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과 경빈 김씨의 사랑 이야기 보물 창덕궁 낙선재

헌종과 경빈 김씨의 사랑 이야기 보물 창덕궁 낙선재

헌종과 경빈 김씨의 사랑 이야기 보물 창덕궁 낙선재 서울의 궁궐 중 유일하게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창덕궁. 국보 창덕궁 인정전과 보물 창덕궁 선정전을 지나 동궁(東宮)의 영역 아래쪽에는 유독 눈길을 끄는 전각이 있다. 대부분의 전각 지붕에는 단청을 칠했는데, 오히려 단청이 없어서 소박한 미가 돋보이는 건물 낙선재(樂善齋)이다. 낙선재에 단청을 하지 않은 사연과 이곳에 남아 있는 헌종과 경빈 김씨의 사랑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00.화계로 이어지는 낙선재의 홍예문 Ⓒshutterstock
정조를 닮고자 한 왕, 헌종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은 누구일까? 헌종(1827~1849, 재위 1834~1849)이 그 주인공이다. 헌종은 효명세자와 신정왕후의 장자로 이름은 환(奐), 1827년 7월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834년 나이 8세에 왕이 되었는데, 즉위 후 대비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다가 1841년 15세가 되면서 직접 국정을 챙기게 되었다. 헌종은 특히 증조부인 정조를 닮고자 노력을 했는데, 낙선재 영역 내에 있는 승화루(承華樓)와 석복헌(錫福軒)은 헌종이 정조를 롤모델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공간이다.


정조는 1776년 즉위 직후 규장각을 건립하였는데, 규장각의 2층 건물이 보물 창덕궁 주합루(宙合樓)였다. 1782년에는 세자의 공간으로 중희당(重熙堂)을 건립하였는데, 바로 이웃한 곳에 주합루를 모방한 소주합루(小宙合樓)를 세웠다. 1층에는 세자가 읽을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 의신각(儀宸閣)이 있었고, 2층의 소주합루는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다. 헌종은 1847년 낙선재를 지으면서 소주합루의 이름을 승화루로 바꾸었다. ‘승화(承華)’는 ‘정화(精華)를 잇는다’는 뜻으로, 많은 책과 글, 그림을 수집하여 그 빼어난 정화를 이어받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정조가 세운 왕실 도서관 규장각의 정신을 계승하려고 했던 것이다. 승화루 뜰엔 큰 돌을 움푹 파서 만든 작은 연못인 ‘향천연지(香泉研池, 향기나는 샘과 벼루 같은 연못)’가 있어서 운치를 더해 주었다.


헌종은 정조가 그랬던 것처럼 승화루에 많은 서책을 보관했다. 승화루에는 보관 서책 목록을 정리한 『승화루서목(承華樓書目)』이 있다. 서목에 의거하면 책이 총 3,742책이며 서화는 총 665점에 이른다. 승화루 서고에는 수많은 그림과 도서, 인장을 수집해서 보관했는데, 『승화루서목』에 실린 목록을 보면 양과 질 모두 당대 최고 수준의 작품이 보관되어 있었음이 나타난다. 낙선재를 짓고 올린 상량문에는 “동벽(東壁)에는 온갖 진귀한 서책이 빛나고, 서청(西淸)에는 묵은 나무 휘날려 창이 영롱하다. 잘 꾸며진 서적이 많고 아름다운 비단 두루마리는 성상이 을야(乙夜, 밤 10시경)에 볼 자료로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정조를 계승하여 서책을 보관하고 연구하려는 헌종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01.낙선재 후원 화계 Ⓒ국가유산포털
헌종과 경빈 김씨의 사랑 공간

헌종 재위 9년인 1843년 8월 25일 첫 번째 왕비 효현왕후 김씨가 보물 창덕궁 대조전에서 16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헌종은 새로운 왕비를 맞이해야 했고, 왕비 승하 후 1년여 만인 1844년 10월 18일 남양 홍씨 홍재룡의 딸을 계비(효정왕후)로 맞이하였다. 그런데 효정왕후가 간택된 지 3년 만인 1847년 7월에 대비인 순원왕후는 언문 교지를 내려 중전에 병이 있다는 이유로 헌종의 후궁을 간택하게 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내렸다. “국조의 전례를 따라 사족(士族) 가운데에서 처자를 가려 빈어(嬪御, 후궁)에 둔다면 저사(儲嗣, 왕위를 이음)를 널리 구하는 도리가 오직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제 언문으로 조정에 하교하는 것은 매우 미안하나 이것은 실로 국가의 큰 계획이므로 어쩔 수 없이 이처럼 누누이 하니, 경들은 종사의 큰 경사가 있을 도리를 생각해야 한다”라며 후궁의 간택이 왕의 후계자를 만들기 위한 조처임을 알렸다.


14세부터 19세까지 처녀를 대상으로 금혼령이 내려졌고, 그 해 10월 20일 김재청의 딸을 간택하여 경빈으로 책봉하였다. 경빈의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를 배출한 명문 가문 출신이었다. 후궁을 간택하면서 가례청(嘉禮廳, 혼례를 담당하는 관청)을 설치하고 혼례를 행한 것도 특별한 일이었다. 그만큼 경빈에 대한 예우와 후사를 잇게 하려는 기대가 컸던 것이다. 헌종과 혼례를 치른 이후 경빈은 ‘순화궁(順和宮)’이라는 궁호를 받았다. 헌종이 경빈을 총애한 상징적인 공간이 낙선재 동쪽에 지은 안채 석복헌(錫福軒)이다. 낙선재는 사랑채인 낙선재만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낙선재와 석복헌, 대비의 거처 수강재(壽康齋)까지 총 3개 건물을 함께 지칭하기도 한다.


낙선재는 헌종이 20대 이후 본격적으로 왕권 강화를 시도하던 시기인 1847년에 건립되었다. 1820년대에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그린 국보 〈동궐도(東闕圖)〉를 보면 낙선재는 창경궁 영역에 속해 있지만, 현재는 창덕궁 영역에 속해 있다. 수강재는 수강궁(태종이 상왕으로 있을 때의 거처)의 자리에 정조가 새롭게 지은 건물이었는데, 1848년 10월에 고쳐 지은 후에는 대비 순원왕후의 거처로 활용되었다. 수강재는 대비에게 경빈과 자신의 관계를 인정받으려는 헌종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낙선재는 헌종이 20대 이후 본격적으로 왕권 강화를 시도하던 1847년에 건립됐다.


02.석복헌 전경 Ⓒ국가유산포털 03.낙선재 뒤로 상량정이 보인다. Ⓒshutterstock
낙선재에 단청을 하지 않은 까닭은?

헌종의 문집인 『원헌고(元軒稿)』에 수록된 낙선재 상량문에는 “듣건대, 순(舜)임금은 선(善)을 보면 기뻐하여 황하가 쏟아지는 듯하였다. … 붉은 흙을 바르지 않음은 규모가 과도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화려한 서까래를 놓지 않음은 소박함을 앞세우는 뜻을 보인 것이다”라고 하여 순 임금이 ‘선(善)을 보면 기뻐했다’는 점과 화려함을 따르지 않고 소박함을 내세우고자 한 뜻을 담아서 낙선재에 단청을 칠하지 않았음을 파악할 수 있다. 낙선재 건립 이듬해인 1848년(헌종 14) 8월 11일, 헌종은 경빈 김씨의 공간인 석복헌을 지었다.


석복헌은 ‘복(福)을 내리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복은 왕세자를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조를 멘토로 삼았던 헌종은 후궁을 맞이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행보를 이어갔다. 정조가 정미년인 1787년(정조 11)에 후궁인 수빈(綏嬪) 박씨를 들이고 집복헌(集福軒)에 거처하게 한 것과 같이 헌종은 꼭 60년 만인 1847년 10월 경빈을 후궁으로 맞이했고 경빈을 위해 석복헌을 조성했던 것이다. 수빈 박씨가 집복헌에서 순조를 낳은 것과 같이 경빈 김씨가 석복헌에서 아들을 낳아 주기를 고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헌종의 기대와 달리 경빈은 후사를 두지 못했고, 경빈을 맞이한 지 불과 2년도 되지 못한 1849년 6월 6일 헌종은 창덕궁 중희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헌종이 승하한 후 경빈 김씨는 궁궐 밖으로 나가야 했고, 한성 중부 인사동에 위치한 순화궁(順和宮)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순화궁 자리에는 1919년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태화관이 있었고, 현재에도 ‘태화빌딩’ 앞에는 이곳이 경빈 김씨의 거처임을 기억시켜 주는 ‘순화궁터’ 표지석이 있다.


04.〈동궐도〉에서 낙선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유산포털
낙선재를 돋보이게 하는 공간들

헌종의 승하 후에도 낙선재 일대에는 이곳을 운치 있게 만들기 위해 조성한 정자와 정원, 연못 등의 공간이 남아 있어서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낙선재를 구성한 3개 건물 뒤편에는 화초, 석물, 꽃담 굴뚝 등으로 조성된 화계(花階)가 있다. 출입문인 장락문(長樂門)에는 흥선대원군이 쓴 편액이 걸려 있으며, 장대석으로 쌓아 꾸며놓은 화계에는 괴석(怪石)이 배치되어 있는 것도 눈길을 끈다. 괴석을 놓은 화강암 받침대에는 ‘소영주(小瀛洲)’, ‘금사연지(琴史硯池)’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꽃담 너머로는 취운정(翠雲亭), 상량정(上凉亭), 한정당(閒靜堂)이 조성되어 낙선재의 아름답고 소박한 경치를 조망하게 한다.


수강재 북측 화계 위에 있는 취운정은 숙종 때인 1686년에 지어졌다. 숙종은 이곳을 배경으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낙선재 서북쪽에는 정육각형 정자인 상량정이 있는데, ‘서늘한 곳을 오르다’는 이름처럼 여름철에 찾으면 더욱 좋다. ‘한가롭고 고요하다’는 뜻의 한정당은 석복헌 뒤편에 위치한 건물로 누마루 창문에는 창호지를 붙이지 않고 유리를 덧대었다. 앞뜰에는 괴석 여러 개가 놓여 있는데 두툼하고 정교한 받침대가 눈길을 끈다.


근현대까지 낙선재는 조선 왕실 사람들의 거처 공간이 었다. 헌종의 거처 낙선재에는 고종과 순종이 거처하기도 하였으며, 영친왕이 1963년까지, 그 부인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살았다. 경빈 김씨가 처음 거처했던 석복헌에는 마지막 황후 순정황후가 1966년까지 살았다. 순원왕후의 거처 수강재에는 1962년 일본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덕혜옹주가 살다가 1989년 생을 마감했다. 헌종의 경빈 김씨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 낙선재는 조선 왕실 여성의 마지막 공간이라는 역사를 만들었다.


단청이 없는 소박함을 유지하면서 아기자기한 정자와 꽃담 등이 적절히 어우러져 있는 낙선재를 찾으면 궁궐 건물의 또 다른 멋과 이곳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접할 수 있다.


낙선재는 왕의 서재이자 거처이며, 사랑과 이상이 함께 머문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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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