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제비원 미륵불

안동시 이천동 태화산 오른쪽 기슭에 있는 제비원 미륵불로도 불리는 고려시대 11세기경에 조성된 마애불로 공식 명칭은 안동 이천동 석불상(보물 제115호)이지만, 제비원 미륵불 또는 제비원 석불로 불리고 있다.

제비원 미륵불

안동시 이천동 태화산 오른쪽 기슭에 있는 제비원 미륵불로도 불리는 고려시대 11세기경에 조성된 마애불로 공식 명칭은 안동 이천동 석불상(보물 제115호)이지만, 안동 지역에서는 제비원 미륵불 또는 제비원 석불로 불리고 있다. 그 옛날 안동 소주병에 찍혀있던 미륵불 상표다. 고려시대에 훼손된 불두를 복원하고 전각 중수와 삼 층 석탑을 조성하였다.

이 불상 뒤편에 있는 조그만 절이 바로 연미사(燕尾寺)다. 634년(신라 선덕여왕 3) 명덕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명덕은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의 제자 중 한 명으로, 바위에 불상을 새겨 모시고 사찰을 세웠다. 그 뒤 불상을 덮은 지붕이 제비와 비슷하여 연자루(燕子樓)라 하였고, 승려가 거주하는 요사채는 제비꼬리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연미사(燕尾舍)라고 이름 지었으며, 법당은 제비부리에 해당한다고 하여 연구사(燕口寺)라 불렀다.

자연 암석에 조각하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 얹은 마애불이다. 조선 중기까지 연자루라는 전각이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훼손이 적은 편이다. 토속적인 느낌이 강한 고려시대 불상 양식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전체 높이 12.38m, 너비 7.2m의 거대 암벽 위에 2.43m 높이의 머리 부분을 조각하여 얹어 놓은 입상이다. 머리의 뒷부분은 거의 파손되었으나,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가 높이 솟아 있고, 얼굴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흐르고 있어 거구의 불상임에도 전체적인 형태는 자연스럽다. 머리와 얼굴 특히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채색되었음이 분명하다. 옷은 양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몇 안되는 옷 주름은 매우 도식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양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어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하여 연구사는 폐사되었고 석불만 남아 있었다. 사찰의 이름마저 사라져 연비원불사로, 전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봉정사의 신도 모임으로 등촉계의 일원인 거사림(居士林)에서 사찰의 창건을 발의하여, 1934년 연미사 터에 사찰을 새롭게 조성하고 예로부터 내려오던 연미사로 하였다.

안동이천동석불상이 위치한 이 지역은 속칭 제비원으로 불린다. 그런데 이름에서 원은 사람들이 여행길에서 쉬어가던 일종의 여관을 뜻한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지방으로 출장 가는 관리들의 숙소로 쓰기 위하여 교통 요지에 있는 사찰을 국가적인 차원의 숙소인 원(院)으로 지정하여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영남에서 충청도나 경기도, 또는 서울로 갈 때에는 반드시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는데, 그 길목에 있던 것이 바로 연비원(燕飛院)이었다. 따라서 연미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전설의 배경이었던 연(燕), 즉 제비에 국가지정 숙박시설인 원이 결합 되어 제비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비가 날아가는 쪽의 형세라고 해서 연비원 또는 연미원이라고 하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석불상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을 모두 아우르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해석이다. 특히 제비원은 성주풀이에서 “성주 본향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 일러라”라는 사설에 나오듯이 우리나라 성주 민속신앙의 정신적인 근원지로서 뜻깊은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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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