고 음식물을 입으로 운반하는 도구이다. 지금은 숟가락이 없는 집이 없겠지만 삼국시대 숟가락은 그야말로 귀한 도구였다. 우리나라에서 청동으로 만든 숟가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3점의 숟가락이다. 2벌의 젓가락도 함께 발견됐다.

수저 2벌은 무령왕과 왕비의 관대 앞에 놓여 있었고 나머지 숟가락 1점은 왕비의 두침 부근에 있던 청동광구발 내부에서 은장도자와 함께 출토됐다. 2벌의 수저는 크기가 1cm 정도 차이 나는데 조금 큰 것이 무령왕에게 올린 것으로 생각되고 청동광구발 내부에서 출토된 숟가락은 모양이나 상태가 좋아서 중국 양나라에서 수입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 외에도 논산 표정리, 부여 관북리에서 숟가락이 출토되었고, 왕흥사 목탑지에서는 사리를 옮길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 젓가락이 1벌 출토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숟가락이 가장 많이 출토된 곳은 경주 월지(안압지)이다. 모두 26점이 출토되었는데 술 잎이 타원형, 원형으로 만들어진 것에 가늘고 긴 자루가 부가된 것이 특징이다. 이 두 종류의 숟가락과 똑같은 형태의 것이 일본 쇼소인 (정창원·正倉院) 남창(南倉)에 한벌로 묶여서 전해지고 있다. 쇼소인에 소장 중인 6폭의 도리게리쓰조 병풍을 수리하는 중에 우연히 발견한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에는 ‘백동시’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볼 때 쇼소인에 보관된 청동 숟가락은 신라에서 만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상당한 양의 숟가락이 출토된 월지나 동궁월지 우물, 창녕 화왕산성 우물, 부여 부소산, 평산 산성리 등에서는 젓가락이 전혀 보이지 않고 앞서 말한 쇼소인에서도 중국제(당나라)로 보이는 숟가락 한 벌만 남아 있어, 이 시기에 귀족들은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사실 우리들이 사용하는 숟가락과 젓가락은 중국 상대 이래 제사에서 음식을 덜거나 옮기기 위한 용도로 제작된 것인데, 이것이 위진남북조시대를 지나 당대에 와서 그 모양이 완성되고 개인용 식도구로 정착된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러므로 당과 적극적인 교류를 이어가던 통일신라시대 숟가락도 그 영향권 아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형식 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식문화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에서 기인한 것인지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02. 국보 제220호 청자 상감용봉모란문 합 및 탁 ⓒ삼성리움미술관



고려, 숟가락 사용의 확산과 정착
숟가락은 고려에 들어오면서 큰 전기를 맞게 된다. 고려 초 통일신라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사용 빈도가 증가세를 보이기는 하였으나, 북방 요나라와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하면서 북방문화가 밀려오게 되고 장례풍습마저도 변화하게 된다. 박장(薄葬)으로 대표되는 통일신라의 장례풍습에서 요·금·원의 영향을 받아 생전 쓰던 물건들을 부장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11세기를 지나면서 부장품에 청동합이나 청자대접 같은 식도구와 함께 청동으로 만든 숟가락이 포함된다. 이 숟가락은 유엽형의 술 잎에 자루의 끝이 둘로 갈라지고, 술 잎에서 술 총으로 이어지는 자루가 심하게 휘어지는 형태로 중국 북방의 것을 수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중국과 다른 우리의 먹을거리와 숟가락의 적응이라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면 세계에서 유일하게 청자로 제작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음각운룡문숟가락’은 고려의 문화적 대응 결과가 아닐까 한다.

고려 전기와 달리 원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고려 후기에는 숟가락이 다시 한번 변한다. 국보 제220호 ‘청자상감용봉모란문합 및 탁’에 맞추어 제작된 연봉형 숟가락은 고려만의 스타일이며, 갑작스럽게 술 자루의 두께가 변한 것도 고려 후기의 특징이다.

13세기 후반 들어 주목할 점은 고려가 원의 지배를 겪으면서 고기 맛에 눈을 떴다는 것이다. 불교를 숭상하여 양 한 마리도 제대로 죽이지 못하던 나라에서 소의 내장까지 먹게 되고 곰탕을 끓이는 등 고기 맛을 들이게 된 것이다. 원의 황제가 김방경(金方慶)에게 “고려 사람은 밥과 국을 좋아하지 않는가?”라고 한 말도 고려 후기 들어 고기를 좋아하게 되고 국이 밥상에서 빠지지 않게 된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03. 사적 제13호 공주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출토 숟가락과 젓가락 ⓒ정의도

04.일본 나라시 도다이지에 있는 창고인 쇼소인(정창원·正倉院) 남창(南倉)에서 발견된 숟가락 ⓒ正倉院の 金工 일본경제신문사(소화51년)



조선, 수저의 대중화
조선이 들어서고 나라의 이념이 성리학으로 바뀌었지만, 먹거리가 변한 것은 아니어서, 술 잎이나 자루의 모습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다만 숟가락이 전체적으로 얇아지고 자루가 편평해지는 경향을 보이면서 조선 후기의 변화를 예고하는 듯하다. 조선 전기 분묘 부장품을 살펴보면 숟가락은 거의 다 포함된다고 할 정도로 출토 예가 증가한다.

아마도 조선시대에 이르면 일부 귀족층만 숟가락을 사용하던 시대를 지나, 밥을 먹는 집안이라면 누구나 숟가락으로 먹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비해 분묘 출토 자료를 검토하면 젓가락이 숟가락과 동반되는 경우는 30%를 넘지 못하고 있어, 젓가락의 사용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야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이후에 일어난 숟가락의 변화는 분묘 부장품이 별로 없어 구체적인 고찰은 어렵다.

다만 18~19세기에 제작된 김홍도나 김득신 그리고 김준기의 풍속화 속 숟가락 모습 그리고 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말기 숟가락의 형태가 둥근 술 잎에 자루가 부가된 것으로 볼 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에는 다양한 형태를 보였지만, 조선 후기 들어 그 형태가 하나로 수렴하는 것을 고려하면, 숟가락은 조선 후기에 더는 신분이나 경제력의 상징물이 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계층 구분 없이 널리 숟가락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05. 사적 제459호 밀양 박익 벽화묘 출토 숟가락과 젓가락 ⓒ동아대 석당박물관

06.단양 현곡리 14호분에서 출토된 숟가락과 젓가락 ⓒ서울시립대 박물관



숟가락 사용의 의미
‘우리가 숟가락을 밥상에서 놓지 못한 것은 조선 선비들이 공자처럼 먹고 싶어서 그랬다’라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중국 한(漢) 시기 편찬된 『예기(禮記)』에 당시 사람들은 손으로 밥을 먹었다고 한다. 공자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가 숟가락을 놓지 못한 까닭은 고려시대 이후 국이 주식으로 자리 잡아 숟가락이 아니면 쉽게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밥상에 국이 오르는 한 그리고 우리가 밥을 국이나 물에 말아 먹고, 또 국밥을 놓지 않는 한 숟가락은 우리와 늘 함께할 것이며 우리의 먹거리 역사를 증명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글. 정의도(한국문물연구원, 한국중세고고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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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